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고아원 아이들, 땅굴에서 일하다 흙에 깔려 죽기도”

진행 : 안녕하십니까. 이광백입니다. 2015년 유엔은 대한민국 서울에 인권사무소를 설치해 북한의 인권상황을 감시하고 피해자들의 증언을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 정부도 2016년 말 탈북민들의 증언을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록은 통일 후 인권 책임자들을 처벌하는 결정적인 법적 근거가 될 것입니다.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고 어떤 인권문제가 있는지 이야기해 봅니다. 지금도 북한에서 인권침해를 지속하고 있는 가해자들이 인권침해 행위를 중단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동은 오랫동안 보호의 대상으로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다 1989년 유엔은 아동을 단순한 보호 대상에서 권리의 주체로 인정하는, 아동권리협약을 채택합니다. 1990년 북한은 곧바로 아동협약을 비준하고 발효합니다. 국내법으로 아동권리보장법을 두고 있는 북한. 어린이들의 지상 낙원이라고 하는 북한. 어린이를 사랑한다는 김정은 정권의 아이들은 과연 마땅한 보호와 권리를 누리고 있는지 북한 아동의 인권실태를 알아보겠습니다.

오늘은 그 두 번째 시간으로 북한의 고아원 실태에 대해서 들어보려고 합니다. 오늘 증언해주시기 위해서 이 자리에 이위력씨 나오셨습니다.

– 안녕하세요, 북한의 고아원 출신이신데 어디서 생활하셨나요?

저는 함경북도 온성 쪽에서 고아원 생활을 했습니다. 제가 나온 곳 이름이 이부모학원, 계모학원이에요. 함경북도에 학원(고아원)이 세 개가 있어요. 길주에 있는 초등학원, 청진에 있는 중등학원 종성에 있는 계모학원, 그중에 제가 계모학원을 졸업했고요. 제 고향은 함경북도 김책입니다. 김책에서 9살 까지 살다가 고아원에서 한 7년 정도 살고 평양에서 한 3년 정도 살고 그러다가 방랑하다가 한국에 오게 됐습니다. 2010년도에 왔습니다.

– 그렇군요. 한국에 온 것은 한 7년 정도 됐군요. 고아원에도 한 7년 정도 계셨군요?

북한에서는 유복한 집에서 태어나 살다가 부모님을 잃으며 그렇게 됐습니다. 부모님은 돌아가신 건 아니에요. 아버지가 경찰이셨는데 북한은 한국과 다르게 월급이 안 나오니까 북한 경찰로써 권력 남용을 했어요. 벌이가 충분히 괜찮았었는데 욕심이 많으셔서 김책 앞쪽에 골동품을 밀수하는 사람을 도와주다 교시가 내려와서 첫 타겟으로 단속돼서 잡혔습니다. 그래서 정치범 수용소로 들어가셨고 이때 어머니는 중국으로 넘어갔다가 인신매매를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루아침에 고아가 됐고 살면서 너무 힘들어서 할머니가 계시는 온성 쪽으로 갔는데, 할머니 집 생활도 안 좋아져서 고아원으로 들어가서 어머니를 기다리자했습니다. 그래서 고아원에서 아홉 살 열 살 때부터 열여덟 살까지 살았습니다.

– 고아원의 위치, 어디에 있던 곳인가요?

함경북도 온성군 종성구예요. 제가 여기서 처음 말하는 겁니다.

– 당시가 몇 년도였나요? 고난의 행군 시작했을 땐가요?

맞아요. 99년도 제일 힘들 때죠.

– 한국에서는 부모가 없을 경우, 그런 사람들을 기르는 시설을 고아원을 부르는데 북한에서는 뭐라고 부르나요?

학원이라고 해요. 그래서 한국 와서 엄청 헷갈렸던 에피소드가 한국에는 학원이 많아서 고아가 너무 많구나, 북한에서 듣던 바대로 심각한 땅이구나 했죠.

