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론: 통일을 말하는 시대에서 통일을 실천하는 시대로
최근 북한을 어떤 이름으로 부를 것인지, 남북관계를 어떤 관계로 규정할 것인지를 둘러싼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호칭과 관계 설정은 정책의 방향과 인식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가볍게 볼 사안은 아니다. 그러나 논쟁이 용어와 선언에만 집중되면 더 중요한 질문을 놓칠 수 있다.
‘우리는 통일을 위해 오늘 무엇을 하고 있는가.’
대한민국의 통일 논의는 오랫동안 거대한 담론에 머물렀다. 통일의 방식과 시기, 비용과 편익, 남북관계의 성격을 놓고 수많은 논쟁이 반복됐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책의 명칭과 우선순위도 달라졌다. 어떤 정부는 통일을, 어떤 정부는 평화를, 또 어떤 정부는 공존과 관리를 강조했다.
하지만 통일은 정책의 이름을 바꾸거나 새로운 선언을 발표한다고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다. 정상회담 한 번으로 완성되는 사건도 아니며, 어느 한 정부가 임기 안에 완수할 수 있는 사업도 아니다. 북한 주민의 인권을 기록하고, 분단으로 고통받는 사람을 기억하며, 북한이탈주민과 함께 살아가고, 미래세대가 서로를 이해하도록 가르치는 일들이 오랫동안 축적될 때 비로소 통일의 기반이 만들어진다.
따라서 통일 논의의 중심을 ‘무엇이라고 부를 것인가’에서 ‘무엇을 실천할 것인가’로 옮겨야 한다. 통일은 명사로 존재하는 목표가 아니라, 오늘 우리가 반복해야 할 동사에 가깝다.
본론: 통일을 현실로 만드는 다섯 가지 동사
첫째, 통일은 기억하는 것이다.
분단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사람과 사건에 대한 기억은 희미해진다. 북한 주민의 인권침해, 이산가족의 아픔, 국군포로와 납북자 문제는 시간이 흐른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피해 당사자가 고령화하고 증언과 자료가 사라질수록 국가의 기록 책임은 커진다.
우리 정부는 이미 북한인권기록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센터는 2016년 「북한인권법」에 따라 설립됐으며, 북한이탈주민을 대상으로 북한의 인권 상황과 구체적인 침해 사례를 조사하고 기록한다. 2017년부터 2025년까지 조사한 인원은 총 4001명이며, 기록 원본은 법령에 따라 법무부로 이관되고 있다.
문제는 기록의 축적을 넘어 그것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이다. 조사자료는 보안과 개인정보 보호가 전제돼야 하지만, 비식별화된 자료와 분석 결과는 정책 수립, 연구, 교육, 피해자 지원에 더욱 체계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북한인권기록센터를 단순한 조사기관으로 남겨둘 것이 아니라 국가 차원의 ‘북한인권 통합 아카이브’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정부와 민간단체가 보유한 기록의 기준을 정비하고, 피해 유형과 시기별 자료를 장기적으로 보존하며, 공개 가능한 자료는 국민과 연구자가 활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독일은 통일 이후 옛 동독 국가안전부인 슈타지의 기록을 폐기하지 않았다. 현재 독일 연방문서보관소 산하 슈타지기록보관소는 당사자가 자신에 관한 기록을 열람할 수 있도록 하고, 연구자·언론·시민교육기관의 과거사 규명 활동에도 법률에 따라 자료를 제공한다. 기록은 전시와 학교 교육에도 활용되고 있다. 과거를 봉인하지 않고 민주주의 교육의 자산으로 전환한 것이다.
독일의 제도를 그대로 옮길 수는 없다. 그러나 인권침해를 국가의 기억으로 남기고 다음 세대가 배우도록 해야 한다는 원칙은 참고할 수 있다. 기억을 멈추면 피해자는 다시 고립되고, 통일 이후의 책임과 화해도 출발점을 잃게 된다.
둘째, 통일은 함께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에는 현재 3만 4000여 명의 북한이탈주민이 입국해 생활하고 있다. 이들은 북한 사회를 직접 경험하고 대한민국의 제도와 문화를 함께 살아낸 사람들이다. 통일 이후를 상상하는 데 필요한 지식과 경험을 이미 몸으로 축적한 인적 자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정책의 중심은 여전히 보호, 정착, 취업, 교육 지원에 놓여있다. 이러한 지원은 반드시 필요하다. 통일부도 교육비, 직업훈련, 취업 알선, 지역 적응 교육, 전문 상담 등 다양한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이제는 지원을 넘어 참여로 전환해야 한다. 통일부와 지방자치단체의 북한이탈주민 관련 위원회에 당사자의 참여를 확대하고, 통일교육 교재 개발과 강사 양성, 북한 연구, 국제회의와 공공외교 사업에도 북한이탈주민 전문가가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특히 단순히 상징적인 위원 한두 명을 위촉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정책의 기획·집행·평가 과정에 참여하는 구조를 마련해야 한다.
