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연평해전’ 자랑스런 승전으로 기억됐으면…”

▲ 인천 연수구 지역의 한 교회에서 주최한 강연회에 앞서 고 한상국 중사 부인 김종선씨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데일리NK

지난 2005년 4월 일간지 신문 한 귀퉁이에 실린 기사가 국민들을 씁쓸하게 만들었다.

‘제2연평해전’ 당시 전사한 한상국 중사의 부인 김종선 씨가 전사자들에 대한 정부의 무관심과 냉대를 참지 못하고 홀연단신 미국으로 떠났다는 기사였다.

당시 김 씨는 “나라 위해 간 분을 홀대하는 것은 (나라가) 썩은 것 아니냐”는 말을 남기고 한국을 떠났다. 꼬박 3년의 시간이 흐른 뒤 김씨는 남편을 잃은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친정 어머니의 몸이 편찮았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지만,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후 ‘제2연평해전’에 대한 국가 차원의 예우가 달라진 점도 그녀가 흔들린 이유 중 하나였다.

최근 인천 연수구의 한 교회가 주최한 ‘나라사랑’ 강연회에 참석한 김 씨와 만났다. 남편 한상국 전사에 대한 기억을 묻는 질문에는 아직도 힘들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픈 것(기억)을 꺼 내 놓는 일이 힘들다”며 “너무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었고, 재미있는 사람이었다”고 답한 뒤 말문을 닫았다.

그녀는 3년 전 홀연히 미국으로 떠난 이유에 대해 “국가를 위해 싸우다 돌아가신 분들에 대한 국가의 형편없는 대접에 분노했기 때문”이라며 “’이건 아니다’, ‘잘못됐다’고 바꿔달라고 외쳐봐도 돌아오는 것은 인터넷 악성 댓글 뿐이었다”고 털어놨다.

“(현실을) 피해 숨어버린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당시 나는 반은 미쳐있는 상태였다”며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나를 이기고 싶어서였다”고 당시의 절박했던 심정을 설명했다.

그러나 도망치다시피 떠난 미국 생활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미국으로 간 처음 3개월은 매일 같이 혼자 울어야 했다. 네일아트(손톱미용) 일을 하다가 가게 문을 닫게 된 후, 빌딩 청소, 미용실, 슈퍼마켓 등에서 일하며 힘든 생활을 했다.”

김 씨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전사자들을 기억하려고 노력하는 미국 정부의 모습에 놀라움과 함께 씁쓸함을 느꼈다. “마을의 입구 또는 공원 등에 남북전쟁이나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당시의 전사자들을 위한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성조기를 걸어놓고 그들을 추모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한국에 다시 돌아온 이후에는 우리 국민들의 안보의식을 높이는 일을 위해 무엇인가 해보고 싶다는 욕심도 생겼다. 오늘 진행하는 강연을 통해서도 청소년들에게 제2연평해전의 의미에 대해 설명할 예정이라고 한다.

“강한 나라가 된다는 것은 높은 경제력, 강력한 국방력 등을 얘기할 수도 있겠지만, 국민들의 의식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됐다”며 “군인들을 향해 ‘네가 나라를 지켜 그럴 수 있었다’고 격려해주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 지역주민과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강연 모습 ⓒ데일리NK

김 씨는 또한 “늦게나마 ‘제2연평해전’ 전사자 추모식이 국가행사로 격상된 점은 너무나 다행스러운 일”이라며 “그동안 묵인됐던 죽음에 대한 올바른 평가가 되는 시발점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제2연평해전’에 대한 평가에 대해서는 “북한의 도발에도 선전대응을 할 수 없다는 김대중 정부의 교전수칙에도 불구하고, 북측의 선제공격에 끝까지 함포를 놓지 않고 적에게 치명타를 입힌 전투였다”며 “‘제2연평해전’은 손과 발이 묶인 상태에서 싸운 승전(勝戰)이다”고 강조했다

“지난 4일 현충일을 기념해 이명박 대통령과 만났을 때 ‘기념식 때 꼭 와달라’고 부탁드렸고 (이명박 대통령께서) 고개를 끄덕여 주셨다”며 “참석하실 수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와주신다면 70만 대군의 등을 토닥거려 주시는 일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제2연평해전’은 2002년 6월29일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침범한 북한 경비정이 우리 해군 고속정에 선제공격을 하면서 일어났다. 교전 과정에서 고속정장인 윤영하 소령과 한상국, 조천형, 황도현, 서후원 중사, 박동혁 병장 등 6명이 전사했고 고속정은 침몰했다.

