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한 중인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이 북한을 위협으로 규정하고 인권문제까지 거론하자 북한 당국이 발끈하고 나섰다.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에 대한 북한의 첫 공개적 입장 표명이 미국의 대화 제안에 대한 거부 입장을 밝힌 것이라는 점에서 앞으로 북미 관계의 난항이 예상된다.
최선희 북한 외무성 제1부부장은 18일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발표한 담화문에서 미국이 먼저 접촉을 시도했다면서 “미국의 대조선(북한) 적대시 정책이 철회되지 않는 한 그 어떤 조미(북미) 접촉이나 대화도 이루어질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고 따라서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 이러한 미국의 접촉 시도를 무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최 제1부상은 미국과의 대화 거부 이유로 바이든 행정부의 추가 대북제재 시행에 대한 발언, 한미연합군사훈련과 같은 군사적 위협, 정찰자산을 동원한 정탐 행위 등을 들었다.
이런 가운데, 내부 고위 소식통은 전날 블링컨 장관의 북한 인권 발언 이후 최 제1부상 담화문에 대한 수위 조절이 이뤄졌다는 전언을 내놨다.
블링컨 장관은 17일 정의용 외교부 장관과의 한미 외교장관회담에서 “북한의 권위주의 정권은 자국민들에게 체계적이고 광범위한 학대를 계속하고 있다”며 “기본적인 인권과 자유가치를 토대로 이를 저지하는 이들과 맞서야 한다”고 밝혔다.
북한은 담화문에서 인권문제에 대한 반박을 직접적으로 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미국에 대한 강대강입장에 무게추를 더했다는 게 소식통의 설명이다.
다만 북한 당국은 여전히 대화나 도발 양극의 카드가 모두 준비돼 있다는 입장이다. 소식통은 “정부의 입장은 기본적으로 미국의 태도에 달려 있다는 것”이라며 “대화를 제안하면서도 우리를 깎아내리는 이중적인 태도로는 제안에 응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최 제1부상은 담화에서 “우리는 이미 강대강, 선대선의 원칙에서 미국을 상대할 것이라는 것을 명백히 밝혔다”며 기존 입장을 되풀이했다.
이에 대해 박원곤 이화여대 교수는 본지와의 통화에서 “북한은 여전히 대화를 하겠다는 의지를 담화에 담고 있다”며 “구체적인 조건을 달지 않고 융통성을 확보한 것 자체가 대화의 가능성을 열어둔 것”이라고 평가했다.
한편, 한미는 외교·국방장관 2+2 회의를 열고 한반도 비핵화를 위해 긴밀히 공조하기로 합의했지만 비핵화 표현에 있어서 한미 간 입장차가 오히려 명확하게 드러났다는 분석이 나온다.
미국은 ‘북한 비핵화’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반면 우리 정부는 ‘한반도 비핵화’라는 표현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의용 외교부 장관은 이날 한미 외교·국방 장관 회담 후 진행된 기자회견에서 “한반도 비핵화라는 표현은 우리(한국)는 이미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겠다고 포기 선언을 했기 때문에 북한도 우리와 같이 1991년 합의에 따라 비핵화를 같이 하자는 의도”라며 “우리는 한반도의 비핵화를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기 때문에 국제사회에서 북한의 비핵화보다는 한반도의 비핵화라는 표현이 더 올바른 표현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우리 정부의 이 같은 입장은 북한과의 대화에서 유연성을 보임으로써 협상의 폭을 넓히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 북한은 ‘한반도 비핵화’를 고집하며 주한미군 및 미군의 전략무기 철수를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진행된 미국과 일본의 공동성명에는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라는 표현이 포함됐지만 한미 간 공동성명에는 “양국 장관들은 북한 핵·탄도미사일 문제가 동맹의 우선 관심사임을 강조하고, 이 문제에 대처하고 해결한다는 공동의 의지를 재확인했다”는 문구가 담겨있었을 뿐 ‘북한의 비핵화’라는 표현은 들어가지 않았다.
또한 전날 배포된 외교부·국방부의 보도자료에는 ‘한반도 비핵화’라는 표현이 쓰였지만 미국 국무부와 국방부의 보도자료에는 ‘북한 비핵화’라는 문구가 사용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