숱한 탈북민 밀고해 표창까지 받은 보위부 女스파이의 운명은?

[북한 비화] 김정은 집권 초기 내건 국가보위성 탈북 제로(0) 목표에 청춘·일생 바치다 희생

중국 지린(吉林)성 투먼(圖們)에서 바라본 북한. /사진=데일리NK

2012년 11월 초, 북한 국가보위성은 김정은 집권 역사에서 월경·월남자가 더는 없게 하겠다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제시했다. 이에 국경 연선 보위국 반탐부서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불법 월경과 한국행을 막아 탈북 ‘제로’(0)를 만드는 것을 최대 목표로 삼았다.

실제 국가보위성은 국경 연선 보위국에 새로운 스파이(정보원) 침투 방법을 모색해 중국 내 탈북민뿐만 아니라 한국에 정착한 탈북민들까지 관리할 수 있는 체계를 세우라는 임무를 하달했다. 이에 양강도 보위국 반탐부는 산하 시·군 보위부 반탐과들에 탈북민들을 관리·보고할 수 있는 정보원을 물색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국가보위성의 분기별, 연간 사업총화에서 스파이 침투 사업 실적을 꼬박꼬박 보고해야 했던 양강도 보위국은 큰 압박을 받았다. 정보원을 새로 준비시켜 중국에 파견하기도 어려운 일이었고, 중국 내 탈북민을 정보원으로 흡수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 과제였다.

도 보위국은 불법으로 국경을 넘어 중국에서 사는 탈북민의 90%가 여성인 조건을 이용했다. 그들은 한족 또는 조선족에게 시집가면 되는 여성이 중국 사회에 발붙이기 유리하다고 보고 여성 정보원들을 물색했다.

그러나 중국에 갈 생각도 없는 일반 여성들을 정보원으로 준비시켜 무작정 중국 남성에게 시집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국가 보위 사업을 담당하고 있는 보위기관이 인신매매 브로커들에게 대놓고 자국 여성들을 중국에 팔아넘기는 것도 국가적 망신이 아닐 수 없었다.

이에 도 보위국은 당시 도내 구류장, 대기실, 집결소에 구금돼 있던 북송 탈북민들의 신상정보를 들여다보고 국가와 조직에 충실할 수 있는 가정환경이나 토대를 가졌거나 조금만 교양하면 정보원으로 활동할 수 있겠다고 판단한 여성 20여 명의 명단을 추렸다.

명단에 오른 여성들은 보위부 특별관리대상으로 즉시 구금시설에서 벗어나 1년간 도내 초대소들에서 각각 일대일 강습, 훈련을 받았다. 도 보위국은 이들에게 ‘보이지 않는 계급 전선의 제1 참호인 중국에서 국경을 오가며 맹활약할 정보원으로 준비돼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 여성들은 사람들의 동향과 사상을 파악할 수 있는 대화법, 상부와의 연계 방법, 중국 내 탈북민의 한국행 시도 움직임 감시·관리·보고체계 이론 학습과 지역별 중국어 교육 등을 받아 통과 시험을 치렀다.

여기에서 가장 우수한 성적을 거둔 김혜성(가명)은 보위부 정보원으로 임무를 받아 자발적 인신매매로 장백(長白, 창바이)에 있는 중국 남성의 집에 위장 잠입했다. 이후 8년간 그는 중국에서 보위부 정보원으로 활동하며 중국 내 탈북민들을 감시·관리했다.

김 씨가 직접 보위부와 협력해 유인·납치한 탈북민은 2019년 반년간만 40명으로 알려졌는데, 이런 실적으로 그는 최고의 정보원으로 평가받아 국기훈장 3급과 보위부 표창까지 받았다.

그는 순수 탈북민으로 위장해 모바일 메신저 앱 ‘위챗(WeChat)’이나 안면을 튼 탈북민들을 통해 인맥을 쌓아가면서 해당 지역 탈북민들의 개별 인적 사항과 동향을 보위부에 보고했다. 그러면서 한국행을 시도하거나 한국에 있는 이들과 지속 연락하는 탈북민들을 밀고했고, 지시에 따라 여성들을 유인해 보위부의 납치를 돕기도 했다.

그래픽=데일리NK

그렇게 한 지역에서 임무를 다하면 그는 그 마을에서 감쪽같이 사라져 다른 지역으로 몸을 옮겨 또 다른 중국인 남성과 동거하며 지속해서 정보원 임무를 수행했다. 그렇게 김 씨는 지린(吉林)성, 랴오닝(遼寧)성, 헤이룽장(黑龍江)성, 내몽고를 종횡무진으로 활동했다. 그중에서도 그가 주로 골라 다닌 곳은 탈북민 여성들이 비교적 많은 마을이었다.

8년간 다섯 차례 지역을 옮겨 각기 다른 중국인 남성들과 살았던 김 씨는 마지막엔 아예 한 곳에 눌러앉았다. 그는 ‘전민K가(全民K歌)’ ‘틱톡(TikTok)’ 등의 앱을 통해 중국 내 탈북민 여성들과 온라인으로 대화를 나누며 “이렇게 공민권 없이 살아서 무엇 하냐” “남조선(남한)에 가면 좋겠는데 아는 선이나 사람이 있으면 소개해달라”면서 접근해 보위부에 밀고했다.

자신의 청춘과 일생을 바쳐 탈북민 체포에 일조한 김 씨는 2020년 1월 건강 악화로 상급의 소환지시에 따라 자진 북송을 가장해 북한으로 돌아갔다. 최고의 정보원으로 활동하다 귀국한 그의 최후는 어떻게 됐을까?

귀국 후 그는 도 보위국 산하 비밀 장소에서 치료를 받았다. 그러다 그해 말 보위국은 비밀사업 정보를 너무 많이 알고 있는 김 씨를 사회와 철저히 분리하기 위해 그를 정신질환자로 몰아 양덕, 맹산 심심산골에 자리 잡은 49호 병원(정신병원)에 이송했다. 성과를 내고 표창을 받은 대상이라 관리소(정치범수용소)에 보내지는 못하니 대신 정신병원에 가둔 것이다.

“사회에 내보내달라” “가족과 살게 해달라” “당신들을 위해 나라를 위해 내가 얼마나 공을 세웠냐”는 것이 김 씨가 정신병원에 갇히면서 내지른 절규다.

알 만한 보위원들은 “똑똑한 애인데 안타깝게 됐다”고 말할 뿐이었고, 그의 밀고로 북송돼 관리소에 수감된 탈북민의 가족들은 “남잡이가 제잡이가 됐다” “벌을 받은 것”이라며 손가락질했다.

김정은 집권 초기 탈북 제로(0) 목표를 내건 국가보위성은 10년 세월이 흐른 지금도 이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김 씨 같은 정보원들의 청춘과 일생을 빼앗고 그들을 희생물로 만들면서까지 탈북을 원천 차단하려 했다. 하지만 정보원으로 조국에 충성을 다한 김 씨도 책임지지 못했고, 지금껏 북한을 탈출하려는 주민들의 행렬도 막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