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어제와 오늘] 6·25 발발前 굶주리는 北인민 살렸던 ‘영웅’

북한 역사에 대한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게오르기 표도로프’라는 이름은 잘 모를 것이다. 하지만 그는 1945년 북조선에서 복무했던 소련군 장교였고, 붉은 군대의 용감한 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

또한 그와 전우 유리 립시츠가 한 행동은 북한 역사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고, 수 많은 사람을 구했다. 본 칼럼에서 이를 독자들에게 소개하고자 한다.

표도로프 가문의 역사는 게오르기 표도로프의 할아버지로부터 시작한다. 레프 표도로프는 아마도 가문 중 첫 번째 군사 복무자였던 것 같다. 러시아제국 군대에 병사로 지원한 그는 23년 동안 복무한 후 장교까지 진급하였다.

레프 표도로프의 아들 알렉산드르 표도로프도 아버지를 따라 군인이 되었다. 그는 성공한 사람이었다. 1성 장군까지 진급한 알렉산드르 표도로프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위치한 진지(陣地) 사령관으로 복무하기도 했었다. 이 시대 ‘극동’과 연결점이 생겼다고 할 수 있다.

1908년 12월 16일 출생한 게오르기 표도르프는 바로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17년의 볼셰비키 혁명 당시 그는 아직 어린이에 불과했다.

스탈린 시대 게오르기 표도르프는 극히 예외적인 인물이었다. 세계에 많은 의문을 품었던 청년인 그는 생물학, 경제학, 철학도 학습한 적이 있었다. 국가 사상인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인문학을 완전히 장악한 시기에 표도르프는 ‘진짜 철학’을 연구하자고 결심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만민의 수령’ 스탈린의 위대성을 강조하기는커녕 우주의 근본적 질문을 답하고자 노력하였다. 사회학과 물질은 어떻게 연결되어 있을까? 생물학의 법칙을 사회학에 적용할 수 있을까? 게오르기 표도르프는 이런 의문을 항시 품었다.

1941년 6월 22일. 이 일요일은 전체 소련 국민에게 중요한 날이었다. 당시 나치 독일의 공격을 받았던 것이다. 표도로프는 자연스럽게 레닌그라드 인민지원군에 입대하였다. 학위가 있는 지식이라는 점에서 정치군관으로 임명되었다.

표도로프는 고향 레닌그라드 수호를 위해 싸웠다. 나치 수령인 히틀러는 도시를 직접 공격하는 것보다 포위하고 주민들을 굶어 죽을 때까지 기다리는 전략을 생각했던 것 같다. 그는 전쟁의 참혹한 면모를 목도했고, 이에 관해 대화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전쟁이 아주 어렵고 더러운 일’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긴 4년이 지나 비로소 끝났다. 1945년 5월 나치 독일은 드디어 항복했다.

나치 정권 멸망으로 약 석 달이 지난 1945년 8월 27일. 게오르기 표도로프는 중령으로 진급됐다. 그 6일 후 일본제국의 대표자들도 항복서에 서명, 제2차 세계대전은 종결됐다. 붉은 군대는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의 북반부를 점령했고, 표도로프 중령도 이곳에 파견됐다.

1940년대 북조선을 점령한 붉은 군대의 보고서를 보면 과장된 부분이 관찰된다. ‘해방된 지역’의 주민들은 ‘위대한 스탈린 대원수님께’ 감사를 드리고 ‘민주 개혁’이 승승장구한다는 주장이 이어졌다. 6.25전쟁 발발 이후 소련의 자료는 객관성이 훨씬 높아졌지만, 당시 군대에서 사실성이 의심될 만한 보고는 참 많았다.

우리 주인공도 당시 제1극동전선 정치부 선동선전국에서 복무하면서 평양에서 이런 ‘미화 보고’를 받았을 것이다. 표도로프 중령은 직업 선전 일꾼이었고 똑똑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는 이런 보고서를 보면서 충분히 의구심을 가졌을 것이다.

소련군 장교들(1945년). 뒷줄 오른쪽에서 첫번째 사람이 게오르기 표도로프다. 뒷줄 왼쪽에서 두번째 사람이 유리 립시츠로 추정된다. /사진=타티야나 표도로바 제공

여기서 표도로프 중령과 그의 전우인 유리 립시츠 중령은 북조선에 파견되었을 때 점령지의 현실을 가장 현실적으로 바라봤던 것 같다.

표도로프와 립시츠의 임무는 핵심적인 것은 아니었다. 전선 정치부 부장인 칼라시니코프 중장은 그들에게 북조선 농업에 관한 보고를 쓰라고 명령했다. 당시 소련 당국은 북조선에서 토지개혁을 준비 중이었다.

일본제국의 국어인 일본어를 유창하게 구사한 립시츠 소령은 많은 조선인들과 통역 없이 대화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 팀은 점령지에서 보낸 몇 주 동안 북조선에서 벌어진 일들에 대한 상당히 객관적인 이미지를 가질 수 있게 됐다. 이 이미지는 소련군의 미화된 보고들과는 분명히 달랐다.

