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 친북좌파, 분명한 수구세력입니다”

“아버지가 공개처형 됐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눈앞이 캄캄했다”

탈북 11년 차인 정성산 감독은 남한 사회에 나름대로 적응하며 감독으로서 자리를 잡아가던 2002년 아버지의 공개처형 소식을 듣고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북한은 남한의 탈북자들을 위협하기 위해 ‘시범게임’(본보기)으로 정감독의 아버지를 공개처형 시킨 것이다. 북에 두고 온 가족들에게 항상 미안함을 갖고 있었던 정감독에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충격이었다.

그 이후 정감독은 새로운 길을 결심하게 된다. 북한의 공개처형을 비롯한 반(反)인권 만행을 공연예술로 승화시켜 아버지의 한을 풀어드리는 것이다.

요즘 그는 북한 정치범 수용소 생활을 그린 뮤지컬 ‘요덕스토리’를 한창 만들고 있어 눈코 뜰 새 없다. 바쁜 와중에도 정감독은 “북한의 실상을 가장 정확하게 알리고 있는 <데일리엔케이>의 요청이기 때문에 당연히 인터뷰에 응한다”면서 흔쾌히 승낙했다.

기자가 처음 만난 정감독의 첫인상은 탈북 10년 차를 훌쩍 넘겨서인지 ‘탈북자 감독’보다는 그냥 ‘개성 있는 감독’이라는 수식어가 더 어울려 보였다. 인터뷰 내내 뮤지컬 배우, 기획사 사장, 관계자들의 전화가 수시로 걸려와 그의 다망(多忙)을 실감케 했다.

– 정감독님, 만나 뵙기가 참 힘들었습니다. 많이 바쁘신가 보네요.

죄송합니다. 이것저것 하는 것이 많아서 좀처럼 시간이 안 납니다. 제가 영화감독으로 데뷔한 ‘빨간 천사들’을 계속 준비 중이며 요즘은 뮤지컬 준비가 한창 하고 있어 정신 없습니다.

하지만 <데일리엔케이> 애독자입니다. <데일리엔케이> 홈페이지를 ‘즐겨찾기’에 추가해 놓고 매일은 힘들어도 이틀에 한번씩은 방문합니다.

아버님의 공개처형이 인생의 전환점

– 북한인권 문제에 특별히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사실 저는 민족주의적 시각이 강했습니다. 그러니까 북한이 밉지만 같은 민족, 동포이기 때문에 향후 통일을 하려면 북한을 보듬고 가야 한다는 시각을 갖고 있었죠. ‘햇볕정책’을 옹호했습니다.

그러나 2002년 북한의 공포정치의 산물인 공개처형으로 아버님이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전 생각을 바꾸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절에 들어가 일주일간 식음을 전폐하며 저의 감독인생을 고민했습니다. 아버님을 무참히 처형시킨 북한의 인권 현실을 문화의 힘으로 알려야 한다는 결심을 하게 됐습니다.

“국내 친북단체들은 수구세력”

– 그럼 현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소위 ‘좌파적 시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제가 각색한 영화들은 ‘쉬리’, ‘공동경비구역 JSA’, ‘실미도’ 등 좌파적 성향의 영화들입니다.

아버님의 공개처형 소식을 듣고 생각을 바꾸게 된 이후 현재 노무현 정권이 너무나 문제가 많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노정권은 한국을 좌-우로 분리시키고 좌파적 성향을 강한 사람들을 주위에 포진시켜 과거 햇볕정책을 답습하고 있습니다.

– 이른바 친북단체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가 부산아시아게임을 보러 갔을 때 겪은 일입니다. 북한 선수들을 응원하는 남한의 대학생들이 북한식 구호를 외치고 구호 내용과 방식이 똑같아서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보수 단체들이 김정일 사진을 불태웠는데 그 광경을 본 한총련 학생들이 보수단체 회원들을 욕하며 울부짖는 모습을 봤습니다.

