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고한 희생 언제까지?…김씨 일가 ‘자력 원유 시추’ 야망의 민낯

[북한 비화] 30여명 사망사고에 김일성 때 중단...김정은 “유훈 관철에 희생 불가피” 재개 지시

평양 만수대 언덕의 김일성·김정일 동상에 북한 주민들이 참배하고 있는 모습. /사진=노동신문 캡처

“우리나라(북한)에서 원유(原油)개발에 성공한다면 인민경제 발전에 획기적인 사변이 되겠지만, 내 자식 같은 군인 한 명, 한 명의 생명이 더 소중하기에 시추(試錐) 사업을 당장 중지하시오.”

1970년대 후반 초여름 어느 날, 김일성은 12월5일 청년광산(평안북도 룡천군 진흥구)에 주둔해 원유 시추를 하던 당시 조선인민경비대에 이런 내용의 친필 방침을 내렸다.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22일 데일리NK 내부 소식통에 따르면, 김일성은 중국으로부터 이 지역에서 원유 추출 가능성이 있다는 말을 듣고 즉시 수직갱을 뚫어 무조건 원유를 찾아낼 데 대한 방침을 하달했다.

이에 따라 조선인민경비대 1개 기술대대 인원들이 차출됐고, 명령에 따라 어디론가 끌려가야만 했다.

이렇게 12월5일 청년광산에서 이들은 김일성 교시 관철을 위해 주야로 수직갱을 뚫고 등짐 마대로 흙을 퍼 올리는 작업에 내몰렸다. 그러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안전사고가 터졌다. 뜻하지 않는 수직갱 붕락 사고로 1개 소대 30여 명의 인원이 그대로 생매장당했던 것이다.

사고 소식을 보고받은 김일성은 가슴이 아프다면서 시추 중지를 지시했다. 다만 이 사업 자체에 대해 ‘절대 비밀에 부치라’라는 말도 곁들였다. 결국 희생된 군인 가족들은 ‘전사증’ 한 장만 달랑 받았고, 자식들이 어디에 묻혔는지도 모른 채 살아가야 했다.

그러다 2000년대 초반 김정일은 김일성의 유훈(遺訓) 교시 관철이라는 명목을 내세워 다시 12월5일 청년광산 원유 시추 사업을 들고나왔다.

당시 김정일은 이 사업을 군부대에 맡기지 않고 평안남도 원유시추개발회사 전문인력들을 동원하라고 했고, 사업 중단 지시에 조개잡이, 바다 밀수 등으로 살아가던 노동자들이 강제 투입되기에 이른다.

이후 상황은 급격히 전개된다. 다시 수직갱을 뚫으며 1970년대 붕락된 흙을 파헤치던 중 당시 생매장당한 군인들의 해골과 함께 돌소금이 피어있는 것까지 확인했다고 한다.

다만 이러한 보고에 중앙은 군인들 해골 문제는 뒷전(화장(火葬) 처리)이고 돌소금층 문제에 집중했다. 그 아래층은 바로 천연가스, 또 아래가 원유층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특히 김정일도 원유 개발에 주력해야 한다고 재차 지시했다.

그러나 문제는 ‘기술 부족’이었다. 시추를 진행하던 중 기술자들은 ‘중국의 도움 없이 더는 수직갱 원유 시추가 어렵다’는 판단에 따라 이 같은 보고서를 중앙에 올렸다.

이에 김정일은 ‘나라의 핵심’을 넘길 수는 없었다. 바로 “자력갱생, 간고분투해서라도 우리 힘으로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현장 기술진과 노동자들은 그야말로 손맥이 풀렸다. 심지어 평안남도 원유시축개발회사 총책임자였던 조 모(50대) 씨가 병으로 사의를 표명했고, 결국 이 사업은 지지부진해졌다.

그렇다고 김정일은 포기할 수 없었다. 2010년 6월 19일, 이 광산을 현지지도하면서 노동자들에게 ‘우리나라에서 원유만 터지면 인민들이 잘 살 수 있다, 동무들이 지닌 임무가 막중하다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게 유훈으로 남은 셈이다.

이제는 공이 김정은에게 넘어간 것일까. 2016년 10월 어느 날, 김정은은 선대(김일성, 김정일) 유훈 교시를 끝까지 관철해야 한다면서 재차 12월5일 청년광산 원유 재시추 지시를 하달했다. “우리의 자력갱생 정신력이면 못 해낼 일이 없다”는 강조도 빼놓지 않았다.

그러나 조상대대로 이 고장에 살아온 본토배기 주민들은 1970년대부터 이어온 원유 시추 사업이 기술자, 노동자, 군인들의 정신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낙후한 북한의 탐색 기술이라는 점을 알고 모두 주저했다.

그로부터 약 5년. 이달 중순부터 돌연 연유개발국 소속 6·18기술자돌격대가 이 지역에 투입됐다고 한다. 바로 김정은 지시로 원유 시추 사업이 재차 닻을 올린 것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김정은은 “선대 수령들의 유훈 교시 관철에서 희생은 불가피한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어떠한 사망 사고에도 끝까지 밀고 나갈 방침을 강조한 셈이다.

이에 자연스럽게 “수령님(김일성), 장군님(김정일) 때 안된 원유 시추가 원수님(김정은) 시대라고 뾰족한 수가 있겠나” “또 무고한 백성들만 생 떼죽음당하게 됐다”는 주민들의 안타까운 목소리가 들리고 있다고 소식통은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