이명박 정부는 과거 정권에서 이들에 대한 예우가 부족하다고 판단, 지난 4월 ‘서해교전’의 명칭을 국가차원의 전쟁을 의미하는 ‘제2연평해전’으로 바꿨으며 매년 6월30일 해군 2함대 주관으로 치르던 추모행사도 국가보훈처 주관으로 격상했다.

[다음은 고(故) 한상국 중사 부인 김종선씨와의 인터뷰 전문]

-3년 전 홀연 미국으로 떠났다. 그때의 심정은 어땠는가?

“(제2연평해전에서) 국가를 위해 싸우다 돌아가신 분들에 대한 국가의 형편없는 대접에 분노했다. 당시 ‘이건 아니다’, ‘잘못됐다’고 바꿔달라고 외쳐봐도 돌아오는 것은 공허한 메아리뿐이었다. 아니, ‘그만하라’는 얘기와 인터넷 악성 댓글이었다.

이런 일들로 우울증, 조울증에 걸려 집 밖 문도 나서지 못했다. 일도 안하고 집 안에만 있는 것도 너무 힘들었다. 죽으려고도 몇 차례 몸부림쳤다. 하지만, 이 상태로 죽는 것은 그 사람(고 한상국 중사)이 원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 가족들이 원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됐다.

내가 (미국행을 선택한 것이 현실을) 피해 간 것인지도, 숨어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당시 나는 내가 아니었고 반은 미쳐있었다. 사회의 한 일원이 되어 생활하고 싶었고, 또, 피해의식에 사로 잡혀 있는 나를 이기고 싶어서였다. 이대로 한국에 있다가는 (죽고 싶다는) 안 좋은 생각만 들것 같아 내가 살기위해 미국행을 택했고, (미국에) 나가서 더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도 했다.”

-미국에서의 생활은 어땠나?

“3년 동안 뉴욕에 있었다. 네일아트(손톱미용) 일을 하다가 가게 문을 닫게 된 후, 빌딩 청소, 식당, 미용가게, 슈퍼마켓 등에서 일하면서 힘들 생활을 했다. 불법 체류자 신분으로 있으면서 미국 TV의 뉴스를 보며 공부도 했다.

미국으로 간 처음 3개월은 매일 같이 울면서 누구의 도움 없이 생활을 꾸려갔다.

어머니가 아프시다는 소식을 듣고 걱정이 돼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이 되면서도 ‘내가 한국에 돌아가면 견딜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잠을 못자고 고민을 많이 했다. 결국 자식 된 도리로 부모님께 가까이에서 얼굴을 보이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한국으로 돌아오겠다는 결심을 했다.”

-제2연평해전을 승전(勝戰)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했는데

“1999년 제1연평해전에 대한 승전비를 9년만인 최근 세웠는데, 늦었지만 너무 보기 좋았다. 그런데 제2연평해전에 대해서는 해군뿐 아니라, 국방부에서도 패전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는 것 같다. 배가 침몰했다는 것에 큰 의미를 둬서 그런 것 같다.

하지만 군에 계신 분들과 가족들의 평가는 다르다. 2002년 당시 우리 측은 6명 전사, 18명 부상(북한측 30여명 사상, 함정 1척 반파) 이었는데, 어쩌면 이는 최선의 결과다. NLL를 침범한 북한군 선박에 경고방송, 밀어내기만 할 수 있고, 선제대응(공격은 )할 수 없다는 교전수칙은 어느 나라에도 없다. 손, 발 묶인 상태에서 싸웠음에도 이런 결과를 내 올 수 있었던 것은 승전으로 평가해야 한다.”