북조선은 파괴 중이었다. 제국의 본토, 남조선 그리고 만주로부터 분리되는 북조선의 경제는 사실상 멈췄다. 공장들의 생산은 중단됐다. 농업도 위기였다. 비료를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북조선은 다가오는 1945~46년 겨울 기근의 위험을 대면할 예정이었다.

소련 병사나 장교까지 범죄행위에 가담했다. 조선 남자들을 마구 때리고 조선 여자를 강간한 자들도 있었다. 소련군의 지시에 따라 일본인들은 특정 구역에 이주됐고고, 열악한 환경 탓에 날마다 수십 명이 사망했다.

이 사태에 책임자는 있었다. 바로 제25군 사령관 이반 치스탸코프 상장이었다. 그는 부하들의 악행을 멈추지 않았다. 온건한 장교들이 개입을 시도했을 때 치스탸코프는 이를 막았다. 비밀경찰 출신 발라사노프 대령이 굶는 일본인에게 질이 나쁜 쌀밥이라도 제공하자고 요청했지만 쌀은 전리품이라는 이유로 거절했다.

‘놈들은 뒈져도 돼’. 치스탸코프는 일본인들 면전에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조선인들에 대한 태도에서도 큰 차이가 없었다. 그의 부하 중 비슷하게 행동한 사람들이 있었다. ‘조선 사람들은 35년 동안 노예였으며 이후에도 노예로 살아도 돼’. 표트르 드미트리예프 대령은 이렇게 언급하면서 현지 인민위원회 위원장을 아파트에서 쫓아냈다.

이반 치스탸코프와 김일성. /사진=소련보도국

표도로프와 립시츠는 이런 사태가 지속되면 안 된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평범한 중령과 소령이 어찌 3성 장군과 싸울 수 있겠나? 위험 요소가 너무 많았다. 무엇보다 군사재판소라는 존재도 무시할 수 없었다. 당시 형법 제58조 제10항에 따라 ‘소비에트 권위 모략죄’로 사형까지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북조선 주민들의 운명은 소련 장교 2명의 생명보다 더 중요했다. 이에 그들은 자세한 사항을 정리해서 그들을 북조선에 파견한 콘스탄틴 칼라시니코프 중장 보고를 올렸다. 이제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

당시 상황으로 봤을 때 이 같은 보고가 화로 돌아올 가능성도 있었다. 보고서를 본 어떤 이가 이를 치스탸코프에게 알려줬다면 이 영웅 2명은 사령관의 ‘피의 복수’에서 살아남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운명은 용기 있는 자의 편이었다.

칼라시니코프 중장은 표도로프 중령의 친구였다. 중장은 친구를 배신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 상관인 테렌티 시트코프 상장에게 보고 요지를 전달했다.

시트코프는 용기 있는 정치 장교였고 악의적인 사람도 아니었다. 그리고 시트코프의 계급도 치스탸코프와 같았다. 그도 바로 연해 군구 사령관 키릴 메레츠코프 원수에게 바로 보고서를 올렸다. 치스탸코프의 상관이라는 점에서 그에게 명령을 하달할 권한이 있었다.

사실 메레츠코프 원수도 사연이 많은 인물이었다. 1941년 그는 스탈린 정권으로부터 사형을 당할 뻔했다. 같은 해 6월 나치독일이 소련을 공격했을 당시 감옥에 있었던 메레츠코프는 스탈린에게 편지를 보냈다.

내용은 뻔하디 뻔한 ‘제발 석방해 달라’는 게 아니었다. 메레츠코프 장군은 적들과 싸울 수 있게 전선에 보내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스탈린은 고심 끝에 그를 석방했다. 그렇게 메레츠코프에 관한 모든 혐의는 없던 일이 됐다. 그러나 이 장군은 ‘만민의 수령’에 대한 충성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필자는 메레츠코프가 치스탸코프에게 하달한 명령을 보지는 못했다. 러시아 국방부 문서보관서에 보관돼 있을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쉽게 열람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서면이 아닌 전화를 통해 구두 명령을 내렸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필자는 치스탸코프의 ‘대답’은 봤다. 이 굽실거리는 편지엔 ‘사령관 동지께’ 전체 북조선에 굶는 사람들에게 원조를 제공하겠다고 설립한 위원회 목록도 포함돼 있었다. 오만한 장군은 상관의 명령을 받자마자 굴복했다.

아주 가까운 미래인 1946년 1월 치스탸코프는 북조선에서 실권을 거의 상실하였다. ‘북조선 책임 장성’의 자리에 테렌티 시트코프가 앉게 되었다. 북조선에 도착하자마 시트코프 장군은 소련 정부에 북조선 경제적 원조 요청을 보내기 시작했다. 치스탸코프의 시대는 드디어 막을 내렸다.

