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20년, 전 세계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의 공포에 휩싸여 있을 당시 러시아 나호드까(나홋카) 지방 북한 건설회사 소속 노동자 A씨는 탈출을 감행했다. 더 나은 삶을 찾아 건설 현장을 떠나 러시아의 깊은 곳으로 숨어들었지만, 코로나는 그의 희망과 기대를 처참히 무너뜨렸다.
코로나로 인해 러시아 건설 청부업 일거리가 대부분 중단되면서 나홋카 현지의 북한 노동자들은 점점 돈벌이가 어려워졌고, 이로 인해 생활이 점차 악화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모국인 북한은 국경을 봉쇄하는 극단적인 정책으로 해외 파견 노동자들의 본국 소환을 잠정 중단해 나홋카 현지의 북한 노동자들은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에서 생활난에 그대로 맞닥뜨렸다.
나홋카에서 처참한 현실을 마주한 A씨는 불확실한 미래에서 벗어나고자 탈출을 결심한 것이었다. 탈출 이후 무작정 유엔에 망명을 신청한 그는 한국으로의 입국을 꿈꿨다. 그러나 북한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할 서류가 없다(북한은 탈북 방지를 위해 노동자들이 여권을 소지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는 이유로 망명 요청은 거부됐고, 그는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차디찬 러시아의 거리로 내몰렸다.
불법 체류자 신분으로 전락한 그는 몸 뉠 곳조차 찾기 어려웠다. 코로나 증세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격리 시설이나 보호소에도 갈 수 없었다. 그는 러시아 경찰에 붙잡히지 않기 위해 우즈베키스탄이나 카자흐스탄 노동자들 속에 숨어들었고, 튀지 않으려 얼굴에 검댕이 칠을 하고 수염을 길렀다.
A씨는 마트 앞 쓰레기통에 버려진 유통기한 지난 식품으로 끼니를 해결하고 버려진 옷을 주워 입는 비위생적인 생활을 이어가며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이따금 외국인 건설장에서 일당을 받고 일을 하기도 했는데, 그렇게 번 돈으로는 약을 구해 먹으며 살아남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A씨의 몸 상태는 점점 더 나빠졌다. 몸이 힘드니 나가서 일을 할 수 없어 약을 사 먹을 돈도 없었고, 불법 체류자라 제대로 된 의료 서비스를 받을 길도 없었다.
러시아의 차갑고 외로운 거리는 그의 몸과 마음을 모두 삼켰다. 그리고 그해 겨울이 다가오면서 그의 숨소리는 희미해져 갔다. A씨는 그렇게 러시아의 차디찬 거리 한구석에서 숨을 거뒀다. 한국에 가 새 삶을 살고자 했던 그의 작은 희망은 그렇게 흩날려졌다. 망명 신청이 받아들여졌다면 지금껏 그는 살아있었을까?
국가는 물론 국제사회의 그 어떤 보호도 받지 못하고 숨을 거둔 A씨의 이야기는 러시아 내 북한 건설 현장을 탈출해 불법 체류자 신분으로 숨어 지내고 있는 탈북 노동자들의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들은 지금도 살아남을 권리, 인간다운 삶을 누릴 권리를 위협받고 있다.
탈북 노동자들에게 관심을 갖고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필요한 지원을 제공할 때가 바로 지금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