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주민 삶 ‘곱사등이’ 비유한 체제비판 시 썼다가 처벌”

진행 : 안녕하십니까. 이광백입니다. 2015년 유엔은 대한민국 서울에 인권사무소를 설치해 북한의 인권상황을 감시하고 피해자들의 증언을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 정부도 2016년 말 탈북민들의 증언을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록은 통일 후 인권 책임자들을 처벌하는 결정적인 법적 근거가 될 것입니다.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고 어떤 인권문제가 있는지 이야기해 봅니다. 지금도 북한에서 인권침해를 지속하고 있는 가해자들이 인권침해 행위를 중단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작가란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이를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작가에게 표현의 자유는 대단히 중요하고 최대한 보장받아야 하는 것인데요. 오늘 북한에서 작가로 활동하다가 자신의 솔직한 생각을 적어둔 짧은 글 때문에 보위부에서 3년간 수감생활을 했던 도명학 선생님 모시고 이야기 듣도록 하겠습니다.

– 안녕하세요, 일단 선생님은 언제쯤 탈북 하셔서 한국에 오신 건가요?

2006년에 탈북해서 그 해 들어왔어요. 한 11년 됐죠.

– 북한에서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

북한에서는 작가로, 시인으로 활동했어요. 기본적으로는 항상 글을 썼죠. 글은 15살 때부터 쓰기 시작해서 정식 작가동맹에 소속된 것은 1996년부터이고 2004년까지 활동했습니다.

– ‘조선작가동맹’ 이렇게 되는 거군요, 그러면 작가동맹의 소속 작가는 얼마나 되나요?

북한에 제일 많았을 때가 3600명 정도가 됐어요. 그 이후에 작가가 줄었어요. 문학을 하겠다는 사람이 없어서요. 후배가 양성이 안됐죠. 2004년경 그때는 통 틀어서 1000명 정도밖에 안됐어요. 아마 지금은 더 줄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사실상 조선 문학은 끝났다. 이렇게 작가들이 암암리에 얘기를 했죠.

– 선생님은 작가동맹에서 활동을 하시면서 주로 어떤 글을 쓰셨나요?

체제를 찬양하고 청년들과 군인들 주민들이 체제에 충성을 하도록 자극을 하는 그런 내용의 글을 썼죠. 김씨 가문 우상화도 쓰고요. 대게 그런 거예요. 순수한 인간 생활을 형상화하는 작품은 있기도 하지만, 그런 글을 써도 잘 평가를 못 받죠.

– 최고지도자나 김부자를 찬양하는 내용이군요.

네, 그런 글을 써야 평가를 높이 받죠.

– 그런데 선생님은 거기에 써 둔 원고가 발각돼서 보위부 감옥에 갔다는 건데요. 어떤 내용의 글이기에 문제가 됐을지 궁금합니다.

시가 두 편이었어요. 하나는 북한 주민들의 아주 어려운 삶 그리고 자유가 박탈되고 반항도 할 줄 모르는 모습을 철도역에 장사 짐을 든 승객들에 비유했죠. 그들의 짐이 생존의 짐보다 그 위에 내리누르는 권력의, 체제의 짐이 더 무거운 느낌이었어요. 그렇다고 해도 반항도 할 수 없고 영원히 구부러진 상태로 살 수밖에 없는 그들로 온 북한 땅이 가득 찼다. 제목 자체를 ‘곱사등이들의 나라’라고 지었죠.

– 오르내리는 수많은 사람들의 등에 짐을 진 모습을 통해서 북한 체제의 무거운 짐 때문에 곱사처럼 살고 있는 인민들을 형상한 시였군요.

(또 다른) 하나는 이제 풍자신데, 경제사정이 어려워(제대로 먹질 못해) 북한군이 병력 수를 충당할 수가 없으니까 신체검사 기준에 맞는 청년들을 군이 데려갈 수가 없는 거예요. 키가 작거나 아니면 몸무게가 모자르거나 아니면 병이 있기 때문이죠. 병력 수를 충당하려면 신체검사 기준을 당연히 낮출 수밖에 없는데 그러다보니까 나중에 낮추다 낮추다 눈이 한쪽이 없는 외눈박이도 군대를 보낸다는 지시가 있었어요.

– 원래 기준으론 안 되는 거였나요?

원래 북한은 안경만 써도 군대를 못가거든요. 두 눈 다 있어도 말이죠. 근데 안경 정도가 아니라, 아예 한 쪽 눈 없는 사람도 입대한다는 거죠. 그게 무슨 소린가 하고 신기하게 생각을 했어요. 들어보니까 참 웃긴 게, 눈 두 개 중에서 왼쪽 눈 없고 오른쪽 눈만 있으면 총을 쏘는 데는 무리가 없다는 주장이에요. 그래서 외눈박이도 입대를 하는 진풍경이 벌어진 거예요. 풍자가 나올 수밖에 없는 거죠. 그래서 그거를 풍자하는 걸 하나 썼죠. 물론 두 시가 발표할 수 있는 사회가 아니지만, 그걸 가지고 대리만족을 느꼈다고 볼까요? 그저 나 혼자 들여다보면서, 끄적거리면서 위안을 삼는 거죠.

