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위원장! 지난 49화 편지(‘1996년 8월, 평양의 환희’)에 친계6촌까지 수개월 깐깐한 신원조회를 마치고 중앙당(조선노동당)서 받는 해외근로자 파견승인 발표가 격동의 환희였다고 했지요. 오늘 내용은 그 연속으로 보면 됩니다.
1996년 8월 말 어느 날, 저는 평양대외건설기업소 해외파견담당 지도원에게서 “림 동무를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의 높은 신임과 배려에 의해 쿠웨이트 주재 조선광복건설회사 1직장 목공으로 임명합니다”는 통보를 전달 받았지요.
이후 모든 출국자가 해당기관에 가서 필수로 받는 ‘노동당강습’(외국서 수령 선전내용 및 방법)과 ‘외교부강습’(주재국서 평양체제의 우월성 선전방법), ‘보위부강습’(해외서 남조선안기부를 조심하는 방법)을 각각 2시간씩 수강했습니다.
해외파견이 확정된 사람은 매일 10시부터 15시까지 기업소에 나와 상부의 다음 지시를 목마르게 기다립니다. 다소 초조한 심정의 시간인데 “현지 사정은 이렇다, 저렇다, 자칫 건설계약이 취소될 수 있다” 등 온갖 유언비어가 돌지요.
참고로 1994년 7월, 김일성 사망 때 러시아건설 파견발표자 수십 명이 출국대기 도중 취소된 적이 있었습니다. 이유는 100일간의 수령애도기간에 출국이 어렵다는 평양의 사정을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모스크바의 결정이었죠.
그렇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2개월이 지나 11월 5일 오후, 상부의 지시에 따라 조선노동당 39호실 산하 대외경제위원회(김일성광장 주변 정부청사) 대외건설총국 파견국으로 갔지요. 담당자가 파견자들의 얼굴과 여권을 확인했습니다.
이어서 그는 “동무들이 쿠웨이트에서 일하고 받을 월급은 120 US달러이다. 과거 리비아(100달러), 러시아(80달러)에 비해 큰돈이니 청부(개인노동)할 생각은 전혀 하지 말고 모두가 회사 일만 열심히 하면 된다”고 당부하였지요.
당시 평양에서 일반 건설노동자가 일하고 받는 평균월급(내화, 공화국화폐) 100원은 암시장의 외화로 바꾸면 1.5 US달러에 겨우 해당되었습니다. 그러니 쿠웨이트에서 받을 월급 120달러는 굉장한 거금으로 마음이 한껏 흥분되었지요.
다음날 오전 9시, 평양대외건설기업소 마당에 저를 포함해 쿠웨이트로 떠날 노동자 20여 명이 모였지요. 3년간 헤어지는 아쉬운 작별의 순간인데 아이와 볼을 비비며, 가족·친척·지인들과 맞잡은 손을 쉽게 놓지 못하는 출국자들입니다.
평양종합인쇄공장에 근무하는 아내가 2살짜리 딸애를 업고 나를 바래주려 나왔더군요. 눈물이 글썽한 애 엄마가 “미향이 아버지! 건강 조심하고 잘 다녀오세요” 하는 말에 “그래요. 내가 없는 동안 가족을 잘 부탁해요” 라고 하였지요.
작별인사를 마친 일행은 소형버스에 올라 40분간 달려 평양순안공항에 도착했습니다. 난생 처음 보는 공화국의 유일한 국제공항인데 외국인은 물론 내국인도 없어 마치 휴업한 시설처럼 보였죠. 이어 단체로 출국수속을 마쳤습니다.
찹찹한 마음이 들더군요. 김일성 사망 이듬해인 1995년 5월부터 평양시민 식량배급이 중단된 지 19개월째입니다. 그 고통은 ‘미국과 남조선(남한) 탓’이라는 노동당이고,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애쓰는 사람들… 이게 과연 정상사회인지.
공항안내원을 따라 대기 중인 셔틀버스를 타고 150m가량 오니 평양발 베이징행 비행기 앞입니다. 나서 자란 어머니 품, 조금은 슬픈 심정으로 고향 평양을 떠나는 비행기에 탑승했지요. 그날이 바로 25년 전 오늘입니다.
2021년 11월 6일 – 평양출발 25주년에 즈음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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