남한의 친북세력에게 붙는 ‘진보’라는 말을 ‘수구’로 바꿔야 합니다. 과거로 돌아가려는 것은 진보가 아니고 수구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이런 좌-우 분열을 김정일이 십분 이용하고 있다는 것을 보더라도 진보라는 가치를 그들에게 남겨 두고 싶지 않습니다.

– 본인 이야기로 돌아가서 평양연극영화대학을 졸업하셨는데 대학생활은 어땠나요?

저는 평양연극영화대학 연출학과를 졸업했습니다. 평양연극영화대학은 완전히 스파르타식입니다. 볼펜이 일주일에 3개를 쓸 정도로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일주일에 여러 편의 시나리오를 써야 할뿐더러 ‘주체문예의 타당성’, ‘영화의 철학적 의미’ 등을 작성해서 제출해야 합니다.

당시에 정말로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보통 일반인들은 ‘생활총화’를 1주일에 한번씩 하는데 문화예술 관련인들은 이틀에 한번씩 ‘생활총화’를 해야 했습니다.

김정일이 문화예술인은 수정주의에 물들 가능성이 높고 문화의 힘이 크기 때문에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지시를 내려 울며 겨자 먹기로 생활총화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한국 방송 듣다가 13년형 받아

– 최고 대학을 졸업하고 유학까지 다녀 왔는데 탈북을 하게 된 계기는?

평양연극영화대학 시절 저는 서양 문물, 특히 한국과 미국 영화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태백산맥’, ‘맨발의 청춘’을 봤는데 남한 문화를 이해하지 못해 한심하다는 생각을 하곤 했죠. 제가 재밌게 본 것은 미국 영화로, 007,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X-파일 등입니다.

보통 고위층 간부 자녀들은 한국영화나 미국영화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남한 방송을 마음만 먹으면 들을 수 있습니다. 애청자가 된 저는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에 가서도 한국 방송을 계속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발각되어 보위부에 갖은 구타와 고문으로 두 달간 조사를 받았습니다. 조사 결과 13년 형이 결정됐습니다. 이 후 사리원 ‘서부노동연대’로 이동하던 중, 호송 차량이 사고가 나 극적으로 탈출을 했고 북한에서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판단을 해 압록강을 넘었습니다.

– 발각된 이후 보위부에서 조사는 어떻게 이루어 졌습니까?

사단에서 조사를 받았는데 하루가 구타로 시작해서 구타로 끝난다고 할 정도로 정신없이 맞았습니다. 사실 북한에서 고위층 자식이 북한 방송을 보면 ‘조심하라’라는 충고로 그냥 넘어가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 당시 저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김일성이 죽고 난 직후이기 때문에 북한 내부 단속차원에서 제가 걸리게 된 겁니다. 시범게임(본보기)으로 처벌을 받게 된 것입니다.

시범게임 차원의 처벌은 너무나 혹독했습니다. 없는 죄를 만들어야 하고 과거 어릴 적 생각도 가물 한데 그때의 잘못도 말해야 하며 말을 못할 경우 갖은 구타와 욕설이 난무 했습니다. 보위부원들은 때리는 것도 귀찮아 참나무를 얇게 잘라 꼬챙이를 만들어 저의 손가락 끝에 꽂아 놓고 마음에 안들 때마다 몽둥이로 꼬챙이를 힘 것 내리 칩니다.

그 때의 고통을 이루 말 할 수 없이 아픕니다. 꼭 전기 고문을 당하는 것처럼 온몸이 자지러지게 아팠습니다. 그 당시 구타로 인해 지금 오른쪽 귀가 잘 안 들립니다.

“김정일이 나를 죽이면 요덕스토리는 더 많이 알려질 것”

– 이런 경험으로 뮤지컬 ‘요덕스토리’를 만들고 계신가요?

