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언론 기사 중에 유독 필자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기사가 하나 있었다. 바로 해외에서 일하던 북한노동자가 국내에 입국했다는 기사다(데일리NK, 4월 1일, “북한 해외 건설 노동자 11명 국내 입국… “조국에 환멸 느꼈다”).
필자는 지난 2019년 12월 <러시아에서 분단을 만났습니다 : 충성의 외화벌이라 불리는 북한 사람들>이라는 제목의 책을 발간했다.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 파견된 북한 노동자를 현지에서 직접 심층 인터뷰한 내용이다. 그들이 타국에서 어떻게 생활하는지, 당과 조국을 위한 충성자금은 어떤 건지, 어느 현장에서 일했는지 등을 책에 담았다.
러시아 연해주 그들이 일하는 곳을 찾기 위해 부단히도 걷고 달렸던 기억이 난다. 길에서 스쳐 간 그들의 흔적 하나까지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저마다의 사연들은 시린 눈물을 닦아 낼 만큼 여리고 아픈 흔적들이었다. 그들과의 만남이 여러 번 이어질수록 아려오는 마음들을 담대히 마주할 수 없었다.
‘충성의 외화벌이’라 불리는 그들의 삶은 한마디로 비참했다. 영하 40도의 혹한에 바다도 얼려 버릴 정도의 추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건설현장에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밤늦도록 작업장의 불빛은 꺼지지 않았다. 뼛속을 에이는 시베리아 벌판의 매서운 칼바람에도 그들의 망치질은 계속되었다. 평양에 두고 온 가족의 얼굴을 보지 못한지 여러 해가 지났다. 지갑 속 깊숙이 넣어 둔 사진 한 장으로 가족의 얼굴을 잊지 않으려 애쓰는 그들이었다.
온갖 멸시와 차별을 견딘 채 고된 노동으로 번 돈은 ‘계획분’이라는 이름으로 바쳐야 했다. 4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어느 노동자의 손에 쥐어진 건 고작 50달러였다. 세상 어디에 ‘당과 조국을 위한 충성자금’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삶을 강요당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 결의 2397호’는 2019년 12월 22일까지 전 세계 모든 해외 파견 북한노동자들을 본국으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규정했다. 그 시기는 지켜지지 않았고 귀국이 진행되는 중에 중국에서 시작된 전염병이 전 세계를 덮쳤다. 그리고 그들은 여전히 오도 가도 못 하는 신세가 되었다.
필자가 현지에서 만난 북한 노동자 중에서 유독 기억에 남는 이가 있다. 약 7개월 동안 여섯 번의 만남과 한 번의 영원한 헤어짐을 가진 바로 ‘리선생’이라 불렀던 사람이다. 러시아에 파견된 북한 노동자를 만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에 첫발을 디딘 순간 가장 처음으로 알게 된 이가 바로 그였다. 그와의 두 번째 만남에 형님과 아우 사이가 되었고 남한 사람을 만났다는 이유로 혹여나 그가 안 좋은 일을 당할까 싶어 이름조차 묻지 않았다. 형님과 아우 사이가 되었지만 분명 분단의 사람들이었기에 누군가에게는 환영받지 못할 인연이었다.
그와의 마지막 만남은 너무도 여린 기억으로 남았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가족이 있는 북한으로 귀향해야 할지, 아니면 가족을 버리고서라도 탈북해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할지 번뇌하던 그의 표정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결국 그와의 만남은 거기까지였다. 그가 러시아에 현재 남아 있는지 아니면 북한으로 돌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가 필자에게 남긴 말은 “조국에 돌아가면 제대로 살 수 있을 것 같지 않아”라는 자포자기였다.
필자가 전해준 남한 영상물을 수시로 보며 이미 외부세계를 경험한 그였다. 자유와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절실히 경험한 그였기에 북한으로 돌아가서 살 자신이 없다고 말하는 그의 표정에는 슬픔이 묻어났다. 그와 나눈 마지막 대화다.
“형님, 무슨 생각하세요?”
“그냥 가족하고 살게만 해 줘도 얼마나 좋아… 조국에 가면 어케 살아야 할지…”
그리고 그는 한 통의 문자메시지를 마지막으로 보내고 영원한 헤어짐을 고했다. “강 선생, 나 26일 집에 가요.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안녕!”
*이 글은 <러시아에서 분단을 만났습니다 : ‘충성의 외화벌이’라 불리는 북한 사람들>의 일부를 수정한 것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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