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납북자 단 1명이라도 해결해보라

▲ <가족회> 업무에 복귀한 지 3개월 만에 데일리엔케이와 인터뷰를 가진 이미일 회장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이하 ‘가족회’)는 지난 2001년 출범했다. 국내에서 ‘납북자’라면 6.25 전후(戰後) 납북자만이 그 대상인 것처럼 여기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6.25 전쟁기간 동안 북으로 강제 납치된 수십만의 전쟁 납북자(拉北者)와 그 가족들이 있다. 이들은 가족을 북으로 떠나 보낸 것도 부족해 50년 동안 정보기관의 감시와 연좌제 등으로 이중삼중의 고통을 받아왔다.

<가족회>는 6.25 당시 북으로 납치된 인사가 2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그 대상에는 국회의원, 공무원, 사업가 및 반공(反共) 활동 연루자 등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정부는 <가족회>가 활동에 나서기 전까지 정부 공식 문서가 없기 때문에 전쟁 납북자를 인정할 수 없다는 자세를 취했다.

<가족회> 출범 초기 3년 동안 단체를 이끌었던 이미일 회장. 그가 1년 만에 다시 6.25 납북자 생사확인과 명예회복 요구의 선두에 섰다. 그는 정부의 무관심 속에서도 지난 3년간 8만 명에 이르는 6.25 납북자 자료를 수집하고 DB까지 손수 구축한 열정의 소유자다.

과거사법 조사대상에 전쟁기간 납북자 제외

<열린우리당>은 해방 이후부터 6.25 전쟁까지의 시기에서 민간인 잡단 학살사건까지 과거사법에 포함시켰다. 그러나 6.25 전쟁기간 납북자 문제는 자료수집도 지원하지 않고 있는 상태. <가족회>는 정부와 여당의 이중적 태도에 분노하고 있다.

지난 1월부터 <가족회> 회장 업무에 복귀한 그를 만났다.

이 회장이 정부의 성실한 해결 노력을 촉구하고 있다

-정부는 지난해 (6.25)전쟁 후 납북자 문제에 대해서 남북회담에서 적극적으로 논의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6.25 전쟁기간 동안 납북된 인사들은 해결 전망이 보이는가.

2002년 9월 남북 적십자회담에서 6.25 전쟁 기간 행방불명자 문제를 해결하기로 합의했다. 김정일 위원장이 직접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김정일 위원장을 직접 만나 요구한 것이 북한의 입장을 바꿔 놓았다.

그러나 말만 합의했지 진전의 기미가 없다. 면회소가 지어지면 본격적으로 추진하자는 합의를 했는데도 북한의 응답이 없다.

-정부 반응은 어떤가

변명만 한다. 뭐든지 물꼬를 트는 것이 중요하다. 한 건이라도 해결을 해달라고 정부에 요구하고 있지만 정부는 오히려 우리가 나서면 안 된다고 입을 다문다.

북한에서 먼저 전쟁 기간 행불자 문제를 해결하자고 나섰는데 우리 정부가 북한이 싫어하니 기다려 달라고 말하는 것이 이해가 안 된다. 우리는 쌀과 돈을 보내주고 기업투자도 해주는데 생사확인 정도는 충분히 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가족회>에서 지난 3년 동안 수만 명에 이르는 납북자 명단을 발견, 데이터베이스(DB) 구축을 마무리한 것으로 알고 있다. 현재 파악된 전쟁 납북자 규모는 어느 정도인가.

2001년 가족회를 결성하고 정부에 자료 공개를 요구했지만, 정부는 ‘기록도 없는데 당신들이 무슨 납북자냐’는 반응을 보였다. 자료가 있는 전쟁 후 납북자만 ‘납북자’ 자격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 자료를 찾았다.

3년간 납북자 9만 명 명부 발굴

지난 3년 동안 우리 힘만으로 자료를 모은 것이 총 9만 명이다. 1950년 12월 공보처 통계국에서 작성한 서울시 피해자 명부를 고서 수집가로부터 직접 구입한 것을 시작으로, 국립중앙도서관과 국가기록원을 샅샅이 뒤져서 9만 명에 이르는 명부를 찾았다. 이 명부에 대한 DB 구축을 완료했다.

가족회에서 책으로 만든 납북자 명부

-이 회장은 유달리 자료 수집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는데.

우리는 막무가내로 정부에 요구하지 않는다. 철저한 자료에 기초해 납북자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처음에 정부가 우리를 홀대한 것도 자료가 없었기 때문이다. 지난 3년 동안 모아온 자료와 전쟁시 납북자 문제 관련 도서를 수집, 단체 산하에 자료실을 개원할 예정이다.

-자료실을 만드려면 상당한 자금이 필요할 텐데.

그렇게 거창한 계획은 세우고 있지 않다. 지금까지 우리가 모은 자료와 필요한 도서만 구입하면 된다. 6.25 전쟁 납북자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것이 우리의 목표다.

우리가 정부를 대신해서 납북자 명단을 수집하고 그것을 DB로 작업을 끝낸 다음에 정부 인사가 찾아와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해줘서 고맙고 미안하다’면서 DB 자료를 달라고 요구했다.

우리는 아무 조건 없이 제공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만드는 자료실에 지원을 해주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정부가 지원 약속을 해놓고도 턱 없는 액수를 보내왔다. 말 그대로 생색내기다.

-6.25 납북자 자료 전시회를 최근 국회에서 가졌는데.