물론 제가 요덕 정치범수용소를 경험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버님이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가 처형 당하고 저 또한 수용소에 버금갈 정도로 심한 인권유린을 당해 봤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북한의 현실과 수용소 실태를 문화의 힘으로 알린다는 것입니다. 김정일은 문화예술의 힘을 알고 있습니다. 역으로 우리가 문화예술을 통해 북한인권을 알려 나간다면 북한인권실현은 더욱 가까운 미래가 될 것입니다.

– 뮤지컬을 만들지 말라는 협박도 받은 걸로 아는데요?

저는 두렵지 않습니다. 만약 김정일이 저를 죽인다면 뮤지컬 ‘요덕 스토리’는 세상에 더욱 많이 알려질 것입니다. 전 아버님 공개처형의 소식을 듣고 감독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뭐든 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아버님의 한을 ‘요덕 스토리’로 풀어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김정일에게 한마디 하겠습니다.

“지금부터 수용소 해체운동 시작이다. 네가 죽인 수천 수만의 인민들의 영혼이 지천에 떠돌아다니고 있다. 무섭지 않느냐. 적어도 네가 인간이라면 아무 이유 없이, 얼토당토 않는 이유로 인민들을 수용소에 가두고 처형하는 일을 그만두어야 할 것이다”

– 각오가 대단하십니다.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한마디 하신다면.

일전에 유럽을 방문했습니다. 제 이야기를 들은 많은 유럽인들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런데 한국 국민들은 북한인권문제를 식상해 합니다.

아직도 북한의 인권유린은 계속해서 자행되고 있음에도 노정권과 일부 세력들은 북한인권을 정치적인 이유로 외면하고 있습니다.

전 문화로 승부하겠습니다. 뮤지컬 ‘요덕 스토리’를 비롯해 수용소에 관한 영화를 만들어 북한인권 문제의 심각성을 만천하에 알리 것입니다. 지켜봐 주십시오.

김용훈 기자 kyh@dailynk.com

‘요덕 스토리’ 시놉시스

평양 왕재산수석 무용수 강련화는 2005년 김일성 생일 기념공연을 준비하는 중 당으로부터 포상을 받고 공훈배우로 격상된다. 며느리로 삼으려는 고위층 집안, 청혼하는 젊은이들, 그녀는 이미 북한 여성들의 선망의 대상이다. 이런 그녀에게 어느 날 비극은 시작된다.

그녀의 부친 강만식이 어느 날 국가안전보위부에 긴급체포, 남조선 국가 정보원의 스파이이며, 미 제국주의자들의 고용 간첩이라는 것이다. 그 날로 모든 운명은 바뀌고 온 집안은 풍지박살이 난다. 련화의 가족은 그날로 함경남도 요덕 정치범수용소로 후송된다. 또 다른 공화국의 지옥, “요덕 제 15호 관리소”

이미 련화의 가족은 공화국 국민이 아니었고, 보위부원들은 가족을 짐승처럼 학대한다. 당의 훌륭한 무용수에서 간첩의 딸로 전락한 련화는 놈들의 먹잇감이 되고 만다.

요덕수용소 경비대장 리명수 대위는 전부터 련화를 짝사랑해오던 인물이다. 공훈배우로의 련화와 간첩의 딸이 된 련화의 모습에 깊이 갈등하게 되고 부 경비대장 라혁철 중위는 취조 중에 련화를 겁탈한다. 그러던 중 당 중앙에서 긴급명령이 하달된다.

최근 타 수용소에서 수감자가 탈출하여 남조선으로 도망가 북한의 체제를 비난하고 수용소의 실상을 고발한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도주의 가능성이 있는 자를 색출하여 공개처형 함으로 도주의 희망을 아예 봉쇄하는데 본보기로 삼으라는 비밀지령이 내려진 것이다.

이에 라혁철은 강만식을 표적으로 만들자는 제안을 하고 거기에 명수는 반대를 한다. 이렇게 둘은 갈등하게 되고 결국 혁철은 련화의 동생인 혁명을 먹잇감으로 지목, 총살한다. 이로 인해 명수와 혁철의 갈등은 점점 깊어가고 련화의 애통한 노래가 울려 퍼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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