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지난 1월 8차 당(黨)대회에서 개정한 노동당 규약에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을 삭제한 것을 두고 “남조선(대남)혁명론이 소멸”했다는 해석이 나와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일부 언론이 개정된 당 규약을 보도(6.1)한 다음 날, 통일부 기자단은 이종석(전 통일부 장관) 씨로부터 새 규약이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에대해 설명을 들었다. 이 자리에서 이종석 씨는 “당의 당면목적을 기술한 부분에서 ‘전국적 범위에서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의 과업’이 삭제된 것은 북한의 ‘대남 혁명’(적화전략)이 사라진 것”이라며, “기존에 북한의 대남전략변화(남조선 적화 전략 포기)에 대해 많은 논쟁을 벌여왔지만, 이번 당규약 개정으로 논쟁이 종지부를 찍게 됐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노동당 규약에서 사실상 남조선혁명론이 소멸함에 따라 북한이 통일을 지향한다는 것은 맞지 않다. 김정은 시대에 들어와 통일담론을 만들고 있지 않다. 남조선 혁명도 포기했다”라고 덧붙였다.
정세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도 평통 창립 40주년 포럼(6.4)에서 “북한이 김정은 집권 10년 동안 견지해왔던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을 통한 한반도의 공산화 목표를 당규약에서 빼버렸다”고 하면서 이는 “북한이 당규약 개정을 통해 법 제도적으로도 ‘투 코리아’를 공식화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두 사람의 이런 평가에 그저 아연(啞然)할 뿐이다! 오죽했으면 이들과 궤를 같이하는 이인영 통일부 장관까지도 ‘남조선혁명 포기, 북한의 투 코리아 경향성 강화라고 보기에는 과하다’라는 평가를 했을까?
당의 전략적 목표와 그 목표 달성을 위한 기본원칙 및 행동 방향을 제시하는 노동당 규약은 헌법보다 상위에 있는 대단히 중요한 규범이다. 이 때문에 당규약이 의미하는 바를 제대로 읽어내는 것이야말로, 북한이 지향하는 이념과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고 그에 대한 적절한 대응책을 마련하는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정된 자구에 함몰되어 지엽말단적인 해석에 머무르지 말고 당규약 전반에 흐르는 저의, 바꿔 말하면 본류(本流)를 포착해야 한다. 대내와 대남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본다.
□ 대내 : 노동당의 김씨 일가 사유화
1970년대 초반 김정일이 김일성 후계자로 지명된 이후, 북한에서는 당규약 개정 등을 통해 노동당을 김씨 일가의 사당(私黨)으로 만드는 데 주력해 왔다. 이런 작업은 김정은이 권력을 승계받은 이후 가속 페달을 밟았다. 2012년 개정한 당규약에서 ‘조선노동당은 김일성 동지와 김정일 동지의 당’이라고 한 데 이어, 2016년과 2021년 당규약에서는 ‘조선노동당은 위대한 김일성-김정일주의당’이라고 규정했다. 표현을 약간 달리하긴 했지만, 조선노동당이 김씨 일가의 사당임을 적시한 것이다. 보다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노동당은 김씨 일가의 사유임을 밝힌 것이다. 참고로 김정은이 ‘당의 유일적 지도체계’를 ‘당의 유일적 영도체계’로, ‘김일성주의’를 ‘김일성-김정일주의’로 문구를 바꾼 것 또한 통치구조에 근본적인 변화가 있어서가 아니라, 계절의 변화에 따라 옷을 갈아입는 것처럼 새로운 지도자 등장 등 변화된 환경에 맞춰 사당화를 더욱 확실하게 한 것이다.
‘당의 사당화’에는 또 다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북한 헌법 11조에 의하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조선로동당의 령도 밑에 모든 활동을 진행한다”라고 되어있다. 김씨 일가의 사당인 노동당의 영도를 받아서만 활동을 할 수 있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은 결국 외형만 국가일 뿐이고 실제에 있어서는 노동당과 마찬가지로 김씨 일가의 사유(私有)가 된 것이다. 이는 동시에 북한의 모든 조직과 재화, 구성원까지 김정은이 노동당을 통해 제시하는 목표를 실행하기 위한 수단이나 객체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이 결심하면 우리는 한다’라는 구호는 북한 체제의 이런 특징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이런 체제에서 인민들은 김정은에게 절대복종하고 김정은을 결사옹위하는 것만이 존재가치가 있게 된다. 과거 나치 독일이 수용소에 ‘노동만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Arbeit macht frei)’는 슬로건을 게시했듯이 말이다.
