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탑승 헬기에 연발사격?…인민군 ‘흑역사’ 전말은

[북한 비화 ] 10대 시절 김정은이 겪은 아찔한 사건…김정일, 철저히 비밀에 부쳐

청년대장 시절 김정은. /사진=조선의 오늘 캡처

북한 총참모부 작전국 역사기록부(처)에는 ‘반항공 1호 사고‘ 당시의 아찔한 상황이 극비 문서로 남아있다.

1996년 여름부터 스위스 중부에 위치한 수도 베른에서 유학한 김정은은 2001년 김정일의 명령으로 북한에 돌아와 개별교사들로부터 엘리트교육을 받았다. 구시가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아름다운 도시 베른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김정은은 귀국 후 딱딱한 학습과 궁중생활에 종종 싫증을 느꼈고, 그때마다 평양 시내를 떠나 교외의 별장으로 향하곤 했다.

귀국 이듬해인 2002년 봄, 김정은은 평양에서 강원도 원산의 별장으로 가기 위해 아버지 김정일의 허락을 받아 김 씨 가문의 전용 헬기, 일명 ‘1호 직승기’에 몸을 실었다. 당시 그와 동행한 일행은 친위대원 6명과 담당의사 2명뿐이었다.

북한군 총참모부 작전국 역사기록 담당자의 증언에 따르면 사건 당일 새벽 0시 호위총국은 총참모부에 “아군 헬기 한 대가 07시에 ‘xxx’ 좌표 작전 영공을 지나갈 것이므로 대공 감시만 강화하라”는 특별 전보를 보냈다. 이후 작전국은 통신국을 통해 좌표 안에 있는 육·해·공군의 총참모부 작전 직일망 무선 당직수들에게 무전 전문으로 이를 신속히 전달했다.

그날 아침 7시. 김정은이 탄 헬기가 예정대로 이륙해 원산을 향해가고 있던 순간, 갑자기 반항공 포무력의 화력사격이 가해졌다. 그것도 연발사격으로…. 분명 아군 헬기가 지나갈 테니, 감시만 강화하라고 특별 전보를 보냈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예기치 못한 사격에 친위대원들은 당시 18살이었던 김정은을 급히 에워싸고 급기야 그에게 낙하산 배낭을 메어주었다. 헬기 조종사 2명은 최대의 기술을 발휘해 줄행랑을 치며 아군의 방공망을 간신히 벗어났다. 다행히도 김정은이 탑승했던 헬기는 최신 방탄 기능을 갖추고 있어 위기를 면할 수 있었다.

사건 발생 후 김정은이 별장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보고를 받은 김정일은 차마 아들이 헬기에 타고 있었다는 말은 꺼내지 못하고 이번 사건을 엄중히 파악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총참모부 작전국은 13명의 검열소조를 조직하고, 암암리에 검열에 돌입했다.

검열내용은 상급의 명령 전보문이 하급 부대까지 정확히 전달됐는지 여부와 전달 시간, 실탄발사 부대의 싸움준비 완성 문제 등이었다. 지도소조는 먼저 호위총국의 전문을 가장 먼저 받아 각 무선망들에 전달한 송신내용과 근무일지를 검열했다. 여기에 별다른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 소조는 다음으로 반항공 발사단위 작전부와 통신부의 당일 근무자 명단과 근무일지를 들여다봤다.

근무수행 체계가 정상적으로 가동됐다면, 무전 전보문은 북한군 ’03분 통신’ 전보처리 일상 지휘 시스템에 따라 상급통신망 당직수→통신직일관→작전직일관→수발원→변신부→부대별 작전방향부서까지 20분 내로 전달돼야 했다.

소조의 검열 결과, 전보문은 작전직일관 선까지만 정확히 처리된 것으로 파악됐다. 문제는 이를 보통의 전보로만 생각하고 안일에 빠져 있던 수발원이었다. 이후 단계에서 전보문을 받은 수발원은 이를 곧장 변신부로 전달하지 않고 날씨가 춥다면서 벙커 전투근무장 내에서 잠을 자다가 오전 07시가 돼서야 근무 교대한 다른 수발원에게 이를 넘겼다. 전보문은 무려 6시간 45분가량 수발원 근무장에 멈춰있었던 것이었다.

아울러 검열소조는 당일 헬기에 연발사격을 가한 고사총 및 고사포부대에 대해서도 검열을 진행했다. 고사총대대는 영공에 침입한 불명의 헬기를 발견하고 ‘선 처리 후 보고’ 매뉴얼에 따라 일제 사격을 가했으나, 아군헬기에 대한 감식도 제대로 안했고 사전에 총참모부의 승인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 문제가 됐다.

이 같은 검열 내용을 종합적으로 보고 받은 김정일은 대노했고, 그런 최고지도자의 모습에 검열소조 성원들은 긴장감을 떨치지 못했다. 그 헬기에 ‘장군님(김정일)의 자제분’이 타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던 검열소조 성원들은 군에 피바람이 불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김정일은 이 사건을 철저히 비밀에 부치도록 했다. 오히려 이를 누설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용서치 말라는 내적 지침까지 내렸다. 조선인민군 건군 이래 초유의 ’흑역사‘로 기록된 이 사건은 실제 지금까지도 기밀 사항으로 남아있다.

시간이 흘러 김정일의 후계자로 인민무력성 6호동 청사에 입성한 청년대장 김정은은 이 사건으로 인한 트라우마 때문인지 포무력 분야와 공군의 싸움준비 완성에 상당히 집착했다고 한다. 김정은이 포 무기만큼은 모두 다룰 수 있을 정도의 실력과 자질을 갖추고 있다는 것 역시 이미 군 내부 알 만한 사람들은 모두 다 아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