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戰死처리’ 국군포로 52년만에 귀환

▲ 귀환 국군포로 장선생씨

6.25 전쟁 중 중공군에 붙잡혀 북한에 억류됐던 국군포로가 52년만에 돌아왔다.

조선일보는 중위 출신 장선생(78)씨가 국군포로 3명과 함께 지난 달 27일 한국에 입국했다고 1일 보도했다. 조씨와 3명의 국군포로 귀환은 아무런 환영행사도 없이 조용히 이뤄졌다고 조선일보는 전했다.

지금까지 귀환한 국군포로 51명중 가장 계급이 높은 장씨는 일찌감치 전사자로 처리돼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위패가 모셔져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1994년 귀환한 조창호씨는 소위.

장씨의 귀환은 가족들에게도 이틀이 지난 29일에 소식이 전해진 것으로 알려졌다.

30일 경기도 분당 국군수도통합병원에서 형인 장씨를 상봉한 선광(72)씨에 따르면 장씨는 혼자 힘으로 거동이 힘든 상태로 병세가 깊어보인다고 한다.

병자가 되어 돌아온 장씨의 인생은 기구하다. 그는 6.25 전쟁이 터지자, 1950년 광주포병학교 간부 후보생으로 입교한 뒤 소위로 임관했다.

휴전을 12일 앞둔 1953년 7월 15일 중부전선의 심장부 중 하나인 ‘김화(金化)전투’에서 중공군에 포로로 잡혔다. 그때 중공군의 공격으로 오른쪽 정강이에 관통상을 입었다.

▲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전사처리된 육군중위 장씨 위패(위) 탈북 직후인 6월 15일 중국 옌지의 은신처에서 장씨가 한국 정부에 보낸 구명 탄원서(아래) 사진 <사진:피랍탈북인권연대>

장씨는 장교로 잡혀선 안 되겠다는 생각에 계급장과 명찰을 뜯어내고 하사 출신이라고 속였다. 포로가 된 그는 평남 강동 포로수용소 병원에서 서너 차례 수술을 받고 함북의 아오지 탄광으로 보내져 1976년 50세가 될 때까지 탄광 굴착기계 수리공으로 일했다.

이후 장씨는 함북의 고무산 노동자구에서 용접공으로 일하다 60세 때인 1986년 퇴직했다. 31세 결혼, 5남 1녀를 뒀다.

그는 5년 전 찾아온 중풍으로 반신이 마비됐고, 영양실조로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했다. 큰아들은 “아버지라도 남에 가서 호의호식하시라”며 두만강을 건너 그를 중국 옌지(延吉)에 내려주고 북한으로 되돌아갔다고 한다.

그러나 브로커가 한국으로 가는데 수 천만원의 비용을 요구해 결국 귀환에 실패하고 중국 공안에 붙잡혀 북송됐다. 그러다 지난 6월 14일 다시 두만강을 건너 옌지에 도착했다.

<피랍탈북인권연대>의 도움을 받은 장씨는 한국정부에 탄원서를 보내 구명을 요청, 7월 7일 선양(瀋陽) 주재 한국영사관에 도착했다.

정부는 장씨와 함께 귀환한 다른 3명의 국군포로의 신원을 밝히지 않고 있다. 이들은 병원에서 일주일 정도 치료를 받고 다시 안가(安家)로 옮겨져 조사를 받을 예정인 것으로 전해졌다.

양정아 기자 junga@dailyn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