– 아까 이른바 학원, 고아원에 들어간 사정은 잠깐 말씀을 해주셨는데 당시 고아원에 들어가셨을 때는 몇 명의 아이들이 있었나요?

그게 불규칙해요. 제가 졸업할 때는 100명~130명 정도 있었는데요. 고난의 행군 때는 300~400명 정도 들어왔어요. 수많은 애들이 굶어죽고 도망치고 그러면서 인원이 한 달 전에는 300명이던 애들이 다음달에는 200명이 되고 변동이 심합니다.

– 보통 나이는 몇 살부터 몇 살까지 아이들이 오나요?

인민학교 1학년부터 중학교 6학년 까지 애들이 다 있습니다.

– 그럼 초중고 학생들이 다 있는 거죠?

네, 맞아요.

– 일단 고아원의 시설이 궁금한데요, 예를 들어 잠자는 시설, 식당, 학교 같은 교육시설 등 어떤 시설들이 있을까요?

시설이라면 다 있어요. 그런데 다 있다고 하게 되면 잘못된 걸 수도 있는 게 사람들이 다 배치되어 있는 거예요. 선생님들이 있고 시설관리 교직원들이 있고 교양원들이 있고 거기에 침실은 한 10평되는 침실에 한 열두 명 정도 들어가 있습니다. 여름에는 여름 침실이 있고요, 겨울에는 온돌방이라고 해가지고 한 삼십 평 되는 시설에 70명씩 이보다 넘을 때도 있어요. 거기서 잠을 자는 거예요. 한 개의 병동이 있는데 이걸 오른쪽, 왼쪽 나눠서 남녀를 나눠서 써요. 거기에 또 들어가면 양 쪽에 두 개 층을 구비돼있고 위층은 어린아이들이 많이 누워있고 아래층은 형들이 누워있습니다. 그래서 거의 많을 때는 70명 이상도 있죠.

– 고아원의 하루일과도 궁금한데요.

여섯시에 일어나서 이불정돈하고 청소하고 일곱 시에 밥을 먹습니다. 9시에 수업을 시작해서 오후1시, 2시까지 수업을 합니다. 나머지 시간은 휴식하고 문화 활동하고 그리고 저녁에 취침을 하는 겁니다. 이게 정상 고아원의 스케쥴입니다.

– 그럼 실제적으로 어떻게 되죠?

실제로는 겨울에는 아침에 일어나서 공부하고 오후에는 나무하러 가요. 한 삼십리 길을 걸어갑니다. 나무가 없거든요. 깊은 산으로 들어가야만 해요. 여름에는 오후에 농사하러 갑니다. 문화생활이 전혀 없고요. 농사에는 시즌이 있잖아요. 김매기철, 가을걷이철 이런 때는 3박4일, 5박6일 이렇게 오전부터 저녁까지 애들을 아예 산에 다 데려가요. 밭 밑에 기숙사 설치하고 거기서 자면서 일을 하는 거죠.

– 나무를 한다던가, 다양한 형태의 노동을 하는군요.

거의 그렇죠. 저는 북한에서 그렇게 다들 사니까 정상인줄 알았어요. 한국에 와서 아동착취고 안 되는구나 깨달았어요.

– 그때는 당연할 줄 아셨군요. 대부분의 시간을 노동을 하면서 보낸거군요.

저는 그런 게 있어요. 친구들끼리 손을 딱 펴봐서 부드러우면, 놀새라고 해요. 일을 안 하고 성실하지 않은 친구라고 해서 왕따 시켜버리는 거죠. 남자들끼리. 13살, 14살 때도 손을 보면 굳은 살이 다 있어요.

– 나이에 따라 다르겠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시키나요?

크게 나누면 여름에는 농사, 겨울에는 산에 가서 나무하기. 나무를 그렇게 많이 하는 이유가 당에다 바치는 게 아니라, 학교 시설 내에 쓰려고 하거든요. 땔감으로요. 석탄이 없다보니까요.