– 그 두 번째 시의 제목은 뭐였나요?

두 번째 시는 말 그대로 ‘외눈도 합격’이었어요.

– ‘곱사등이들의 나라’, ‘ 외눈도 합격’ 이 두 편의 시가 발각이 돼서 감옥살이를 했는데 궁금한 점은 자신만 보려고 쓴 시들인데 어떻게 남에게 발각된 건가요?

제 친구한테 보여줬어요. 아주 가까운, 너무 가까워서 김정일도 막 비판하는 얘기를 주고받는 친구요. 시를 나 혼자만 보고 위로 받는 것도 그렇지만 같이 읽어보는 사람 하나 더 있으면 더 위로 받을 거라고 생각해서 보여줬는데 훗날에 알고 보니까 그 친구가 보위부의 밀정이었어요. 그 친구가 밀정일 줄은 몰랐죠. 그 친구가 사진작가였는데 사진기를 늘 차고 다니니까 제 시의 사진을 찍어버린 거예요. 사진은 증거자료잖아요. 그걸 보위부로 제출하고 나눈 이야기도 다 전해진 거죠.

– 그러면 어느 날 보위부에서 출석 요구를 하던가요? 아니면 집으로 들이닥치던가요?

집에 들이닥친 게 아니고 아마 다 계획을 짠 거 같아요. 하루는 그 친구하고 만나서 술 마시고 헤어졌어요. 다음에 어디를 갔다가 그 날 돌아오는 걸로 아니면 하루자고 오자는 얘기를 주로 했어요. 다음 날 아침에 어디서 만나자 이렇게 약속을 한 상탠데, 제가 새벽에 좀 일찍 일어나거든요. 일어나서 산책을 하거나 식구들은 아직 자고 제가 제일 먼저 깨니까요. 그런데 승용차가 와서 무조건 쳐 넣고 갔어요. 그때는 왜 그런지도 몰랐죠. 회사에서 평양까지 압송을 했어요. 저는 그렇게 중범죄로 잡힌 건지도 모르고 양강도 보위부에 갔다가도 내가 금방 풀리겠구나 했어요.

– 그럼 조사는 얼마나 받으신 건가요?

국가보위부 조사가 한 3~4개월 갔어요. 초보적으로 된 다음에 내가 양강도 사람이니까 양강도 보위부에다가 위임하는 거죠. 그 다음에 지금까지 조사된 자료를 바탕으로 캐내는 거죠. 그런데 그게 더 오래 걸려요. 1차 조사를 3~4개월 받았고 예심을 2년 정도 받았어요. 원래 6개월 하게 돼 있는데, 연장을 하고 연장을 하고 세 번인가 연장을 했어요.

– 그 때 결과적으로 조사 끝에 어떤 죄가 확정된 건가요?

그 때는 59조, 61조, 62조의 형법에 걸렸다고 했어요. 59조는 반동 단체 조직죄에 들어갔다는 거예요. 61조가 반동선전죄였어요. 시와 내가 발언을 했던 것이 반동선전죄죠. 62조가 조국반역죄예요. 외국에 국가기밀이 되는 것을 팔아 넘겨줬다거나 미국을 비롯한 교전 상대국에 도주했을 때 받는 죄목이죠.

– 그런데 선생님은 왜 그 죄를 적용받은 거죠?

그게 도주는 안했지만, 제가 밀정하고 친하다 보니까 또 그 친구와 아무 말이나 다하다 보니까 “이 체제는 가라앉는 배와 같다 이남으로 가자”라고 했어요.

– 그런 말을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했던 거군요?

아니에요. 진짜로 했어요. 그래서 계획까지 짰던 거죠. 그러니까 조국 반역죄에 추가됐던 거예요. 세 가지를 조사 받는데 결과적으로는 59조 반동단체 조직죄는  그날에 다 얘기를 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조국 반역죄도 조금 약했죠. 실행에 들어가기 전이기 때문예요. 가장 벗어나기 힘든 게 반동선전죄였어요. 물질적 증거가 있기 때문이죠.

– 형을 어떻게 받았나요?

형을 안 받았죠. 미제로 끝났어요. 결과적으로 ‘죄는 밀정이 다 조직하고 유도하고 부풀리고 꾸미고 죄를 지게끔 만들고 모든 것은 밀정이 자신의 공적을 세우기 위해서 의도된 기획 작품이었다’ 라는 결론이 나오더라고요. 

– 조사는 3년 가까운 시간 받았는데, 결론은 선생님은 일단 죄가 가벼워지고 원래 신고를 했던 그 밀정의 역할을 한 친구한테 (보위부가) 죄를 뒤집어씌운 셈이군요. 왜 그런 일이 벌어진 건가요?