예를 들어 북한이탈주민 정책을 수립할 때 당사자 자문단을 상설화하고, 세대·성별·입국 시기·직업에 따라 다양한 의견이 반영되도록 할 수 있다. 대학과 연구기관에는 북한이탈주민 연구자 양성 과정을 확대하고, 공공기관과 국제기구 진출을 위한 전문교육도 지원할 수 있다. 통일교육 프로그램도 북한이탈주민이 경험을 전달하는 수준을 넘어 남북 주민이 함께 내용을 설계하고 진행하는 방식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현재 북한이탈주민 정착지원 정책은 여러 중앙부처와 지방자치단체가 참여하는 범정부 계획으로 추진되고 있다. 2026년 정착지원 시행계획에는 38개 관계기관이 참여하고 45개 세부 과제가 포함됐다. 이러한 협업 구조에 당사자의 실질적 참여까지 결합해야 정책의 완성도가 높아질 수 있다.
통일은 북한이탈주민을 돕는 일에 그치지 않는다. 그들과 함께 대한민국의 미래를 설계하는 일이다.
셋째, 통일은 배우는 것이다.
통일 이후 가장 어려운 과제는 행정구역이나 화폐를 통합하는 일이 아닐 수 있다. 오랜 기간 서로 다른 체제와 문화를 살아온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같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일이 더 어렵다.
통일교육은 이 문제를 준비하는 첫 단계다. 현행 「통일교육 지원법」은 통일교육이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신념, 민족공동체 의식, 건전한 안보관을 바탕으로 평화적 통일에 필요한 가치관과 태도를 기르는 교육이라고 규정한다. 또한 통일교육이 개인적·당파적 목적으로 이용돼서는 안 된다는 원칙도 두고 있다. 2026년 개정법은 통일교육 기본계획을 5년마다 수립·시행하도록 제도화했다.
이 법의 취지를 교실에서 실질적으로 구현해야 한다. 북한의 행정구역이나 정치체제를 암기하는 교육만으로는 부족하다. 북한 주민의 일상과 인권, 분단의 역사, 자유민주주의의 가치, 통일 이후 발생할 수 있는 갈등과 사회통합 문제를 토론하고 경험하는 시민교육이 필요하다.
독일 연방시민교육청은 장벽 붕괴 이후 동독 지역에서 교육자료를 보급하고, 동서독 주민이 서로의 배경을 이해하도록 대화 세미나와 공동학습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동독에서 시민교육을 담당했던 교사 2500여 명에게 장기 재교육을 실시했고, 동서독 교사와 학생이 함께 참여하는 프로그램도 진행했다. 독일은 통일을 제도 변화로만 보지 않고 상호 이해와 민주주의 학습의 과제로 다룬 것이다.
우리도 학교별 일회성 강연을 넘어 토론·프로젝트 중심 교육을 확대할 수 있다. 일반 학생과 북한이탈주민 청소년이 함께 지역의 분단 유산을 조사하고, 북한 주민의 삶과 인권을 주제로 공동 발표를 하며, 통일 이후 발생할 주거·교육·복지·문화 갈등의 해결책을 설계하게 하는 방식이다. 교사에게는 북한과 통일을 균형 있게 가르칠 수 있는 장기 연수와 검증된 수업자료를 제공해야 한다.
통일교육의 성과도 강의 횟수나 참여 인원으로만 측정해서는 안 된다. 북한과 북한 주민에 대한 이해가 높아졌는지, 편견이 줄었는지, 평화적 갈등 해결과 공동체 책임에 대한 태도가 변화했는지를 평가해야 한다. 통일은 정답을 외우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갈 방법을 배우는 일이다.

넷째, 통일은 연결하는 것이다.
남북관계가 경색될 때 가장 먼저 중단되는 것이 교류다. 정부 간 대화가 막히면 민간의 문화·학술·인도주의 협력도 함께 위축된다. 그러나 모든 연결을 정치 상황에 종속시키면 관계가 회복될 때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현행 「남북관계 발전에 관한 법률」은 정부가 국민참여 사업, 지역별 기반 조성, 통계의 수집·분석, 인도적 문제 해결과 인권개선 활동을 하는 비영리단체 지원 등을 추진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지방자치단체와 비영리단체의 사업비를 지원할 수 있는 법적 근거도 마련돼 있다.
