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읽기] 2020 北 경제서 1990년대 데자뷰 보게 되는 이유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15일 “대동력 기지 북창화력발전연합기업소가 전력생산 투쟁으로 끓고 있다”면서 관련 사진을 공개했다. /사진=노동신문 뉴스1

북한은 전기가 항상 부족하다. 평민들의 집에는 하루에 한두 시간 전기가 들어온다. 이마저도 제대로 보장이 안되는 지역이 수두룩하다. 북한의 발전설비용량이 약 700만kW에 머물고 있다. 당국은 전력생산은 인민경제의 생명선이라며 전력공업 부분의 효율 증대를 요구하지만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북한 내각은 각급 공장과 기업소에 부족한 전력을 자체로 해결할 것을 지시했다. 북한에서 부족한 전력을 자체로 해결할 수 있는 단위는 10% 남짓에 불과하다. 결국 정면돌파 정신으로 없는 전력도 만들어 내라는 것이 북한 당국의 대책이라 할 수 있다.  

평안도 데일리NK 소식통에 따르면, 이달 초 모든 공장기업소 노동자들을 개간지 동원에 40일 이상 동원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21세기에 황무지를 개간한다며 공장 노동자들에게 삽과 곡괭이를 쥐어주고 돌을 주워내고, 삽과 곡괭이로 땅을 파내고, 척박한 땅에 거름을 내어 농사를 짓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몇알의 식량이 나올지 의문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집권 초기 2012년 4월 공식석상에서 다시는 인민들의 허리띠를 졸라매게 하지 않겠다고 장담했다. 하지만 8년 동안 지속적으로 ‘자력갱생’ ‘간고분투’가 강조되어왔고, 올해는 ‘정면 돌파’가 추가되었다. 그러나 주민들은 손에 쥔 것은 별로 없다는 평가하고 있다. 

북한 경제 상황은 왜 근본적인 변화가 없을까? 

1994년 엄청난 자연재해로 북한의 서해곡창지대와 전국의 논과 밭이 순식간에 물에 잠겨버렸다. 1980년대 말 전 세계적인 개혁개방의 흐름에 동참하지 않고 이른바 “자력갱생”의 ‘정신’을 고집하던 폐쇄경제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변화를 두려워하고 정권유지에 급급한 낡고 진부한 지도부에 내리는 가혹한 응징이었다. 당시 엄청난 물자 부족에 의한 가격폭등으로 가계와 기업들이 순식간에 거지 신세가 됐다. 당과 국가만 믿고 배급과 공급에 의존하여 살던 수백만의 주민들이 아사했다. 

그리고 30년이 흘렀다. 북한 경제는 시장이 출현하고 기업의 자율성이 늘어난 변화가 있었지만 전체 경제 규모나 체질은 큰 변화가 없다. 

1990년대 중반 당시 가장 시급한 조치는 식량수입이었다. 당시 필자의 경험에 따르면 지방인민위원회들은 정부를 향해 “현재의 상황이 수개월 더 지속되면 지금으로부터 6개월에서 1년 후에 주민의 20% 이상이 굶어 죽을 것이다”고 보고를 보낸 바 있었다. 

하지만 정부는 사태가 발생했을 때 인민보다 자신의 정권을 먼저 생각했고 결과 효율적인 대응을 하지 않았다. 정확한 통계를 보면 아마 그 이상이겠지만 당사 아사, 병사자가 300만 명이라는 가슴 아픈 사실이 역사에 기록되었다. 

1990년대 이후 생존을 위한 주민들의 활동으로 장마당이 시장으로 변화되어 주민경제활동의 중심지로 되었다. 북한 정부는 2000년 초에 가서야 마지못해 시장경제를 인정하고 종합시장으로 시장을 공식화하였다. 

시장이 공식화 되면서 시장에서의 수요와 공급에 정부가 개입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가격이 설정되고 조절되는 시장경제가 도입되었다. 이제 정부는 시장을 보호하기만 하면 되었다. 

하지만 인민의 자유와 행복이 항상 체제 유지의 뒷전이었던 김정일 정권은 또다시 핵무장을 위한 자금마련을 위하여 인민의 주머니를 털어내는 채권 정책을 실시한다. 

당시 정부가 발행한 “인민생활채권”을 시장에서 매입하면, 주민들은 채권을 보유하는 대신, 채권을 가지고 있었던 정부는 현금을 보유하게 된다. 하지만 당연히 떨어져야할 금리는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 조치에 대해 주민들은 묵묵히 정부의 지시를 집행하였다. 일부에서 반발이 있었지만 그것은 바로 탄압되었다.

2009년의 화폐개혁은 최악 중의 최악이었다. 당시 당 계획재정부장이었던 박남기는 “현재와 같은 특별한 상황에서는 어느 개인이 판단하고 결정을 내릴 일이 아니다”고 주장했지만 최고지도부의 생각은 달랐던 것이다. 최고지도부는 박남기가 “국가 통화정책의 정신”을 어긴 것으로 판단했다. 

결국 평양은 11월 초에 사상최악의 화폐개혁을 단행했고 종합시장정책은 잠시 중단되었다. 당시 당 지도부가 강경한 태도를 보인 이유는 노동당 정치국이 이제 곧 등장할 후계자인 김정은의 실적을 만들기 위해 노후화된 계획적 사회주의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던 탓이 가장 크다. 

인플레이션이 북한의 전 지역을 강타했다. 공급이 감소되어 곡물 및 상품의 수요가 증가하고, 원의 가치가 떨어지고, 가격폭등사태로 경제의 성장은 사실상 마이너스로 전환했다. 만약 이 사태에서 정부가 재정 지출을 늘려 수입을 장려하고, 자원의 배분에 있어서 경직을 풀면 상황이 나아졌을 수도 있었다. 

해외에서 자금이 유입되면 기업의 생산구조를 갱신하고 산업가동도 정상화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계획경제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또다시 자력갱생, 간고분투로 돌아섰다.

2011년에 출범한 김정은 정권은 그동안 시장에 대한 관여가 상당히 느슨했다. 그 결과 북한경제는 일정 수준 안정되는 모습을 보였다. 시장이 안정되어 가계 경제가 편해지고 국제사회는 새 정부의 젊은 지도자에게 기대와 호기심을 가지고 지켜보았다. 

하지만 그 이후 핵개발, 미사일 발사 등 군사적 도발은 국제사회의 신뢰를 떨어드리고 실망을 주었다. 국제사회는 신뢰를 보이지 않는 북한에 강력한 제제로 대처했다. 상황이 어려워진 김정은이 국제무대로 나와 싱가포르로 베이징으로 하노이로 동분서주했지만 결과는 없었다.

지난 12월 전원회의에서 김정은은 모든 책임을 대외적으로는 미국과 한국 정부, 대내적으로는 권한 없는 내각과 경제전문가들, 그리고 인민들에게 밀어버리고 정면 돌파를 주문했다. 목표는 경제성장, 주공전선은 농업전선이다. 

50년대 말 경제난 때 김일성은 전설속의 ‘천리마’를 불러냈다. 그의 손자 김정은도 집권초기 한 수 더 떠서 ‘만리마’를 불러냈지만 ‘만리마’는 폐쇄적인 구조에서 제대로 달릴 수가 없다. 만리마가 달릴 길은 개혁개방의 길이며 도착지는 자유민주사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