<가족회>에서 수집한 명부와 논문 자료

6.25 전쟁 납북자 생사확인을 요구하는 특별법이 법안 심사 소위에 올라가 있다. 4월이 되면 법안이 상임위에서 논의될 예정이다. 법안 통과를 촉구하기 위해 국회에서 자료 전시회를 갖게 됐다.

최근 정부에서 ‘법률안 검토 의견서’가 나왔는데 부정적인 의견이었다. 실사자료가 없다, 전후 납북자와 형평의 원칙에 어긋난다, 주무부서가 다르다는 이유였다.

특별법 제정, 정부 부정적 의견

실사자료가 없으면 정부가 실사를 하면 될 것 아닌가. 이제는 민주화 운동 대상자도 보상하고, 좌익계통도 명예회복을 해주는 시대다. 왜 우리는 지난 50년 동안 감시 당하고 연좌제로 묶여 취업도 못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국가에서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는가.

-정부에서는 아무래도 전쟁 기간 납북자보다는 전후 납북자 문제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때론 이 두 문제가 충돌하기도 하는데.

전쟁기간과 전쟁 후는 상황이 다르다. 6.25 전쟁은 매우 특수한 상황이다. 따라서 접근 방법이 다를 수밖에 없다. 당시 납북된 사람은 수만 명이고 그 대상도 국회의원, 정부 관계자, 사업가, 일반 시민들로 다양했다. 또한, 50년 전 납북된 인사들은 현재 대부분 사망했거나 일부 생존해도 고령에 해당한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생사확인과 국내에서의 명예회복이 주요한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다.

-전후 납북자 단체와 연대할 계획도 세우고 있는가.

최근 납북자 가족협의회 최우영 대표와 명칭문제도 의견을 모았다. 최 대표가 <전후 납북자가족협의회>로 명칭을 바꿀 의사가 있다고 했다. 그리고 다양한 채널을 통해 상호 협의해 나갈 생각이다.

어느 납북자 문제가 더 중요하다고 보는 시각은 매우 위험하다. 그 가족들이 겪고 있는 고통과 아픔은 전쟁 기간이든, 이후든 다르지 않다. 다 같이 중요하고 반드시 해결할 사항이다.

-전쟁기간 납북자 가운데는 본인은 물론이고 그 가족도 탈북한 경우가 없는데.

전쟁포로는 격리되어 탄광에서 수용했다. 그래서 오히려 접근이 쉬웠다. 그러나 전쟁기간 납치자는 그 사회의 구성원이 됐다. 그 사회에서 납치를 당했다고 말을 못한다. 이 사실을 숨기거나 자진해서 월북했다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스스로 왔다고 해야 살아 남을 수 있다. 그리고 오랜 세월 이 사실을 숨긴 사람들이 대부분 사망했다. 그리고 납북 사실을 숨겨왔기 때문에 자식들도 잘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전쟁 기간 납북된 인사는 어느 정도 된다고 보는가.

실사를 해봐야 알겠지만, 20만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전쟁기간 납북자 배상은 북한의 몫

-올해 계획하고 있는 사업은?

일단은 특별법 관련 토론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국제법 전문가를 모시고 우리의 배상요구가 정당한지에 대해 검토하고 국민들에게 알려갈 생각이다. 사실, 정확히 표현하면 보상은 우리 정부의 몫이지만, 법률적 배상은 북한이 해야 한다. 전후 납북자 가족모임이 재판에서 패소한 사실을 알고 있다. 전문 변호인단을 구성해서 나설 생각이다.

“정부가 못하면 국민이 나서야 한다”

-활동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왜 정부가 이 문제에 나서지 않을까를 지난 5년간 생각했다. 자나깨나 이 생각만 했다. 그렇지만 나는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그러나 내가 얻은 답이 있다. 정부가 못하면 내가 해야겠다는 것이다.

가족들마저 이 사실을 외면하면 누가 이 문제에 나서겠는가. 우리가 먼저 시작을 하면 따라와 줄 것으로 생각한다. 사실을 규명하고 희생된 사람들의 마음이라도 위로해야 하지 않겠는가.

-부친은 어떤 상황에서 납북되었는가.

6.25 당시 아버지는 청량리에 위치한 유리공장 공장장으로 계셨고 어머니는 의사였다. 형제는 나와 언니 두 명이 있었고, 어머니도 막내 아이를 가진 만삭 상태였다. 할아버지, 할머니도 같이 지내서 아버지 혼자 다섯 식구를 데리고 피난을 가기가 매우 어려웠다.

정부에서 서울을 사수하겠다는 말을 믿었다. 그런데 군대를 철수하고 한강 다리를 폭파시켜 버렸다. 피난도 가지 못하고 고립된 상황에서 아버지가 인민군에 끌려갔다. 그리고 지금까지 소식을 듣지 못했다.

-초대 대표로 활동한 경험이 있다. 올해 들어 다시 대표를 맡게 된 이유는.

초대 대표로 3년간 활동하면서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대표 제의를 계속 거절했다. 이후 자료수집에만 전념했다. 그러나 단체에서 내 경험을 다시 살려주길 원했다.

정부와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갈 필요성도 있다. 여러 가지 힘들고 몸도 불편하지만, 남편과 자식을 잃고도 50년 동안 감시와 천대를 받아온 납북자 가족의 명예회복을 위해 열심히 뛰고 싶다.

신주현 기자 shin@dailyn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