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원칼럼] 우리는 힘들 때 ‘회상기’를 읽는다

▲ <항일빨치산 참가자들의 회상기> 6권에 나오는 <중대의 누나> 여주인공 모습. /사진=유튜브 캡처

2003년 어느 날 북한의 노동신문 한 켠에 ‘한 홉의 미숫가루’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필자는 백학림. 북한 정권 수립의 토대가 된 빨치산 참가자들 가운데 한 명이다. 빨치산 시절 김일성의 전령병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해방 후 북한체제 수립과정에 충직하게 김일성을 보필했고 1985년 사회안전부장(인민보안성 전신)에 임명된 이후 인생의 전부를 인민보안성에서 보냈다. 북한에서 몇 안 되는 차수 계급을 가졌던 인물이다. 북한에서 빨치산 출신은 가문의 영광이자 출세의 보증수표다. 빨치산 출신은 북한체제 건국신화 속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어느 사회에나 ‘금수저’는 존재하는데 북한에서는 빨치산 출신들이 바로 ‘금수저’다. 물론 그 위에는 ‘다이아 수저’인 김 씨 가계 인물들이 있다.

2003년 노동신문에서 ‘회상기’ 시리즈가 연재됐다. 당시 한반도는 미 부시 행정부가 ‘악의 축’ 북한과 날 선 대립각을 세우던 시점이었다. ‘우리는 힘들 때 회상기를 읽는다’ 그렇다. 북한은 대외적으로 미국과 대결국면에 놓였을 때면 어김없이 노동신문을 통해 ‘회상기’ 시리즈를 연속적으로 내보냈다. 즉 북핵 위기 및 유엔 제재 강화시기가 바로 등장 시점이다. 요즘과 같은 미북 대화국면에서는 내보내지 않는다. ‘회상기’는 김일성과 함께 항일빨치산 활동을 했던 인물들의 빨치산 활동에 관한 경험담이다. 당시 빨치산들의 적이었던 일제에 대한 증오감, 배고픔, 고난 등을 김일성에 대한 충성심으로 극복한다는 것이 ‘회상기’가 전하는 메시지다. 즉, 현재 시점과 항일무장투쟁 시기를 연결하는, 말 그대로 ‘오마주’인 셈이다.

한 사회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그 사회가 모토로 삼고 있는 가치가 존재해야 하고 ‘안티테제’ 즉 반대적 성격의 타자가 존재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북한체제의 존재가치는 항일빨치산의 경험에서 시작되는 것으로 선전되어왔다. 물론 그 중심에는 김일성이 있다. 북한은 ‘다른 것’이라는 안티테제를 상정함으로써 동일성의 강화수단으로 삼았다. 《항일빨치산 참가자들의 회상기》는 그야말로 북한 인민들에게 집단동일성을 부여하기 위한 ‘우리만의 이야기’다.

북한체제에는 이렇게 특정인들의 특정 기억을 일반화시키기 위한 장치가 발달했고 ‘회상기’도 그 가운데 하나다. 특정한 역사적 경험이 현실적 설득력을 갖기 위해서는 역사적 사건들을 이정한 틀을 갖춘 표준이야기(standard stories)로 정리하는 작업이 진행돼야 하고 ‘회상기’ 속의 경험은 대중들과 공유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실제로 일제 시대의 항일운동은 매우 다양한 반일단체들의 활동이 역동적으로 어우러져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특정 개인이나 단체가 그 운동을 독점하고 있지 않았었다. 그러나 북한은 ‘김일성’이라는 특정 인물의 경험을 ‘항일운동’의 결정체로 왜곡해 냈다. 그리고 일부 북한 주민은 아직도 그것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북한체제를 지탱하고 있는 내구성에는 여러 요인이 있지만 ‘회상기’는 단연 ‘정통성’의 문제와 연결된다. 민주주의적 합의구조를 갖추지 못한 권위주의 체제인 북한에서 민주적 절차에 의한 ‘합의’는 불가능하다. 대체적으로 인민들의 묵시적인 ‘동의’나 ‘지지’에 의해 정권 유지에 필요한 ‘정통성’이 재생산된다. 북한체제는 단순히 폭력에 의한 공포에 의해 유지되지 않는다. 북한급변사태와 관련하여 공포장치가 마비된 상황이 오더라도 북한체제를 지탱하는 ‘정통성’에 균열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북한체제는 김 씨 적통성을 갖는 누군가를 호출할 것이고 기존 시스템은 손쉽게 복원될 것이다.

과거로부터 전달된 역사적 사실을 이야기 형태로 서술한 ‘회상기’를 통한 지속성 유지의 방식은 ‘항일신화’를 그대로 흡수하려는 보편적 집단심리를 이용한 것이다. 특히 세대 계승을 통해 이전 세대의 경험이 다음 세대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지속성을 띠어야 하고 그러한 측면에서 각종 기념행사를 통해 매년 회고적으로 반복하는 것은 집단심리적 효과를 극대화할 방법이라는 것을 북한 지도부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 수령절대주의의 중심에는 김일성이 있고 김일성만의 아우라를 만들어낸 것이 바로 ‘항일투쟁경험’이다. 북한은 김일성의 경험을 다양한 국가적 재생장치를 통해 재생산해 냈기 때문에 북한체제에 대한 기어츠의 ‘극장국가’식 설명은 설득력이 있다. 김일성의 기억을 사회집단의 공공재로 확장하고 그 기억을 원활히 재생시키기 위해 그와 유사한 형태의 상징물을 만들어낸다. 기억의 전달 매개체로는 구술, 문서, 이미지, 행위 등이 있는데 구술은 말로, 문서는 글로 전해지며 이미지는 사진, 영화, 미술, 비석, 조각, 기념관 등에 의해서 전수된다. 특히, 구술의 전수는 북한에서 회상기류와 덕성실기 등 이야기체의 공간 문헌과 전국 각지의 동과 리에 혁명역사사적관이란 이름으로 존재한다. 매년 각 부문의 모범표창자들을 평양으로 초청하여 만경대와 금수산태양궁전 등을 참배케 하는 행사가 정기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도 국가의 기억을 인민들에게 내재화시키는 의례로서 매우 주목되는 현상이다.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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