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지도원, 잇따른 딸 탈북에 도끼질 위협하며 집 강탈 시도”

진행 : 안녕하십니까. 이광백입니다. 2015년 유엔은 대한민국 서울에 인권사무소를 설치해 북한의 인권상황을 감시하고 피해자들의 증언을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 정부도 2016년 말 탈북민들의 증언을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록은 통일 후 인권 책임자들을 처벌하는 결정적인 법적 근거가 될 것입니다.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고 어떤 인권문제가 있는지 이야기해 봅니다. 지금도 북한에서 인권침해를 지속하고 있는 가해자들이 인권침해 행위를 중단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북한에서 가족 중 하나가 탈북할 경우 남은 가족들은 당국으로부터 심한 감시와 차별을 받게 됩니다. 오늘은 탈북자 가족에 대한 당국의 감시와 차별, 어떤 불이익을 받는지 관련 증언을 들어봅니다. 

– 안녕하세요. 북한에선 어디에서 사셨어요?
평안북도 정주에서 나고 자라 한 30년 살았습니다. 이후 함경북도에서 20년 살았고 2015년 여름에 탈북해서 2016년에 한국으로 입국했습니다.
– 왜 떠날 결심을 하게 된 건가요?
북한에 있을 당시 열성적인 충성분자였어요. 둘째 딸 행방불명 이후 큰딸 일가족이 탈북했습니다. 둘째 딸의 경우처럼 북에서 혼자 없어지는 경우에는 ‘중국으로 갔을지 모른다’고 하지만, 첫째 딸의 경우처럼 일가족이 한 번에 없어지는 경우는 거의 한국행으로 여깁니다. 인민반장을 20년 하고 토대도 매우 좋았기 때문에 별문제 없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둘째 딸의 행방불명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첫째 딸 일가족의 탈북 이후 당국의 감시, 차별을 심하게 받게 됐어요. 하루도 사는게 사는게 아닐 정도로, 감시와 차별이 지겨워지더라고요.

– 토대(성분)가 좋다고 하셨는데 얼마나 좋은 거예요?
북에서 토대라 하면 대대로 내려오는 거예요. 일단 저는 이중영웅(영웅칭호를 2개 받은 경우) 집안이었습니다. 우리 가족 중엔 형님이 이중영웅이었어요. 돼지고기 생산을 한 해에 12톤씩 해서 군대에 무상으로 바쳐 김정일 때에 이중영웅 칭호를 받게 됐죠. 배려도 많이 받고, 또 군대 집안이다 보니 토대가 그만하면 괜찮죠. 그런데 감시를 받다 보니 살아서 보람도 없고, 이렇게 마음 놓고 살지 못할 바에 ‘(남으로)가자’하는 마음이 생기게 된 거죠. 