-참수리 357호를 서울 전쟁기념관으로 이전하는 문제가 대두 된 적이 있었다

“일단 가족들은 일반 관람객들에게 공개 되었을 때 함정이 훼손될 수 있다는 이유로 평택 해군2함대에 그냥 두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하지만 여전히 접근성과 관리에 있어 문제가 남아있다. 모 영화사에서 NLL 영토문제를 주제로 다큐를 제작하고 싶다며 국방부와 해군 측에 참수리 357호에 대한 촬영을 요청했는데, 군 관계자로부터 ‘실리가 있는 문제라 공개하지 못했다’는 엉뚱한 답변을 들었던 적도 있었다고 한다. 또 함대는 군부대 안에 있어서 사전에 신청해 허락을 받아야만 관람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이런 문제를 보더라도 얼마나 접근이 어려운지 알 수 있다. 지금은 나름대로 관리가 되고 있지만, 배가 뒤 틀리는 일도 있었고, 페인트가 벗겨지는 문제, 관람객들의 쓰레기 문제 등 여타의 문제들도 있다.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서울 전쟁기념박물관으로 옮기고, 전문가들의 관리하에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하면 좋겠다. 전투를 준비하는 군인이 함정을 관리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은 군 입장에서도 전략 손실이 아닌가?”

▲ ‘제2연평해전 전사자 추모본부’에서 준비한 사진을 보고 있는 청소년들 ⓒ데일리NK

-6년이란 시간이 김종선씨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다 줬는가?

“강한 나라가 된다는 것은 높은 경제력, 강력한 국방력 등을 얘기할 수도 있겠지만, 국민들의 의식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는 누구나 가족, 친지 중 한 사람 정도는 군인인 경우가 있을 텐데 군대와 군인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다.

오히려 군대에 가면 불쌍히 여기는 사회 분위기다. 또 군바리란 표현으로 군인을 격하시키기도 한다. 2년이라는 군복무 기간 동안 아무런 일도 발생하지 않은 것에 대해 ‘네가 나라를 지켜 그럴 수 있었다’고 격려해주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미국에서 놀랐던 것은 마을 입구 또는 마을 공원, 아파트의 경우까지 남북전쟁,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등에서 돌아가신 분들을 위한 기념비를 세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큰 성조기를 걸고 놓고 그들을 추모하는 모습이었다.”

-이번 6주년 추모기념식은 어느 때보다 특별할 것 같다

“늦게나마 제2연평해전 전사자 추모식이 국가행사로 격상된 점은 너무나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동안 묵인됐던 죽음에 대한 올바른 평가가 되는 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4일 가족들과 현충일을 기념해 이명박 대통령과 만났을 때 ‘기념식 때 꼭 와달라’고 부탁 말씀드렸다. (이명박 대통령께서) 고개를 끄덕여 주셨다. 참석하실 수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와주신다면 70만 대군의 등을 토닥거려 주시는 일이 될 것이다.”

-앞으로의 바람이 있다면

“나라를 지키다 부상당한 분들이 아직 보훈병원에서 생활하면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겪고 계시다. 나라를 위해 싸우다가 장애를 안고 전역한 분들에 대해선 최소한 치료문제와 생계문제는 해결해 줘야 한다.

제2연평해전 부상자들도 자비로 치료를 받고 생활하고 있는 상황이다. 또, (제2연평해전) 부상자에 대한 국가유공자 심사가 몇 차례 반려되었는데, 이 분들에 대한 평가와 심사가 잘 돼서 혜택을 받았으면 좋겠다.

또, 앞으로 청소년들에게 제2연평해전에 대한 얘기를 들려주고 싶다. 오늘도 강연회에 참석한 청소년들도 아마 연평해전이란 단어가 생소할 것이다. 국민들이 모르는 일을 지금 청소년이 알리 만무할 것 같다. 이들에게 사실 그대로를 얘기하고,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그들이 판단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 앞으로도 이런 기회(강연회)가 있다면 청소년들과 만나 얘기 나누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