표도로프와 립시츠가 역사의 방향을 완전히 바꿨다고 할 수는 없다. 치스탸코프는 1947년 북조선에서 떠나 동독을 비롯해 여러 곳에 복무했다. 치스탸코프는 1979년 사망했다. 이로써 그가 알았던 모든 내용은 그렇게 사라졌다.

이번 사건이 치스탸코프에게 미친 영향을 알아볼 만한 유일한 증거는 ‘조국을 위하여 복무합니다’는 치스탸코프의 공식 회고록이었다. 다만 검열이 두려워서일까. 그는 이 서적에 자신이 정치에 관심이 없던 사람인 것처럼 행동했다.

이반 치스탸코프가 실권을 상실한 후 북조선의 생활 수준은 어느 정도 개선됐다. 그러나 이 번영은 6.25전쟁의 불 속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김일성과 박헌영의 남침 계획을 승인한 사람은 바로 치스탸코프의 ‘후임자’인 테렌티 시트코프 장군이었다.

그러나 표도로프와 립시츠는 보고를 탓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시트코프 상장의 북조선 파견과는 관계가 그리 크지 않기 때문이다. 시트코프는 미소공동위원회 소련대표단의 단장이었다. 이 외교 임무는 우리 주인공들과 아무 관계가 없었다.

다만 북조선 실권이 치스탸코프에서 시트코프에게 이양됐던 이유는 보고서 때문일 수도 있다. 북조선의 최고 실권자가 갑자기 바뀌는 일에는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또한 우리 주인공이 어찌 할 수 없는 일이라는 평가다.

여기서 중요한 건 1946년과 1950년 사이 북한의 경제적 발전의 주요 원인은 이 두 사람의 행동이라는 점이다.

또한 북조선의 일본 민간인들의 운명도 주목해 봐야 한다. 메레츠코프 개입이 없었다면 얼마나 많은 일본인이 사망했을까. 그러나 표도로프와 립시츠 덕분에 살아 남았지만, 그들은 자신을 구한 장교의 이름조차 몰랐을 것이다.

게오르기 표도로프는 독신으로 살아왔다. 소련으로 귀국한 후에도 독신으로 남았다. 1948년 9월 그는 레닌군사정치대학에 강사로 근무하게 됐다.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이 사망한 후 드디어 결혼할 마음을 먹었다. 그는 폭군이 살아 있었을 때 가족이 인질이 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표도로프는 재차 철학 연구를 하게 됐다. 그 주제는 전쟁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시대부터 ‘텔로스(τέλος)’라는 개념이 있었다. 이 텔로스는 바로 목적, 최종 목표라는 뜻이다. ‘목표라는 것은 무엇인가? 특히 전쟁의 목표는 무엇인가?’를 탐독했고, 1964년 종합박사 학위를 받았다.

후년기 게오르기 표도로프 대령. /사진=타티야나 표도로바 제공

논문이 나오던 그해 표도로프는 생을 마감했다. 만 55세라는 젊은 나이에 말이다. 딸 타티야나도 만 7살에 불과했다. 타티야나는 아빠의 마지막 순간을 보지 못했다. 그의 아내는 남편이 자기 탓에 목숨을 잃은 게 아닌지 비통해 했다. 남편의 요통만 신경을 썼지만 심장 쪽에 진짜 문제가 있었던 사실을 몰랐다는 점 때문이다.

필자는 표도로프의 딸 타티야나를 2019년 처음 만났다. 그는 조선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알지 못했다. 아버지가 북조선에서 복무한 적이 있다는 사실만 인지하고 있었을 뿐이다.

필자의 이야기에 티티야나는 감동했다. 그리고 본인에게 ‘깜짝 뉴스’를 알려줬다. 본인이 아들이 표도르 예제에프라는 유명 인물이라는 사실 말이다. 그는 2010년대 초기 움푹 팬 도로를 당국에 신고할 수 있는 사이트를 만든 시민 운동가였다.

타티야나는 아들의 이름을 표도로프 가문에 따라 선택했다고 설명했다. 할아버지처럼 손자도 서민을 위해 일을 할 준비가 돼 있었다.

역사엔 광폭한 권력자도 있었지만, 그 권력에 순응하지 않고 도덕적 책임을 우선으로 한 영웅들도 존재했다.

나치 독일에선 홀로코스트 존재를 동맹국에 알려준 친위대 상급돌격지도자 쿠르트 게르슈타인은 있었다. 일본제국에선 나치정권으로부터 대피한 유대인 수천명들에게 비자를 발급해준 부영사 스기하라 치우네가 있었다. 미국 내전 시기엔 남부 군인들 중 흑인 노예 해방을 위해 반란을 일으킨 뉴턴 나이트 병사가 있었다. 아파르트헤이트 시대의 남아공에선 국가 인종주의에 항의한 리처드 골드스톤 백인 판사가 있었다. 필자는 이 영웅 리스트에 ‘게오르기 표도로프’라도 포함됐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필자가 쓴 김일성 이전의 북한(2018, 한울 )’이라는 도서에서 보고서 원문과 한국어 번역을 참조할 수 있다.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