– 많은 연료용 나무를 학생들이 구해오는군요.

맞아요. 계속하다보면 하루도 쉴새없이 할 때도 있어요.

– 그걸 국가가 공급 하는 건 아니군요.

학생들이 다 구해야 해요. 여름에는 농사를 짓는데, 매일 하는 건 아니고 쉴 때가 있어요. 근데 쉴 때는 토피를 찍었어요.

– 토피를 찍는다는 게 뭐죠?

산에 가서 진흙층을 찾아서 진흙을 파서 거기다 볏짚을 진흙에 섞어가지고 물로 반죽해요. 흙벽돌 이런 걸 만드는 거죠. 흙벽돌을 만드는데 그걸 하다가 애들이 제일 많이 죽어요. 작으면 작을수록 일을 더 많이 할 수 있는 거예요. 진흙층을 찾게 되면 애들이 진흙층을 따라가면서 호미로 긁어내는 건데 계속 일을 하다가 어느 순간 돌아보면 굴이 되어 있는 거예요. 근데 기둥도 없이 일을 하다가 몇 톤이 되는 흙이 무너져 내리면 열댓 명이 깔려 죽을 때도 있고 팔다리가 부러질 때도 있고 그래요. 작으면 작을수록 애들이 더 들어가고 애들이 더 죽는 거죠.

– 그런데 그런 현장에서 사고가 날 경우에 선생, 관리인들은 어떤 일을 하나요?

그냥 당황스러워 해요. 몇 톤씩 되는 거에 깔리니까 구할 수가 없어요. 시체밖에 못 건져요. 겨울에는 나무하러 이십 리, 삼십 리 길을 들어가는데 가는 길에 밭들을 지나가거든요. 그러면서 혹시 낱알이 떨어진 게 없나 해서 낱알을 주우며가요. 산에 가서 불 때서 낱알을 구워먹어요. 그 다음에 나무를 해요. 그렇게 되면 밤 아홉시, 열시가 돼요. 겨울에 아홉시, 열시면 하나도 안 보여요. 북한이 불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산길, 오솔길 우리가 만들 길로 우리가 가야하는데 학급전체가 줄을 지어서 오거든요. 여기서 힘든 애들은 이탈을 해버리기도 해요. 결국 나무를 하고 학교 와서 인원체크를 하면 한 명이 산에 남는 경우도 있어요. 근데 이 삼십 리 길을 돌아가는 건 너무 늦어요.

– 교사들은 같이 찾으러가지 않나요?

안가요. 학생들끼리 가요. 선생님들이 “아이고 걔 어쩌냐” 이정도해요. 그날 저녁에 가지 못하는 이유가 갔다가 같은 인원이 죽을 수 있어요. 그 다음날 길 따라 가게 되면 나무를 멘 상태로 졸다가 얼어 죽은 게 발견되죠.

– 나무를 지고 돌아오면 나무의 크기 무게는 어느 정도인가요?

보통 삼십 키로 정도예요. 사람마다 다른데 자기 몸에 맞게 나무도 적게 하면 안돼요. 적게 할 수 없이 학교에서 정해놓은 게 있는데 대, 중, 소 그 사람의 체격에 맞게 너는 한 달에 나무 대를 다섯 번하고 중을 세 번하고 소를 세 번해라가 있어요. 그런데 만약 소를 네 번하면 나무를 하러 다시 가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작은 애들이 한 번 더 가지 않으려고 무리해서 많이 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다가 죽기도 하는 거구요. 멀리서 보면 사람이 안보이고 나무만 보여요. 애들이 너무 작은 거죠. 가까이 봐야지만 사람이 등에 지고 오는걸 알 수 있죠. 참고로 제가 고등학교 졸업할 때 키가 145cm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가장 큰 키였어요.

– 고아원에서는 어떻게 먹는지도 궁금합니다. 어떻게 식사배급이 이뤄지나요?

