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보위원 하나가 나와 남편에게 찾아와 ‘이제부터 내가 당신들 담당이오’ 라는 말을 했어요. 기가 찼죠. 내 담당은 나 자신인데 누군가가 나를 담당한다니….”
‘인간이고 싶다’의 저자 김혜숙 씨는 데일리NK와 인터뷰에서 북한 국방과학연구원에서 핵개발을 담당했던 그의 남편이 사고로 핵개발 사업에서 제외된 어느 날 그들 부부에게 보위원이 찾아 왔던 당시 상황을 회고하며 이같이 말했다.
김 씨는 “대외적으로 ‘미제와 남조선은 우리에게 있지도 않은 핵을 있다고 하며 위협한다’고 했었던 당시 북한에게 있어 핵 개발 자체는 일급비밀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입막음’을 위한 감시였다는 증언이었다.
1980년대 초부터 핵개발에 참여했던 김 씨의 남편은 불의의 사고로 방사능에 노출돼 더 이상 핵개발 사업에 참여할 수 없게 됐다.
김 씨의 남편은 사고 직후 고위 인사들만 입원할 수 있는 평양 봉화진료소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6개월 간 약을 지급 받고 계란, 영양제, 고기 등을 매달 지급 받는 것 외에 특별한 치료는 없었다고 김 씨는 회고했다.
그의 남편은 사고 이후 간에 심각한 손상을 입었고, 치아도 모두 빠져 틀니를 했다. “미남 중의 미남이었던 남편이 하루아침에 할아버지가 되었다”고 김 씨는 말했다. 그의 남편은 환각에 시달렸고, 매일 밤 공포에 몸을 떨었다. 누워있는 시간이 많아 등과 엉덩이엔 욕창이 생기기도 했다.
북한에선 핵개발 등 ‘비밀’에 관여한 사람들에게 “비밀이 유출되면 모든 책임을 전적으로 진다”는 서약을 하게 된다고 김 씨는 증언했다. 남편의 사고 직후 김 씨와 그의 남편에게 감시가 붙은 것은 당연했다.
담당 보위원들은 수시로 김 씨의 집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김 씨는 “누군가에게 감시 받는 기분은 겪어보지 못하면 모를 것”이라며 당시의 불안감을 털어놨다. “결국 남편은 (사고 이후 보위부의 감시에) 정신분열 증상까지 보이며 항상 불안과 공포에 떨었다”고 말했다.
보위부원들의 감시가 계속되면서 남편의 건강은 갈수록 악화됐다. 김 씨에겐 힘든 나날의 연속이었다. 김 씨는 결국 ‘고난의 행군’ 막바지인 1998년 탈북을 선택했다. 그러나 김 씨의 ‘자유’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김 씨는 2003년 중국 공안에 체포돼 북송됐다. 이후 2006년까지 3년 동안 국가안전보위부(보위부)의 교화소(교도소)에 갇혀 지내며 ‘성적 학대’를 비롯한 물리적 폭력에 직면했다.
그는 “북한 수용소에서는 옷을 다 벗기고 몸의 구멍은 모두 검사한다”며 “벌리고 손까지 집어넣는 것은 북한 모든 수용소에서 벌어지는 기본적인 검사 절차”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갖은 구타 등 폭력에 시달리다 풀려날 당시 몸무게가 25kg이었다고 김 씨는 말했다.
“수용소에서도 송장 치르기는 싫어서 그랬는지 나를 풀어주고 가족들에게 연락해 데려가게 했다.”
집으로 돌아온 김 씨에겐 다시 감시가 붙었다. 인민반장을 비롯해 보위원들의 눈길은 어디든지 따라다녔고, 때론 친하지도 않았던 마을사람들이 ‘위로’를 명분삼아 감시했다.
계속된 북한 당국의 감시로 결국 김 씨는 북한이 제1차 핵실험을 한 직후인 2007년 다시 탈북을 결행하여 같은 해 남한에 입국했다. “계속된 감시에 따른 불안감과 사람들을 비인간적으로 취급 하는 북한이라는 사회에서 벗어나고 싶어 다시 탈북을 결심하게 됐다”고 말했다.
지난해 11월 출간된 김혜숙씨의 ‘인간이고싶다’ |
이 책은 저자 김 씨의 탈북과정을 비롯해 교화소 내부에서 이뤄지고 있는 갖가지 인권유린 등을 경험을 토대로 고발하고 있는 자전적 소설이다. 김 씨는 “21세기 북한에서 일어나는 ‘비인간적인’ 일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인터뷰 말미에 김 씨는 “여유가 생긴다면 헐벗은 북한 주민들을 위해 신발과 옷 등을 보내주고 싶다”며 소박한 꿈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