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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 발발 당시 20대의 앳된 청년들이었던 3인의 미군 참전용사들. 그들은 이제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되어 거동조차 불편하지만 자유를 위해 싸웠던 당시를 회고하면 얼굴이 발그레해지고 목소리에도 힘이 들어간다.
한국전 발발 58주년을 앞둔 지난 23일, ‘데일리엔케이’는 참전 노병 3명과 잇따라 인터뷰를 가졌다. 올해 90세로 셋 중 최 연장자인 빈센트 메릴로(Vincent Merrillo) 씨는 2차 대전 당시 인도-버마전선에서 일본군과 싸웠던 경험이 있는 베테랑으로 한국전에 참전했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그는 워싱턴 시내의 한국전 참전기념비 앞에서 인터뷰에 응했다.
미 34사단 소속으로 한국에서 싸운 그는 인천상륙작전 이후 한창 북진하던 1950년 가을 “크리스마스까지 고향에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약속을 듣고 힘을 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중공군의 갑작스런 참전으로 전세는 뒤집혔고 수많은 동료들이 동상으로 손가락, 발가락을 잃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메릴로 씨는 남쪽으로 후퇴했다.
“후퇴하면서 특히 기억나는 전우가 있습니다. 클래런스 퍼거슨이라는 19세짜리 어린 병사였는데 통신병이었죠. 당시 적들은 아군의 통신을 차단하기 위해 우선 통신병을 저격대상으로 삼았습니다. 나는 소대장이었고 퍼거슨은 사병이었지만 난 그를 동생처럼 여기면서 종종 카드도 치는 등 친하게 지냈습니다. 그랬던 퍼거슨이 수류탄 파편에 맞아 내 곁에서 허무하게 세상을 떠나는 것을 보고 전쟁의 무서움을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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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제 25사단 35 보병연대에서 전차병으로 참전했던 잭 클로만(Jack Cloman) 예비역 하사는 전화로 만났다.
20세의 어린 나이였던 그는 교착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휴전을 앞두고 있던 1952년 11월 서부전선에 투입됐다. “우리 부대는 전선에 가까운 베가스 시티즈 전초기지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당시 휴전회담이 진행되던 판문점의 서치라이트가 눈에 보일정도로 가까운 최전방이었죠. 상관이 서치라이트를 보면서 ‘판문점의 빛’이라는 시를 짓기도 했던 기억이 나네요.”
전화 인터뷰에 응한 또 다른 참전용사 리 더스터(Lee Dauster) 예비역 미 해병대원은 현재 한국전 참전용사회 사무총장을 맡고 있다. 더스터 씨는 한국전에서 다리 하나를 잃은 상이군인이다. 1950년 12월, 일본의 히로시마에서 중공군의 참전 소식이 전해지자 급하게 최전방으로 이동한 더스터 씨의 부대는 장진호 전투에서 격전 끝에 탈출에 성공했다.
이후 남한 중부지역까지 후퇴했던 그의 부대는 이듬해인 1951년 반격에 나서 38선을 돌파하고 중공군과 대치했다. 중공군의 춘계 대공세가 시작된 지 이튿날인 4월 24일, 강원도 화천호 근방에서 그는 적군과 싸우다가 적군의 포격으로 한쪽 다리를 잃었다.
부상을 입고도 용감히 싸운 더스터 씨는 은성무공훈장을 받았지만 21세의 그는 이후 의족을 단채 평생을 살게 됐다. 그에게 있어 한국의 ‘자유’는 결코 공짜가 아니었다.
올해 90세로 셋 중 최 연장자인 빈센트 메릴로(Vincent Merrillo) 씨는 2차 대전 당시 인도-버마전선에서 일본군과 싸웠던 경험이 있는 베테랑으로 한국전에 참전했다. 고령인 그는 전화로 인터뷰했다.
세 노병은 각자 배경과 나이, 참전경험은 달랐지만 모두 참전용사회에 활발히 참여하면서 한국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간직하고 있었다. 워싱턴 시내의 무더위에도 불구하고 노구를 끌고 인터뷰를 위해 한국전 참전기념비를 찾게 된 동력은 북한의 변화와 한반도의 평화에 대한 바람이었다.
더스터 씨는 불편한 몸 때문에 전쟁 이후 한국을 방문한 경험은 없었지만 한국내 최근 상황은 소상히 알고 있었다. “주한미군의 존재가 한국의 평화에 기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한국 국민들이 있어 아쉽다”는 그는 하루빨리 김정일 정권이 핵을 포기하고 한반도에 진정한 평화가 깃들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한국의 경제발전을 “세계 10대 불가사의”라고 표현한 클로만 씨는 1993년, 40여년 만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황무지에 가까웠던 땅에 푸른 숲이 들어서고 높인 빌딩들, 넘치는 자동차와 더불어 한국전 참전 군인들을 기리는 수많은 기념탑을 보면서 ‘한국인들은 자기들이 이룬 업적을 자랑스러워할 만하다’고 느꼈다”는 소회를 전했다.
그는 “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는 이름에 걸맞는 아름다운 나라가 된 한국에 신의 가호를 빈다”며 “북한도 하루빨리 중국처럼 개혁개방에 나서 한국의 뒤를 따르길 바란다”고 충고하기도 했다.
메릴로 씨는 한국에 대해서는 애정을, 북한에 대해서는 안타까움을 표하며 “(전쟁당시 통일이 되었으면) 북한도 한국과 한 배에 탈 수 있었을 텐데…”라며 말끝을 흐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