– 이중영웅 집안에 본인도 인민반장으로, 당원으로 아주 열심인 충성분자였는데, 첫째 딸 일가족의 탈북으로 당국의 감시를 심하게 받게 된 것이군요. 그런데 어떤 식으로 감시를 하나요?
딸이 탈북하자마자 보위부에서 먼저 가택수사가 들어오더라고요. 보위부, 안전부 합동 수사로 영장도 없이 집을 들어왔어요. 이불장 뒤져서 이불마다 뜯고, 바람벽 해둔 종이 벽까지 다 뜯어보고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가택수사를 하더라고요. 간첩행위라도 했는지, 무슨 흔적이라도 찾아보겠다고. 온돌에 천장까지 다 뒤지고 말이죠. 얼마나 심하게 하던지 그 사람들 하는 거 보고 있자니 총이 있으면 쏘고 싶은 생각이 다 들더라고요. ‘내가 이런 사람들 밑에서 꾸벅꾸벅하며 이 나라 지키겠다고 그렇게 일해왔구나’는 반발심이 나게끔 하더라고요.  
– 철저하게 수색하는 모습에 처음으로 당에 대한 충성심이 흔들리고 회의감도 느끼고, 심지어 총으로 쏘고 싶다는 분노까지 일었군요. 가택수사 한 이후에는 어떤 식으로 감시를 하던가요?
제가 돈을 주고 산 집인데 집을 뺏겠다고 했어요. 큰딸 가족이 갑자기 탈북한 이후 아직 짐도 빼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당시 작은딸(막내딸)이 그 집에 들어가 지내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사람이 살고 있는 집에 사무지도원이라는 사람이 찾아와 강제로 차지하려고 했던 거에요. 그는 군관 제대한 사람이었는데, 집이 없어 남의 집에서 객방살이 하고 있던 사람이었나 봐요. 그러자 당국에선 잘됐다하고 그 사람에게 우리 집에 들어갈 수 있는 입사증을 떼준 거죠. 그쪽 사람들이 와서는 딸네 가족의 짐과 당시 지내고 있던 작은딸의 짐을 막무가내로밖에 빼놓고 집을 내놓으라 하더라고요. 심지어 도끼질까지 하며 위협하더라고요. 그래도 힘이 있어 집을 뺏기지는 않았죠. 
– 딸네 가족이 살던 그 집을 직접 샀다고 하셨는데, 얼마나 좋은 집이었나요? 
당시 2008년도에 북한 돈으로 180만 원 정도 들여 산 집이에요. 그때 북한 돈으로 180만 원이면 일반 가정이 2년 정도 먹고 사는 돈이라 할 수 있죠. 당시 중국 돈 100원에 북한 돈 5만 원 하던 때니까 180만 원이라 하면 정말 알차죠. 
– 큰딸이 탈북한 후에 딸과 연락은 하고 지내셨어요?
한해 두 번은 연락하고 지냈어요. 자주 할 수 없었던 게 북에선 외국과 통화하는 탐지기 같은 게 있어서 통화하려면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가서 해야 해요. 또 브로커를 통해 연락을 하는 데 그 비용도 만만치 않고요. 그래서 통화를 자주 할 수 있는 형편은 아니었죠.
– 인민반장을 20여 년간 하셨죠. 딸이 탈북한 후에도 인민반장을 계속하실 수 있었나요?
처음 둘째 딸이 행방불명된 후에는 별다른 문제 없이 인민반장일을 했어요. 그런데 큰딸 가족이 탈북한 이후로 방침이 떨어졌어요. (2012년 당시) 행방불명 혹은 탈북한 집안에서는 인민반장을 할 수 없다는 방침이요. 그런데 사실 탈북한 가족이 있는 반장이 대중 앞에서 교양일을 한다는 게 어렵죠. 반장일이라는 게 대중들에게 ‘탈북하지 않게끔 감시를 하자’, ‘낯선 사람이 오면 신소를 제기하라’는 등 선전을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할 체면이 안 서는 거죠. 마침 방침이 떨어졌고 해임된 거죠.

– 해임 과정은 어떻게 진행됐나요?
반장들 다 모여두고 “오늘 몇 반 인민반장 하던 누구를 딸이 탈북한 이유로 강제해임한다” 이렇게 발표를 하고 해임됐죠.

– 해임된 이후에 어떤 생각이 드셨어요?
처음에는 죽고 싶은 생각도 들더라고요. 사람들 앞에 서기가 쑥스러워지고 밖에 나가려니 사람들 손가락질당하는 것 같고 내 뒷소리 하는 것만 같고요. 한동안 대낮에는 밖에 나가기도 어렵더라고요. 여기 땅에서 살고 싶은 생각이 없어지더라고요. 사람이 사람값(자기 몫)을 못하게끔 하니 앞으로 어떻게 계속 사나 싶더라고요. 

– 인민반장에서 강제 해임된 이후로는 무슨 일을 하셨어요?
그렇게 충성을 다했는데 이런 대우를 받고 배신감을 느끼게 되니까 돈 벌 생각밖에 안 들었어요. ‘다 필요 없고 나에게 차려지는 건 이것뿐이구나’ 싶어 이제부터는 돈을 벌어서 내 주머니를 채워야겠다 싶었던 거죠. 집에 기계를 들여 돈을 벌기 시작했어요. 식료가공 설비를 집에 두고 장사를 시작한 거죠. 
– 그렇다면 가택수사를 당하고, 집을 뺏길 뻔하고 결국 인민반장에서 해임되셨고요. 그 후에도 당국의 감시나 통제가 있었나요?
저도 모르게 사람 몇 명을 시켜 우리 집 감시를 붙였더라고요. 우리 생활, 집안 일체를 감시 붙인거에요. 그런데 어느 날 일을 시켰던 일군 중 하나가 와서, 보위부에서 시켜 25일 동안 우리 집을 대대적으로 감시했었다고 털어놓더라고요. 혹시 내가 뛰는지(탈북하려는지), 집에 낯선 사람이 찾아오지는 않는지 등을 감시했다는 걸 듣는데, ‘발도 편히 못 뻗게 못살게 해놨구나 내가 이렇게까지 감시를 받아야 하나’ 생각이 들더라고요.