옥수수밥을 줘요. 군량재기, 군부대 양재기의 절반정도로 줘요. 국그릇만한데 거기 밥이 절반정도 있다고 생각하면 되는데, 그 밥은 집에서 하는 게 아니라 기계에서 만든 거예요. 칼질한다고 하는데 밥을 삽으로 막 저으면 부슬부슬 뜨는데 그걸 떠서 주는 거예요. 실제적으로 절반인데 누르면 쑥 들어가는 거죠. 이걸 먹으면 당연히 배고파요. 먹고 돌아서는 순간 배고팠어요. 살아남는 방법이 소화를 늦게 시키는 방법이었어요. 소금국물을 주거든요. 소금 국물을 밥에다 쏟아요. 그걸 약처럼 마시는 거예요. 씹으면 절대로 안돼요. 씹으면 소화가 빨리돼서 바로 배고프거든요. 근데 마셔버리면 한두 시간은 가니까, 결국 소화를 늦게 하자가 목표였어요. 저도 고아원에 들어가서 밥을 꼬깃꼬깃 씹어 먹으니까 형들이 딱 때리더라고요. 그렇게 먹으면 며칠 못산다고 이렇게 먹어라 하고 배운 거예요. 옥수수밥을 먹을 때는 극히 평범할  때였구요. 고난의 행군 때는 송치가루를 먹었어요.

– 송치가루는 어떤 건가요?

옥수수 대를 갈아내요. 한때 너무 식량이 없으니까 당 중앙에서 벼 뿌리랑 옥수수를 먹으면 살 수 있다 이런 게 내려왔어요. 그래서 고아원에서 벼 뿌리를 채취하고 갈아내서 옥수수가루를 조금 넣어서 그걸 먹었어요. 애들이 그걸 먹을 때 배고프니까 먹는데 목에서 넘어가질 않아요. 까칠까칠하거든요. 그걸 넘기면 2~3일은 대변을 못 봐요. 그래서 다시 선생님들이 장갑 끼고 손을 넣고 빼내는 거예요. 그런데 선생님들도 “살기 위해서 참아라”라고 하셨어요. 애들은 이게 아프니까 도망가지만 도망가면 대장이 터져서 죽는 거예요. 애들이 배고프니까 어쩔 수 없이 먹으면 배는 점점 나오고 뱃속에 쌓이고 다시 선생님이 손으로 꺼내고 반복이에요.

– 나중에는 알 텐데 당 지시라도 벼 뿌리랑 옥수수 대를 계속 먹나요?

먹을 게 없는데 그거라도 먹어야죠. 한 달 정도가 그렇게 먹을 게 없었어요. 그때는 애들이 많이 안 죽었어요. 제일 힘들었던 기간이 유엔에서 와서 사진을 찍어간 후에요. 그거로 인해서 외국에서 월병 라면이 들어왔어요. 근데 월병을 먹으니까 애들이 설사를 하는 거예요. 애들이 원래 기름이 하나도 없었는데 기름이 들어가니까 설사를 하고 사망을 하는 거예요. 열흘 굶은 사람한테 죽부터 먹이듯이 했어야했는데 막 굶주린 상태에서 기름이 들어가니까 설사를 하면서 죽는 거예요.

– 그런데 관리원이 있고 교사들이 있는데 기본상식을 모르고 막 먹이는 건가요?

북한에는 먹는 건 상식이 없습니다. 먹는 자체가 중요한 거지 이걸 어떻게 먹어야겠다. 이런 건 전혀 없어요. 상황이 전혀 안돼요. 입에 들어갈 수 있는 자체가 중요한 거죠. 

진행 : 북한의 아동인권의 실상을 살펴봤는데요. 북한 고아원의 실상 특히 먹는 문제에 대해서 그리고 노동에 대해서 얘기 나눴습니다. 오늘 증언감사하고요. 다음 시간에는 북한 고아원의 또 다른 실상에 대해서 얘기 나누겠습니다. 이위력씨 오늘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