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서 국군포로는 일잘하는 짐승이었을 뿐”

팔순이 훨씬 넘는 노병(老兵)은 오늘도 북에 두고 온 혈육들에 대한 걱정으로 밤잠을 설친다.


국군포로 박준길 씨.(가명 86세) 1949년 2사단 16연대에 입대, 1950년 강원도 횡성전투에서 중공군에게 포로로 잡혀 2000년 탈북에 성공하기까지 꼬박 50년을 북한에서 숨죽이고 살았다. 지금도 북쪽 가족들의 신변 위협 때문에 본인의 이름 석자 마음대로 입에 담지 못한다.


박 씨의 고향은 충청북도 청주다. 17살 되는 해에 이웃 마을 어머니 친구 딸에게 장가들었다. 맞선도 없이 사주팔자를 예비 신부의 집에 보내면 신부 집에서 결혼식 날짜를 정하던 시절이었다. 결혼식 날짜를 잡았으나 당장 식 올릴 돈이 없어 머슴살이를 시작했다. 가을에 쌀 25말을 벌었고 그걸 팔아 결혼식을 올렸다. 코흘리개 아이들도 “일꾼, 밥 먹어”라며 무시하던 시절 그는 소처럼 일만 했다.


“북한에 살면서 그 시절 생각을 많이 했지.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이도 부지런히 일해서 ‘머슴살이’를 벗어나 번듯이 가정을 꾸릴 수 있었거든. 북한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지.”


한국에 입국한 후 50년만에 그 부인과 다시 만났다. 세월이 만든 주름의 골은 깊었으나 그시절 순수하고 깨끗했던 첫사랑 기억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북한에서 생활하는 동안 늘 못견디게 파고들었던 그리운 모습이었다.


머슴살이 벗어나기 위해 국군에 입대 


일제는 물러났고 해방은 됐지만, 세상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38선이 생겨났고 남과 북의 대립이 갈수록 치열해졌다. 가난한 농사꾼 신세를 면해 보려고 박 씨는 1949년 한국군 2사단 16연대에 자원 입대했다.


당시 박헌영이 주도하던 남한내 좌익운동 때문에 정세는 매우 복잡했다. 군인이 된 그는 매일같이 좌익 빨치산 토벌에 나가야 했다.


“그 때 좌익들은 항상 삐라를 내돌리며 사회주의 공산주의 선전을 하고 다녔어. 1949년 부터 좌익 세력에 대한 단속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는데, 그때부터 좌익들은 지하로 숨거나 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됐지.”


빨치산들은 가끔씩 산에서 내려와 정부 인사들에 대한 테러와 부자집에 대한 약탈을 자행했다. 그들은 주로 태백산, 지리산, 한라산, 멸악산 등 깊은 산중에 은신처를 만들었다.


박 씨는 6.25 전쟁 발발 당시 휴가를 받고 집에 와 있었다. 박 씨가 속해있던 2사단은 그해 6월 병사들에 대한 휴가조치를 내렸다. 집이 먼곳에 있는 병사들과 가까운 병사들을 섞어 조를 편성했고, 집이 가까운 병사들부터 휴가가 시작됐다.


전쟁이 터지자 당장 복귀 명령이 떨어졌다. 26일 부대에 도착해보니 아직 복귀하지 않은 병사들이 많았다.


이 때를 기억하는 박 씨는 포로가 되어 북한 강동 포로수용소에서 있을 당시 시간 날 때마다 동료들에게 “6.25전쟁은 북한의 침략으로 시작됐다”고 설명했다.


“6.25전쟁은 남한이 일으킨게 아니야, 남한이 먼저 침략하려고 했다면 왜 2사단 병사들 모두 휴가를 보냈겠나?”


포로수용소 안에서 그의 언행은 곧 북한 당국에도 포착됐다. 그의 말 실수(?)는 다른 포로들보다 더 고생스러운 생활로 그를 내몰았다.


중공군에게 밀리다 포로로 붙잡혀

1950년 12월 12일 강원도 횡성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이어지고 있었다. 중공군은 횡성의 깊은 산 협곡으로 국군을 유인해 앞과 뒤, 양쪽 고지에서 공격나팔 소리를 내며 포위망을 좁혀왔다.


쥐죽은 듯 조용하던 산길을 전진하던 국군은 산 능선에 매복하고 있던 중공군에 포위 당하고 말았다.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퇴로를 찾았으나 화력도, 병력도 모두 밀렸다. 이 때 박 씨는 송원성 2사단장과 함께 포로로 잡혔다.


“어디가 어딘지 몰랐어. 우리가 밀고 올라갈 땐 북한 평안남도 양덕, 맹산까지 올라간 적 있지. 밀려 내려올 땐 또 정신 없이 밀렸어. 중공군과 북한군은 낮에는 보이지 않고 밤에만 갑자기 쳐들어 왔어. 병영에서 자고 있는데 따발총으로 뚜루륵 갈겨 놓구선 빠지곤 했지. 그래서 야간에도 마음 편히 잠을 못잤지.”


중공군에 포로 된 국군포로들은 북한군에 넘겨졌고 평안남도 강동 포로수용소에 수감됐다. 박 씨는 한때 동료 5명과 탈출을 시도했다가 20일 동안 혹독한 징벌을 받기도 했다. 탈출을 준비하던 동료 중 한명이 북한 측에 밀고한 것이었다.


