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 서기 ‘애국열사’ 엄항섭 가족은 정치범이었다…북한은 뭐했나

[북한비화] 종파분자 숙청으로 한순간에 추락...이후 복권되지만 이미 '나락'으로 떨어져

김구_엄항섭
김구·진동생·이동녕·엄항섭(가흥, 1933). /사진=공훈전자 사료관 홈페이지 캡처

김정은 집권 2년차에 접어들던 2014년 양강도 한 산골 마을. 돌연 중앙당 당역사연구소 일군(일꾼)과 도당 간부 일행이 이곳에 들러 백범 김구 선생의 서기 엄항섭의 아들인 엄기동 가족을 찾았다.

왜 엄 가족은 이곳으로 추방됐고, 또 어찌된 사연으로 당 간부들이 직접 이들을 찾아나서게 된 걸까.

때는 바야흐로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남북연석회의 참석을 위해 광복 후 북행길에 동행했던 엄항섭은 김구 선생의 별세 후 1951년 다시 북한을 찾는다. 이후 조국통일에 주력하던 그는 1960년대 당 종파분자 숙청 여파로 처형당하고 만다.

엄항섭은 아들 엄기동, 며느리 공정숙(황해북도 사리원 출신)과 1남1녀의 손주들을 키우고 있었는데, 당국은 바로 이들과 며느리 오빠 가족들까지 모두 한밤에 트럭에 태워 어디론가 끌고 갔다.

후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들은 바로 북한의 악명 높은 관리소(정치범수용소) 중 하나인 25호관리소(청진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됐다고 한다.

관리소 안에서의 생활은 그야말로 처참했다. 하루 18시간 중노동에 동원돼야 했고, 높이 1m도 되지 않은 공간에서 생활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허리가 굽어지는 등 육체적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또한, 언제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채찍질과 구둣발 폭행에 대한 두려움으로 정신적으로 피폐해져 갔다. 특히 여성들은 검신(檢身·몸수색)이라는 명분을 내세운 일상적인 성희롱까지 감내해야만 했다.

이처럼 수감자들은 더는 ‘인간’이 아니었다. 심지어 관리소 측은 사망자에 대해 ‘당과 수령 앞에 진 죄를 씻지 않고 죽는 쉬운 길을 택했다’면서 시체를 야간 기슭에 버려두기도 했었다고 한다.

그러다 1992년 반전이 일어난다. 당시 김일성은 쑥섬혁명사적지(평양 대동강 기슭)를 돌아보다 “김구 선생이 북남 연석회의에 들어와 우리와 뜻을 같이할 수 있은 데는 엄항섭의 역할이 컸다”면서 돌연 그 가족을 찾아보라고 한 것이다. 북한에서는 수령의 한마디에 사람이 죽기도 살기도 한다.

이후 엄항섭은 평양시 형제산구역 신미동에 위치한 애국열사릉에 안장됐고, ‘수령님의 교시와 하늘같은 배려’라는 명분으로 엄기동 가족은 관리소에서 풀려나게 됐다. 다만 평양이 아닌 양강도의 두메산골에서 살게 됐다.

2014년 당 간부들이 이들을 찾아온 건 김정은의 방침에 따라 애국열사 가족들을 살피기 위한 데 있었다. 그러나 한쪽 벽엔 ‘애국열사증’만 덩그러니 걸려 있을 뿐 다 쓰러져가는 허름한 살림집을 목도(目睹)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엄기동은 이미 관리소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한 상태였고, 공 씨와 자녀들은 모두 정신병을 앓고 있어 사람들과 소통하기 힘들 정도였다.

이처럼 ‘애국열사’ 가족은 정신적 고통에 힘겨워하는 존재로 추락했고, 등 척추가 부러지고 등에 혹이 툭 튀어나오는 등 육체적으로도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뒤늦은 ‘간부 등용’ ‘생활 개선’이라는 방침을 집행해야 하는 일군들은 처참한 상태에 넋을 잃었고, 그대로 현 상황을 상부에 보고했다.

이후 당국은 평양에 불러들이지는 않으면서도 집을 허물고 ‘애국열사 가족의 집’이라며 큰 집을 지어줬다. 고문과 학대로 멍든 마음의 병을 어루만져주기보다는 또 한 번 허울뿐인 ‘선물 공세’로 정권의 만행을 덮으려고 시도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