– 남편이나 다른 가족은 어떠셨어요?
남편도 굉장한 충성분자였어요. 내가 딸과 전화라도 하거나 돈이라도 받게 되면 남편이 신소(신고)하겠다고 난리였죠. 남편도 딸의 탈북 문제로 간부직책에서 해임됐거든요. 그 때문에 남편도 마음이 상하고 반발심도 날만 했죠. 그러면서 남편과의 사이가 좋지 않게 됐어요. 점점 남편이 타락에 빠지게 되고 매일 술을 마시며 나를 때리겠다고 했어요. 남편까지 그렇게 되니까 저로서는 정말 도리질하게 되더라고요. 사회주의라는 게 사람을 이토록 죽지 못해 살게끔 만드나 싶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딸에게서 전화가 와서는 “이번 기회가 아니면 영영 오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딸은 자신이 탈북한 이후에도 충성분자인 엄마가 탈북해 올 거란 생각은 많이 안 했대요. 그도 그럴 만한 게, 저는 그때까지도 딸에게 ‘다시 돌아와라, 다 용서해주고 받아줄 것이다’며 설득했거든요. 그러던 제가 일군을 통해 그토록 감시받고 있었다는 걸 안 날 이후 마음이 확 돌아서더군요. 오라는 딸의 말에 제꺽 가겠다는 말이 나오더라고요. 딸은 놀라더라고요. 7월 초에 딸의 전화를 받고 19일 선거 이후 곧바로 나왔어요.

– 한국에 나오니 어떠세요?
북에서 듣기로 한국에서는 탈북민들을 울타리 안에 모아두고 결코 못 벗어나게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런데 와서 보니 국정원에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돌봐주고, 하나원에서도 잘 보살펴주고요. 나중에 집까지 받아 나와서는 참으로 좋았죠. 감시는커녕 우리를 보호해주고 있더라고요.
– 지금까지 딸의 탈북으로 당국으로부터 불이익과 감시를 받아야 했던 문미화 씨의 증언 들어봤습니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진행 : 탈북인 가족을 끊임없이 감시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차별하거나 심지어 처벌까지 하는 북한 당국의 행태, 과연 어떤 문제가 있는지 전문가 의견 들어보는 시간 준비했습니다. 한국외국어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조정현 교수 전화 연결돼 있습니다. 

– 교수님 안녕하세요? 문미화 씨의 사례에서 어떤 문제를 짚어볼 수 있을까요?
조정현 교수 : 기본적으로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은 자신만이 지는 것이 일반적인 법 원칙입니다. 그러나 위 사연과 같이 그 가족에게 관련 책임을 묻는 것과 같은 차별을 가하는 것은 일종의 연좌제적 관행으로 국제인권 차원에서 용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특히 탈북자 가족의 가택수사를 적절한 절차 없이 행한 것이라면, 이는 북한도 당사국인 자유권규약 제17조에 규정된 사생활 보호 의무에 어긋납니다. 이에 더해 협박을 하며 집을 뺐으려는 시도, 인민반장을 다른 정당한 사유 없이 강제 해임하고 심한 모멸감을 준 행위들도 정당화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렇듯 탈북자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특정 사회집단에 대해 여러 불이익과 심각한 차별을 가한다면 이는 박해 또는 기타 비인도적 행위에 해당할 수 있으며, 국가가 이를 정책으로 체계적으로 시행한 것이라면 국제형사법상 인도에 반한 죄에도 해당할 수 있습니다. 또한, 국제난민법상 정식 난민으로도 인정받을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실제 이번 문미화 씨 경우 외의 다른 탈북자 가족들의 경우는, 구금 및 고문은 물론 산간오지로 추방당하는 등 더욱 심한 차별 내지 박해 행위를 받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진행 : 네, 탈북인 가족이라는 이유로 당국으로부터 불이익과 감시 등의 차별을 받은 문미화 씨 사례에 관한 법적 문제를 살펴봤습니다. 조정현 교수님 감사합니다.
북한 당국에 의한 인권침해로 북한 주민들의 고통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국제사회와 대한민국은 인권침해를 기록해 향후 가해자 처벌을 위한 근거자료로 활용하려고 합니다. 북한 당국과 책임자들은 인권 침해 행위를 지금이라도 중지해야 할 것입니다. <라지오 북한인권기록보존소, 눈물의 기록, 정의의 기록>, 지금까지 이광백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