“그때는 전시 상황이니까 정식으로 영창같은건 없었고 헛간 같은데 가둬 넣고 굶어 죽지 않을 만큼만 밥을 줬어. 한번은 누군가가 몰래 누룽지 같은 걸 던져줘서 5명이 나눠 먹기도 했지. 감시도 심하고 배고픔도 심했지만 그래도 포로들 사이에서 인정은 있었던 것 같아.”   


박 씨와 함께 포로 생활을 하던 동료 중에 서울 중앙대학교를 다니다가 군에 입대한 사람이 있었다. 박 씨는 그에게 매일 밤 한국사 강의를 들었다. 햇빛 한 점 들지 않는 차디찬 창고 바닥에서 유일한 낙이었다. 당시 영양부족과 바닥 냉기로 인해 손이 오그라 들어 펴지지 않게 됐다. 박 씨는 그때 후유증으로 지금까지 수전증을 겪고 있다.


“그때 강동수용소에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최소 400~500명의 국군포로가 있었어. 국군 포로들은 그저 말을 알아듣고 시키는 일 잘하는 짐승이었을 뿐 아무런 권리가 없었어. 그놈들은 눈에 불을 켜고 감시만 했지”


정전이 되기 전까지 강동 수용소 포로들은 대대, 분대단위로 편제돼 폭격으로 끊어진 도로를 연결하거나 전선에 보내는 물자 운송에 동원됐다. 북한은 미군의 공중 폭격을 의식해 낮에는 숨어 있게 하고 밤에만 일을 시켰다.


“북한에서는 포로 교환 이야기 조차 해주지 않았어. 남한으로 돌려보낸다는 말도 없었고, 고향으로 가고 싶냐는 의향도 물은 적이 없어.”


“저놈 국군포로니 감시 똑바로 하라”

국군포로는 북한의 출신성분 분류에서 가장 낮은 등급이었다. 온전히 자기 집 한칸을 가져 볼 수도 없었다. 단칸방 하나도 국가 소유 주택이기 때문에 언제 쫒겨날지 모른다. 북한에서 박 씨가 만난 여성도 출신성분이 열악했다. 두 사람다 출신성분이 나쁘니 결혼식도 올리지 못하고 살림을 시작했다.


정전후 평양시 교외 시멘트 공장에서 일하던 박 씨는 어느날 갑자기 함경북도로 쫒겨갔다. 하룻밤 새 철도 선로 보수공으로 내몰렸다. 새 직장에 출근하고 보니 철도 선로반 반장이 “저놈은 국군포로니 감시 똑바로 하라”면서 으름장부터 놨다. 홧김에 반장과 주먹다짐까지 갔다. 


선로 보수공으로 자리를 잡았다 싶어 직장 지배인을 찾아가 근처에 있는 전문학교 입학을 부탁했다. “거기는 아무나 가는데가 아니다”는 싸늘한 답변이 돌아왔다. 북한에서 그는 그저 작업 도구일 뿐이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조용히 살만하면 담당 보위원이 찾아와 박 씨의 인생을 들쑤셨다. 남북간 정세가 복잡해 질 때마다 직장 보위원이 불러내 “남한에서 어떤 임무를 받고 왔나, 그동안 겪은 일과 주변 사람들의 동향에 대해 보고하라”고 닥달했다. 국가 안전보위부에 한번 다녀 오면 동네 사람들이 수근거려 얼굴을 못 들고 다닐 정도였다.   


“배가 고픈 것은 참을 수 있어. 언제든 먹을게 생겨 먹고나면 배고픈 설움은 잠시라도 잊혀지니까. 하지만 항상 감시 당하고 주위 사람들과 마음을 주고 받지 못하고 사는 것은 큰 상처가 되지. 자유가 없이 살다보니까 정신적 압박이 끊이지 않았어. 아직도 보위부에 끌려 다니며 조사 받는 꿈을 꿔. 꿈에서 깨고나면 식은 땀이 나. 늘 죄지은 마음으로 얼굴도 못 들고 제 할 말을 못하고 살았어. 미안한 마음에 자식들 눈치까지 보며 살아온 사람들이 바로 우리 국군포로들이야.”


검던 머리가 백발이 되고나자 남한의 친동생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북-중 국경에 와서 자신을 찾는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믿기지 않았다. 동생을 만나겠다는 마음 하나로 두만강을 넘었다. 길 안내를 맡았던 브로커에게 ‘한국에 입국하면 1억원을 주겠다’는 계약서까지 썼다.


우여 곡절 끝에 한국에 도착하고 보니 이미 죽은 사람으로 처리돼 있었다. 국가정보원 조사에서 자신의 군번을 대니 뜻밖에도 전사자 명단에 이름이 있었다. 그가 포로로 붙잡힌 그날 강원도 횡성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증언에 따라 이렇게 분류됐던 것이다. 


박 씨의 모친은 전사자 보훈금을 탈 때마다 “우리 큰 아들이 저 세상에 가면서 나 쓰라고 돈 주고 갔다”고 눈물을 떨구셨다고 한다. 


“난 이제 죽어도 원이 없어. 고향도 찾아보고, 한국에 와서 말년에 호사하고 있지. 더 바랄 것도 없고, 그저 빨리 통일이 되길 바랄 뿐이야. 그래서 사람답게 살지 못하고 살아가는 북한 사람들도 나처럼 낙을 보길 바랄 뿐이야. 지금 남한엔 종파가 너무 많아. 그래서 하나로 단결이 안되는 거야. 좌파들은 항상 ‘북한, 북한’ 하는데 한 석달만 북에 가서 살아보라고 해. 그래도 북한 좋다는 말을 하는지 두고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