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께 보내는 림일의 편지] <41> 꽃제비가 국회의원 된 건 알고 있나요

남북분단의 특성상 대한민국에서 탈북민 국회의원은 3만 탈북민과 2천만 북한 주민을 대표하는 존재입니다. 김정은 독재정권이 전체 인민들의 자유투표로 출범한 진정한 민주주의 정부가 아닌 이상 말이죠. 왼쪽은 탈북민 지성호 국회의원. /사진=림일 작가 제공  

김정은 위원장! 혹시 일상서 보통 인민들이 널리 사용하는 은어 중 ‘꽃제비’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나요. 모름지기 당신은 금시초문일 것이며 ‘꽃제비’는 유랑(유리)걸식하는 가출 어린이, 소년·소녀들을 지칭하는 표현입니다. 사상 최악의 경제난 시기인 1990년대 ‘고난의 행군’ 때 생겼으며 지금도 흔히 사용되고 있지요.

1994년 7월 당신의 조부(김일성)가 사망했는데 시신궁전, 영생탑 관리 등에 나랏돈 수억 달러를 사용했답니다. 그 결과 평양에서는 이듬해 4월부터, 지방에서는 그보다 1~2년 앞서 인민들 식량배급이 중단되는 비극을 맞았답니다.

오늘날 공화국 경제 파국의 원인을 더 깊이 보면 1970년대 부친(김정일)이 장본인이죠. 자처해서 수령의 후계자가 된 그는 인민의 피땀인 나랏돈 절반으로 방방곡곡에 수령사상 연구실(수령홍보 기념관), 동상, 사적지 등을 세웠지요.

노동당의 강력한 통제로 남조선과 외국의 방송이나 출판물을 접할 수 없는 인민들입니다. 항상 당에서 “오늘 인민들 생활이 어려운 것은 모두 미국과 남조선 때문이다”는 황당한 소리를 곧이 들을 수밖에 없는 ‘특등 미물’ 입니다.

고난의 행군시기 인민들은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장마당(시장)으로 나왔지요. 하찮은 물건과 노동력을 팔아 입에 풀칠을 하며 살았는데 이때 ‘꽃제비’가 장마당에 대거 등장했습니다. 전국의 수천, 수만 명의 그들은 버스정류장, 음식점, 역전 등 공공장소에서 어른들에게 음식을 빌어먹거나 때로는 훔치기도 하면서 연명했지요.

김정은 위원장! 내가 하는 이 소리가 어쩌면 당신에게는 딴 나라 얘기로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혹독한 시련의 1990년대, 당신은 세상과 인민들 몰래 수령아들 신분으로 유럽의 스위스에서 호화스러운 유학생활을 했으니 말입니다.

또 이것은 압니까. 자유와 빵(식량)을 찾아 여기 대한민국으로 목숨 걸고 내려오던 탈북민이 ‘고난의 행군’ 시기부터 그 숫자가 무려 50~100배로 늘어난 것 말입니다. 당시 수천 명이던 탈북민이 현재는 3만 5천명으로 증가했지요.

그 용감한 탈북민들 가운데 꽃제비 출신 장애자(장애인) 청년이 있습니다. 탄광노동자의 가정에서 태어난 1982년생으로 고등학생 시절인 14살 때 생계를 위한 석탄 화물열차에서 잘못 내려져 왼쪽 팔과 다리가 절단된 ‘불구’입니다.

장마당에서 꽃제비 생활을 하던 그는 2006년 4월 탈북하여 2주간 라오스, 미얀마, 태국의 1만km를 지팡이를 짚고 걸어 7월 한국에 왔습니다. 대학 공부를 했고 청년학생들로 조직된 인권단체를 결성하여 왕성한 사회활동을 하였죠. 장애의 몸을 이끌고 미국, 유럽 등 세계를 다니며 인류최악의 북한인권 실태를 설파했지요.

김정은 위원장! 당신이 겨우 해외에서 두 번 만났던 미국 대통령을 이 청년은 무려 세 번이나 그것도 워싱턴 백악관에서 만났습니다. 자신의 평생소원이 북한인권이고 독재자의 만행을 세계에 고발하는 것이라는 멋진 청년입니다.

꼭 1년 전 오늘, 그 청년은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국민의 선택을 받아 영광스럽게도 제21대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함경북도 회령이 고향인 꽃제비 출신 지성호 국회의원입니다. 대한민국이 이렇게 멋진 나라입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이 땅을 ‘어머니조국’ 이라 부르며 목숨 바쳐 지키고 빛내어갈 것입니다.

2021년 4월 15일 – 탈북민 지성호 국회의원 탄생 1주년에 즈음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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