[북한 어제와 오늘] 아프간‧北의 비극과 소련 대사의 ‘우유부단’

이슬람 근본주의자 앞에 무너진 아프가니스탄의 정부를 바라보는 세계는 충격에 휩싸였다. 한국처럼 미국의 ‘주요 비(非) 나토 동맹국’이었던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에 어둠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2021년 8월 15일 탈레반의 권력 장악으로 그 나라 국민들이 언제 자유의 빛을 다시 볼 수 있을지 암담한 상황이다.

여기 북한을 보자. 김정은 정권은 이 지구상 제일 잔혹한 정권 중 하나다. 특히 올해 초 개최된 당(黨) 제8차 대회 후 북한 당국이 반개혁 노선을 확고히 세운 후 북한 주민들의 미래가 더 불투명해졌다.

놀랍게도, 필자는 아프가니스탄과 김씨 일가 사이에서 어느 특정 인물이 겹친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아마 알렉산드로 푸자노프(사진)라는 인물을 들어 본 적 없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이번 칼럼에서 자세히 소개하자고 한다.

스탈린 시대 말기 푸자노프는 권력자였다. 1952년 스탈린은 엘리트 교체 작업을 재차 단행했다. 이때 지방에서 주(州) 당위원회 제1비서였던 푸자노프는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내각 총리로 추대됐다.

그러나 오래가지 않았다. 스탈린 사망 후 권력을 장악한 게오르기 말렌코프와 니키타 흐루쇼프는 이 ‘새로운 엘리트’에 대한 탄압을 시작한다.

다만 이제 시대가 바뀌었다는 판단에 자신의 정적들을 사형보다는 강등만 했다. 원래 소련에서는 핵심 간부였던 어떤 자가 권력 투쟁에 실패하면 몽골이나 북한과 같은 중요하지 않은 나라 대사로 파견하곤 했다.

이렇게 푸자노프는 외교관이 됐는데, 향후 이 결정은 북한과 아프가니스탄에서 악영향을 미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1957년 2월 푸자노프는 주 북한 소련 대사가 됐다. 불과 몇 달 전 소위 ‘8월 종파 사건’으로 김일성이 정권을 공고히 한 뒤라 소련 대사관의 역할이 중요할 때였다. 북한은 당시 앞으로 소련을 따라 개혁의 길로 나갈지, 초(超)스탈린주의 길로 갈지 결정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또한 동유럽과 달리 북한 주둔 소련 군대는 없었다. 그래서 김일성을 압박할 수 있는 조직은 ‘대사관’뿐이었다.

여기에서 푸자노프 대사는 완전히 실패했다. 그의 우유부단한 태도를 본 김일성은 결국 소련의 말을 안 들어도 된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이때부터 북한은 진짜 ‘김일성의 세상’이 됐고, 지금도 끝나지 않은 비극의 시대가 열리게 됐다.

15일(현지시간)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에서 카타르로 향하는 미군 C-17 수송기에 수백 명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 이 비행기의 탑승 정원은 200명이지만 탈레반이 장악한 아프간을 탈출하려는 이들이 몰리면서 3배가 넘는 640명이 탔다. /사진=트위터

1962년 푸자노프는 북한에서 떠났고, 유고슬라비아와 불가리아를 거쳐 1972년 10월 주 아프가니스탄 소련 대사로 임명됐다. 당시 무함마드 자히르 샤의 입헌 군주제하에 나라가 운영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아프가니스탄 역사상 마지막 안정된 정권이었다. 정권 붕괴 후 수십 년의 전쟁, 쿠데타, 내전 시대가 개막했다.

1973년, 푸자노프 임기 중에 무함마드 자히르 샤가 타도됐고, 군주제 대신 세속 독재 정권이 탄생됐다. 그 후 1978년 4월 이 정권도 무너졌고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장악했다. 그렇게 하피줄라 아민과 누르 무함마드 타라키의 양두 정치 시대는 개막했지만 권력 야심이 많은 아민이 소련 승인 없이 타라키를 당 총비서와 혁명위원회 위원장 자리에서 해임한 후 암살했다.

바로 그때 소련 정부는 아프가니스탄 직접 개입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계획은 아민을 암살하고 아프가니스탄을 직접 공격하는 것이었다.

당시 푸자노프 대사는 상부에서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지 추측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보고서에 상관들이 듣고 싶어하는 내용을 작성한 것이다. 그는 평화 유지 노력보다는 아민을 ‘피에 주린 폭군’으로 묘사하는 보고서를 모스크바에 보냈다.

이에 결국 소련 특공대는 하피줄라 아민의 궁전을 공격하였고 아민을 살해했고, 이후 소련 군대는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했다. 이렇게 10년간 이어지는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은 발발했다.

알렉산드르 푸자노프는 두 번 암흑의 역사를 바꿀 기회가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는 북한에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고,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전쟁으로 가는 길을 막지 않았다. 그는 결국 북한과 아프가니스탄 주민들의 고통을 외면한 셈이 됐다.

그러나 그는 이 같은 사실을 알고 있을까? 언론 매체에 거의 등장하지 않아 이를 확인할 길은 없다. 1998년 푸자노프는 결국 사망했지만, 그의 우유부단한 태도는 오늘날 북한에도 아프가니스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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