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민 고충 같은 입장에서 이해” 상담사로 새 인생 출발

추나래(함경북도, 2007년 한국 입국)씨는 자신이 중국을 넘어 한국으로 오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고 말한다. 어려서부터 북한이 세계에서 가장 좋은 나라라고 믿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중국으로 떠나게 된 이유는 중국에 있는 친척으로부터 금전적인 도움을 받기 위해서이다. 중국에 갔을 때 추 씨는 “개밥으로 쌀알이 들어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말했다. 중국만 해도 북한과 사정이 많이 다른 것을 깨달은 것이다.  

추 씨는 북한으로 돌아와 자신이 그동안 믿었던 것이 모두 거짓이라는 것을 느끼고 다시 탈북할 것을 결심했다. 결심이 서자마자 그는 다시 중국으로 탈북을 했고 북한을 떠나 산둥성 청도에 도착한다.

중국에서의 힘든 생활

산둥성 청도에서 지인을 통해 지금의 남편을 소개받은 추 씨는 의지할 사람 하나 없는 곳에서 남편에게 의지를 많이 했다. 중국어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언어적으로 힘든 점이 많았지만 그래도 일하는것은 멈추지 않았다.

그 곳에서 한국 회사를 찾았고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한국 요리를 배워가며 일을 다녔다. 그 당시 요리를 배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회사에 있던 한식 요리책이 전부였다. 그 책을 바탕으로 시장에 나가서 비슷한 재료를 구입했고, 매일 일찍 출근해 요리를 연습해가며 일을 다녔다.

남편과 직장이 있었지만, 추 씨의 중국 생활은 힘들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북한에서 왔다는 것을 숨겨야만 했기 때문이다. 조선족으로 신분을 밝혔던 그는 가짜 신분증까지 가지고 다녔으나 중국 공안에 대한 두려움과 더불어 언어의 장벽까지 더해져 괴로움은 커져갔다.

내 나라 한국으로 오기까지

추 씨는 결국 한국으로 가기로 결심한다. 그는 주변 지인을 통해 한국으로 입국하는 데 도움이 될 브로커를 찾아다녔고 힘들게 한국으로 입국하게 된다. 중국에서 한국 드라마와 영화를 이미 많이 본 상태였기에 한국의 모습이 낯설진 않았다. 

그는 하나원을 수료하고 경기도 부천으로 집을 배정받았다. 중국의 집과 비교하면 비교적 작은 집이었으나 그는 지금도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차이를 알고 왔는데 같은 민족이라서 이런 집을 나에게 줬다는 것에 감사했다”고 말한다.

추 씨는 곧바로 일을 시작하려 했다. 집 주변을 돌아다니며 벼룩시장을 통해 일자리를 찾기도 했고, 옷 판매원으로 면접도 봤으나 채용되지 못했다. 추 씨는 “다시 연락을 준다고 해서 연락을 기다렸는데 나중에 떨어졌다는 걸 알았다”며 “그때는 속상했지만 지금은 이해가 간다”고 말했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리모컨을 만드는 회사에 입사할 수 있게 됐다. 2년간 회사를 다니며 오전 9시부터 저녁 9시 근무는 기본이고 새벽 1시까지 잔업을 하는 등 성실히 일을 해냈다.

새로운 꿈을 향해

직장생활을 통해 어느 정도 돈을 모은 추 씨는 이어 자신의 꿈인 대학교에 지원하게 된다. 비록 집에서 배우는 사이버대학교였지만 사회복지사의 꿈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도전이었다. 그는 4년 동안 사회복지학을 공부하며 새벽까지 컴퓨터를 켜놓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중간에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많았지만, 추 씨는 북한에서는 꿈도 꿀 수 없었던 대학을 40대가 넘는 다닐 수 있어 너무나 행복했다고 소감을 밝혔다.  

현재 추 씨는 한국으로 온 탈북자들이 겪는 문제를 상담해주는 상담사로 일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탈북, 정착과정에서 겪었던 힘든 경험과 교훈들을 공유하며 상담하러 온 탈북민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고 있다.

추 씨가 한국에 온 지 5년 만에 딸과 남편도 한국으로 넘어올 수 있게 됐다. 그는 딸이 오기 전까지 최대한 터를 잡아놓고 싶었다고 말하며 세 식구가 같이 살 수 있게 돼서 꿈만 같다고 전했다.

추 씨는 마지막으로 “나도 여유가 없기는 하지만 한국에서 무료로 지원을 받은 만큼 다른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생각”이라며, 앞으로도 탈북민들이나 소외된 이웃을 위해 봉사를 하겠다고 다짐했다.

※본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 지원을 받아 작성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