따라서 남북 간 직접 교류가 어려운 시기에도 지속할 수 있는 국내 기반 사업을 제도화해야 한다. 북한 관련 기록·연구, 이산가족 구술자료 수집, 북한 음식과 지역문화 보존, 북한이탈주민과 일반 주민의 공동 봉사활동, 청소년 사회통합 프로그램 등은 대북제재나 남북관계 상황과 별개로 추진할 수 있다.
현재 많은 사업이 단년도 공모 방식으로 운영되면서 담당자와 예산이 바뀔 때마다 중단될 위험이 있다. 일정한 평가를 통과한 사업은 3년 이상 지원하는 다년도 협약 방식으로 전환하고, 성과가 검증된 프로그램은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공동으로 확산할 필요가 있다. 지역통일교육센터, 대학, 시민단체, 북한이탈주민 단체가 함께 참여하는 지역 단위 협력체계도 구축할 수 있다.
정부가 직접 모든 사업을 운영할 필요는 없다. 정부는 원칙과 기준, 안정적인 재원을 마련하고 민간은 현장성과 창의성을 발휘해야 한다. 정치적 상황이 변하더라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결망이 남아 있다면 남북관계가 다시 열릴 때 훨씬 빠르게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
다섯째, 통일은 이어가는 것이다.
통일정책의 가장 큰 약점 중 하나는 지속성 부족이다. 새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이전 정책을 부정하고 새로운 명칭과 구상을 내놓는 일이 반복되면, 국민은 통일을 국가의 장기 전략이 아니라 정권의 정치사업으로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에게 장기 계획을 위한 제도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남북관계 발전에 관한 법률」은 정부가 남북관계발전기본계획을 5년마다 수립하도록 하고, 남북관계발전위원회와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치도록 규정한다. 예산이 수반되는 기본계획은 국회의 동의를 받게 돼 있다.
필요한 것은 제도를 새로 만드는 것보다 기존 제도의 실효성을 높이는 일이다. 기본계획을 정부의 정책 목록으로 끝내지 말고 여야, 전문가, 시민사회, 북한이탈주민이 참여하는 공개 협의 과정을 거쳐 수립해야 한다. 북한인권 기록, 이산가족과 납북자 문제, 통일교육, 북한이탈주민 사회통합처럼 정권과 관계없이 지속해야 할 분야는 국가의 공통 과제로 명확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기본계획에 측정 가능한 장기 목표도 담아야 한다. 예를 들어 북한인권 기록의 축적과 공개 범위, 이산가족 자료의 전산화율, 통일교육 교사 연수 규모, 북한이탈주민의 정책 참여 수준, 지속사업으로 전환된 민간 프로그램 수 등을 정하고 매년 공개 평가하는 방식이다.
국회도 정부 정책을 비판하는 데 그치지 말고, 초당적 합의가 가능한 최소 원칙을 만들어야 한다. 어떤 정부가 들어서더라도 북한 주민의 인권을 보호하고, 분단 피해자의 문제를 해결하며, 통일교육과 사회통합을 준비한다는 원칙만큼은 이어져야 한다.
통일은 한 정부가 시작하고 다음 정부가 지우는 사업이 아니다. 세대와 정권을 넘어 축적해야 하는 국가의 장기 과제다.
결론: 오늘의 동사가 내일의 통일을 만든다
북한을 어떻게 부를 것인지, 남북관계를 어떤 개념으로 규정할 것인지를 둘러싼 논쟁은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다. 정책의 언어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호칭이 바뀐다고 북한 주민의 삶이 곧바로 달라지는 것은 아니며, 선언을 바꾼다고 통일의 기반이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통일은 기억하는 것이다. 북한 주민과 분단 피해자의 기록을 남기는 일이다. 통일은 함께하는 것이다. 북한이탈주민을 정책의 대상이 아니라 공동체의 주체로 세우는 일이다. 통일은 배우는 것이다. 서로 다른 삶과 체제를 이해하고 함께 살아갈 시민의 태도를 준비하는 일이다.
통일은 연결하는 것이다. 정치 상황이 어려울 때에도 사람과 지식, 경험의 연결망을 지키는 일이다. 통일은 이어가는 것이다. 정권이 바뀌더라도 국가가 지켜야 할 원칙과 정책을 다음 세대로 넘기는 일이다.
이러한 실천은 화려하지 않다. 단기간에 눈에 띄는 성과를 내기도 어렵다. 그러나 통일은 원래 한 번의 선언으로 완성되는 일이 아니다. 기록과 교육, 참여와 연결, 정책의 축적이 오랫동안 이어질 때 어느 순간 통일을 감당할 수 있는 사회가 만들어진다. 통일은 먼 미래에 갑자기 도착하는 선물이 아니다. 오늘 우리가 선택하고 지속하는 행동이 내일의 통일을 결정한다. 그래서 통일은 선언이 아니라 실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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