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물에 갇힌 인권] “첩자짓 폭로하겠다”며 협박하고 성폭행

<편집자주>
데일리NK는 중국, 러시아 등 해외에 파견된 북한 노동자들의 인권 실태를 조사하고, 이를 보도하고자 합니다. 현재 북한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제재에도 불구하고 노동자 파견을 통해 외화를 벌어들이는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또 앞으로 이를 더 강화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데일리NK는 북한 당국의 외화벌이 수단이 된 주민들이 해외에서 정치적, 경제적으로 억압된 채 인권을 유린 당하는 사례들을 수집·취재해 국제사회에 전함으로써 그들의 인권이 개선되고 상황이 변화되는 데 조금이나마 이바지하고자 합니다.
2023년 9월 중국 랴오닝성의 한 대형 마트에서 포착된 북한 여성들. /사진=데일리NK

북한이 ‘군중신고법’을 제정한 이후 해외 파견 노동자들을 대상으로도 타인의 비법(불법) 행위 신고를 장려하고 나섰지만, 신고자 보호 체계 미흡과 더불어 관리자가 신고를 악용하는 이유 등으로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데일리NK는 중국 내 수산물 가공공장을 면밀히 취재하는 과정에서 공장 내 신고함과 대사관 등 상부와 직통으로 연결할 수 있는 전화 등이 마련돼 있으나 노동자들이 접근하기 쉽지 않은 환경에 놓여 있다는 점을 파악했다.

수산물 가공공장 사정에 밝은 중국의 대북 소식통은 25일 데일리NK에 “지난해 11월 중순 지린(吉林)성의 한 수산물 가공공장에서는 신고했다가 오히려 관리자에게 성폭행을 당하는 일이 발생했다”면서 “신고를 접수한 간부가 이 여성 노동자를 불러 ‘네가 프락치(첩자)라는 걸 동무들에게 다 말해도 좋냐’라고 협박했다”고 말했다.

소식통에 따르면, 이후 이 노동자는 간부에 의해 ‘정신병 환자’가 됐고, 결국 강제 귀국 조치를 당했다는 후문이다. 또한 관련 사실이 공장 내부에 퍼지기 시작했고,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상부에서는 뭐라도 써서 내라고 하니 어쩔 수 없이 신고했을 텐데, 결국 이렇게 됐다”는 동정 여론이 형성됐다고 한다.

소식통은 “관리자에 의해 내부 첩자가 된 노동자는 언제든지 이런 겁박을 받게 될 수밖에 없는 구조”라면서 “신고 해도 힘들고, 안 해도 힘드니 너무 불안해서 이러다 정신 나가겠다고 토로하는 여성 근로자들이 상당히 많다”고 현지 분위기를 전했다.

이런 가운데 북한이 군중신고법을 통해 내부 통제를 강화하려는 시도는 여러 문제를 안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신고자에 대한 보호 체계가 미흡하고, 보복과 악용이 구조적으로 가능한 성격을 띠고 있으며, 이는 신고자를 대상으로 한 심각한 인권 침해로 이어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황현욱 데일리NK AND센터 책임연구원은 “본래 신고 체계는 정의 실현과 공익 보호를 목적으로 해야 하지만, 북한의 군중신고법은 체제 유지를 위한 감시와 억압의 도구로 작용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신고자 보호 체계 미흡…北 당국은 반동사상 접촉 등 사례 수집에만 골몰

특히 신고자에게 상품이나 특별 휴가를 주는 포상 제도는 신고자의 신원 노출을 부추기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소식통은 “올해부터 신고자 보호 체계를 강화하겠다는 교육이 이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불안감을 느껴 신고를 주저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실제로 작년 말 랴오닝성 단둥(丹東)에서는 한 노동자가 다른 동료의 비리를 신고한 이후 대사관에서 파견 나온 관리 담당 보위원이 따로 불러내기도 하고, 심지어 어느 순간 돌연 사라졌다고 한다.

소식통은 “다시 동무들이 있는 작업장으로 돌아와서 얼굴 들고 활동할 수 있었겠나”라면서 “얼마 후에 조선(북한)으로 귀환했을 것으로 보이지만, ‘사람잡이’가 됐다는 자책감에 힘들어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노동자들은 신고 시 관계 악화와 보복 가능성에 대한 우려로 상당한 부담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소식통은 “외부와 통화하고, 필수품을 부탁해서 받는 노동자를 보고도 신고를 꺼리는 경우도 있다”면서 “이는 신고에 대한 부담과 긴장감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보다 중요한 건 그 동무와의 관계 악화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노동자들도 언젠가는 조국으로 돌아가서 다시 (다른 사람들) 얼굴 보면서 살아야 하니 그 누구라도 원쑤(원수)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2019년 6월, 중국 단둥의 한 상점으로 들어가고 있는 북한 노동자들. /사진=데일리NK

황 연구원은 “북한의 군중신고법은 체제 안정을 명목으로 개인의 기본권을 침해하고, 사회적 신뢰를 무너뜨리는 통제 수단으로 작용하고 있다”면서 “신고 항목의 범위가 지나치게 광범위하고, 신원 보호나 기밀 유지 장치가 결여돼 신고자와 피신고자 모두를 인권 침해의 위험에 노출시키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러한 법적 구조는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ICCPR)에서 보장하는 자유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며, 국제노동기구(ILO) 협약에서 강조하는 ‘강제적인 조건하에서 일할 수 없다’는 원칙에도 반하는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특히 신고를 강제하거나 이를 악용하는 체계는 노동자들에게 심리적 압박과 불안을 조성해 안전하고 공정한 노동 환경을 훼손하고, 국제사회가 요구하는 노동기준과도 괴리돼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하지만 북한 당국은 신원 보장이나 기밀 유지에 더 힘쓰기보다 사례 수집에만 골몰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소식통은 “최근엔 당장 내일, 모레 귀국하는 대상들에게 신고 내용을 많이 써내게 하고 있다”면서 “다른 노동자들의 비리를 폭로하면 비(중국 위안화)나 중고 옷을 많이 주겠다는 사탕발림도 서슴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그런가 하면 그는 “관리자들이 신고자임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일도 종종 있었다”며 “노동자들이 말하지 않아도 상부에서는 다 알고 있다는 식으로 압박감을 주면서 신고를 유도하려는 전략”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2022년 북한이 군중신고법을 개정하면서 ‘반동사상 문화의 유입’을 신고 항목으로 추가한 이후 이와 관련된 신고를 더욱 독려한 것으로 전해졌다. (▶관련 기사 바로보기: 개정 北 군중신고법 입수…’최고지도부 신변 위협’ 신고 최우선)

이와 관련해 소식통은 “최근 들어서는 작업 태만을 기본으로 규정 외 외출, 불법 통화, 인터넷 접촉, 사상적 동향, 수상한 발언, 불만 등이 주로 신고 대상이 되고 있다”면서 “이렇다 보니 서로가 서로를 의식하면서 분위기가 경직되고 있는 상황”이라고 현지 분위기를 전했다.

데일리NK 기획취재팀=이상용 기자(AND센터 디렉터), 황현욱 AND센터 책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