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부름은 없었다. 그러나 나는 펜 대신 총을 들었다”

▲ ‘춘천 6·25참전 학도병 기념탑’에 헌화하는 학도병 참전자들

“적화통일의 야욕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펜 대신 총을 들었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자 38선 이남에 사는 많은 사람들은 남(南)으로, 남(南)으로 피난길을 떠났다. 그 중에 일부는 전쟁을 피해 외국으로 도피하기도 했다. 그러나 북한의 침공에서 나라를 지켜내기 위해 스스로 전쟁터에 뛰어든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 중 펜 대신 총을 들고 전선에 나선 2만 명의 젊은 학생들을 우리는 ‘학도의용군’이란 이름으로 기억한다.

이들은 군번이나 군복도 없이 총 한 자루에 몸을 의지해 전장(戰場) 한 가운데로 뛰어 들었다. 낙동강 전선에서부터 투입된 ‘학도의용군’은 포항여중 앞 전투와 동해안 상륙작전 등에서 큰 전과를 남겼고, 이 당시 1만 3천명에 달하는 학도병들이 전사했다.

학교 대신 전쟁터에서 꽃다운 시절을 보낸 이들은 50~60대가 돼서야 ‘명예졸업장’을 받고 못다한 학업의 한(恨)을 덜 수 있었다. 그러나 군번도 없이 전쟁에 참전했던 이름 모를 학도병들은 ‘국가 유공자’로서의 적절한 대우도 받지 못하고 있다.

‘대한학도의용군회’ 경서호 부회장(78)도 춘천고등학교 2학년 재학 시절 피난길에 나선 가족들을 뒤로한 채 전쟁에 참전했다. 그는 전쟁에 참여했을 당시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기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학도병들은 애국정신과 구국정신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며 “국가적 위기 앞에서 펜 대신 총을 들고 나라를 지킨 사람들”이라고 주저 없이 답했다.

경 부회장은 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고등학교 2학년에 불과했지만 나라를 지켜야겠다는 마음은 누구보다 뜨거웠다. 가족들을 뒤로 하고 전쟁에 나서야 겠다는 결심을 하기 쉽지 않았겠다고 묻자 “우리는 일제 말기에 국민학교를 나온 세대다. 학교에서도 학도호국단을 조직해 군사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애국심이나 구국 정신이 매우 높았다”고 말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구국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겠지만, 우리는 가족들이 피난 가는 상황에서도 남아서 싸워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18살이면 세상 물정도 모를 때 아닌가. 그러나 우리는 국가의 부름도 없이, 군번도 없이, 오로지 나라를 위해 길을 나섰다.”

▲ 6·25전쟁 당시 미군과 함께 사진을 찍은 학도병들

6·25 전쟁 당시의 상황을 묻자 ‘애국심’에 가슴 뜨거웠던 소년 시절이 떠오르는 듯 목소리에 절로 힘이 실렸다. 자긍심 서린 그의 목소리에서는 낙동강 전선의 매캐한 포화가 그대로 실려왔다.

“당시 인근에서 180여명이 학생들이 같이 전쟁에 참전했다. 피난 행렬을 따라가면서 총 한 자루 가지고 적과 맞섰다. 우리가 없었다면 낙동강 전투에서도 인민군의 공격을 버텨내지 못했을 것이다. 유엔군이 합류할 때까지 우리가 낙동강을 사수해서 부산까지 밀리지 않았던 것이다. 나이는 어렸지만 인민군이나 중공군과 싸울 때 두려움 없이 공격에 앞장섰다.”

그러나 사춘기 시절의 그에게 있어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친구들의 죽음은 감당하기 힘든 충격과 공포였다. “같이 갔던 학도병 친구가 총에 맞아 쓰러지면 살려보겠다고 포탄이 떨어지는 전쟁터를 끌고 다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동기들이 죽은 것을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린다. 내가 지금 이렇게 살아있는 것도 기적 같은 일이다.”

열 여덟, 소년의 목숨을 걸고 지킨 나라이건만 요즘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안타깝기만 하다고 경 부 회장은 한숨을 내쉰다. 그는 최근 제기되고 있는 ‘독재 정권’ 논란에 대해 묻자 “김정일 정권이 독재지 우리가 어떻게 독재일 수 있느냐”며 “우리는 그 독재와 싸운 사람들”이라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이 나라가 있을 수 있었던 것은 민주화 이전에 구국이 있었기 때문”이라며 “북한에 갖다 줄 국가 예산은 있어도 나라를 지킨 애국자들을 대우할 생각은 안 하는 것이 지금 대한민국의 주소”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언론에서도 6·25전쟁 기념일이 다가와도 이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는다.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킨 아버지 세대들에 대한 존경도 찾아볼 수 없다”는 쓴소리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살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목숨을 바쳐 지킨 나라인데 그 나라가 잘 되는 모습을 꼭 봤으면 좋겠다”며 마지막까지도 나라 걱정이 앞섰다. 까까머리 고등학생 때부터 백발이 된 지금까지도 그의 가슴에는 ‘구국’이라는 두 글자가 크게 새겨져 있는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