사건이 너무 길게 가니까요. 사건을 빨리 종결해야 보위부원들도 편한데 너무 길게 가서 그런 거죠.

–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은 시를 썼다는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말한 이유로 3년이란 긴 시간을 감옥에서 보냈군요. 북한 헌법 제68조를 보면 표현의 자유를 규정하고 있더라고요. 혹시 북한에 있을 때 그 조항을 알고 계셨나요?

북한에 있을 때 헌법도 배우는데, 법치국가가 아니다 보니 사람들이 기억을 안 하고 있어요. 저 같은 경우는 체제를 해부해 보려고 한 거죠. 북한 헌법에도 다른 민주국가에 있는 기본적인 조항들은 다 있어요. 언론의 자유, 출판·결사·종교의 자유는 다 있거든요. 근데 그게 그냥 종잇장 위에 있을 뿐이니까 위선일 뿐이죠.

– 지금은 한국에 와서 ‘북한망명펜센터’에서 작가활동을 하시는데 원하는 글을 마음껏 쓰고 있는 중이죠?

남쪽에 와서는 민주주의니까 쓰고 싶은 글을 다 쓰죠. 대통령도 욕하고 잘못하면 대통령도 감옥에 가는 데요 뭘, 북한과 비교자체가 안 되는 거죠. 북한하고 비교를 하려면 대한민국하고 비교를 하면 안 되고 공산주의인 중국과 비교할 수 있죠. 그런데 중국 정도만 해도 얼마나 부러웠는지 몰라요. 중국만큼의 자유만 있어도 한숨에 나가겠다, 그런 정도였죠.
 
– 여기 와서 북한에서 작가생활 했을 때의 자신의 생각을 마음껏 글로 펼치지 못한, 그 때를 회상하신다면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지금 이제는 10년 됐으니까, 거기서 과연 그렇게까지 자유가 없었던가? 이런 생각이 가끔 들어요. 내가 지금 여기 와서 오래 살다 보니까 북한에 대한 기억을 좀 잃어버렸나, 정말로 그렇게까지 못 살 세상이었던가, 믿기지가 않아요. 내가 거기 살다온 사람이어도 오래되다 보니까 이런 생각이 드는데 기존의 남한이란 민주국가에서 오래 산 사람은 북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게 믿기지 않을 거고 그게 이해됩니다.

지금까지 북한에서 조선작가동맹 양강도 위원회 소속작가로 활동하면서 시를 잘 못 썼다는 이유로 3년간 감옥에서 고생을 하셨던 도명학 선생님 모시고 말씀 나눴습니다. 오늘 증언 감사합니다.

북한에서 자신의 솔직한 생각을 적어둔 짧은 글 때문에 보위부에서 3년간 수감해야 했던 도명학씨의 증언 들어봤습니다. 이에 관한 전문가의 인권법적 의견을 들어보는 시간입니다. 한국외국어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조정현 교수 전화연결돼 있습니다.

교수님 안녕하세요? 도명학씨의 오늘 증언을 통해, 어떤 인권법적 문제를 이야기해 볼 수 있을까요?

오늘 관련되는 인권인 표현의 자유라는 것은 간섭받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가지고 또 이를 표현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하는데요, 민주주의에서 불가결한 요소이고 한 인간의 완전한 발전에 있어서도 필수조건이기 때문에, 모든 권리 중에서도 가장 기본이 되는 권리의 하나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북한 역시 사회주의헌법 제67조에서 이를 보장하고 있고, 북한이 당사국인 자유권규약 제19조에도 이를 분명히 명시하고 있습니다. 물론 자유권규약 제19조 3항에 따르면 타인의 권리 존중을 위해서, 또 국가안보나 공공질서를 위해 사전에 법률로 규정된 범위에 한해 표현의 자유는 일부 제한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그 본질적인 내용이 침해되어서는 안될 것이고 그 제한이 과도해서도 안될 것입니다.

도명학씨의 경우, 정식 출판되지도 않은 작은 메모의 내용을 가지고 정식 사법절차도 없이 3년이나 되는 긴 기간동안 보위부에 끌려가 수감되었다는 사실은, 우선 관련되는 근거 법률 없이 자의적으로 실시되었을 가능성도 있어 보이구요, 설사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국내 법률에 근거해 그러한 처벌행위를 했다 하더라도 이는 정당한 권리제한의 범위를 훨씬 뛰어 넘는 것으로 국제기준에서는 용납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바대로 북한 내에서 표현의 자유, 특히 정치적인 사안에 대한 표현의 자유는 사실상 없는 것으로 봐도 무방할 것 같고요. 이번 도명학씨 사례가 그 구체적인 예를 제시해 준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북한에서 침해받고 있는 신념 및 표현의 자유에 관한 전문가 의견 들어봤습니다. 조정현 교수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