□ 대남 : 은폐된 대남 무력 점령 기도
당과 국가를 사유화한 김정은(여기에는 선대 독재자도 포함된다)은 대한민국의 인적 물적 자원까지도 자신의 사유로 하기 위한 기회를 노리고 있다. 당규약에는 이 같은 위험한 기도를 내포하고 표현이 곳곳에 숨겨져 있다. ‘보물찾기’를 하듯 하나씩 짚어본다.
첫째, 김정은이 생각하고 있는 영토의 범위다. 대한민국 헌법이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로 한다’(제3조)라는 조항을 두고 있는 것과 달리, 북한은 명백한 영토조항을 두고 있지 않다. 당 규약 서문에 ‘조선로동당의 당면목적은 공화국 북반부에서 …’라는 문구가 있을 뿐이다. 이런 문장 구조 때문에, 대부분의 관찰자는 ‘조선로동당의 당면목적’에는 관심을 기울이지만 ‘공화국 북반부’라는 표현에 대해서는 그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다. 여기서 ‘공화국’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공화국 북반부’는 북한 지역을 의미한다. 즉, 북한이 상정하고 있는 공화국의 영역은 대한민국 영토까지 포함하고 있다. 더불어 김정은의 관점에서 볼 때 ‘대한민국은 (미국에게) 탈취당한 자신의 소유권을 어떻게 해서든 되찾아야 할 대상’이다. 다만 이를 ‘조국 통일’로 분식(粉飾)하고 있을 뿐이다.
둘째, 한반도 정세의 호도(糊塗)이다. 북한은 당규약에서 “조선로동당은 남조선에서 미제의 침략 무력을 철거시키고 남조선에 대한 정치군사적 지배를 종국적으로 청산하며 (…) 투쟁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주한미군의 존재를 ‘대한민국에 대한 정치 군사적 지배’로 연계시키고 있는 것이다. 한반도에 미군이 주둔하게 된 단초를 제공한 것은 김일성의 전면도발이었는데도 말이다. 북한이 이런 주장을 펼치는 것은, 반미감정 조장으로 주한미군을 철수시켜 대남 무력 도발의 기회를 마련하기 위한 불순한 저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논리대로라면, 삼성과 현대 등 대한민국의 많은 기업이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 공장을 설립하고 현지인을 고용하는 기업활동 또한 대한민국이 각국에 식민지 회사를 운영하고 더 나아가 경제적 지배를 한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주민들에게는 사회주의 생활 방식을 강요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여타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유례가 없는 ‘부자 세습’을 하는 모순된 체제에서나 펼칠 수 있는 억지 논리라 하겠다.
셋째, ‘공산주의 사회 건설’이니 ‘평화통일’이니 하는 용어를 사용하여 상대를 기망(欺罔)하고 있다. 공산사회는 연금술이나 무한동력장치와 마찬가지로 사고(思考) 속에서만 존재할 뿐 현실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이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사회를 건설하겠다’라고 선전하는 것은, -물론 김정은의 미망(迷妄)이기는 하지만- 북한 경계를 넘어 한반도 전체에서 김씨 일가의 통치를 이어나가려는 저의와 다를 바 없다. 사회주의 체제 유지를 구실로 백두혈통만이 최고 권력자의 지위에 오르는 북한 현실이 이런 결론에 이르게 한다.
한편 북한이 내세우는 ‘평화통일’ 또한 무력으로 대한민국을 점령하려는 기도를 은폐하기 위한 기만이다. 참고로 북한이 평화통일 방안으로 선전하는 ‘연방제’도, 이른바 ‘비평화적 통일’의 여건을 조성하기 위한 미끼일 뿐이다. 사실 한반도가 평화적으로 통일되는 경우는 독일의 경우처럼 흡수통일(또는 제도통일)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북한은 흡수통일 방식을 지극히 두려워하고 있다. 군사력을 제외하고는 비교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로 남북한 국력이 현격한 차이가 있는 데다 권력의 정당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에서, 김정은은 결코 통일 한국의 수반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은 김정은 자신이 가장 잘 인지하고 있다. 결국 김정은이 선택할 수 있는 통일 방식은 무력에 의한 대남 점령뿐인 것이다. 핵․미사일을 비롯한 방대한 군사력 유지, 각종 자원의 군사 분야 우선 배분 등은 김정은 전쟁 정책의 명백한 증거물이다. 당규약 중 당원 의무 조항에서 ‘당원은 군사 중시를 제일 국사로 여기고…’ 운운한 것도 이런 무력 통일 정책을 방증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그동안 몇 차례에 걸쳐 개정한 당규약이 일관해서 유지하고 있는 체제 목표는 △ 대내적으로 김씨 일가가 북한 지역에 확보한 기득권을 계속 유지하면서 △ 대남면에서는 한반도 통일과 공산사회 건설을 명분으로 내세워 대한민국을 무력 점령하여 김씨 일가의 권력 행사 영역을 확대하려는 것이다. 이번 개정 당규약도 당연하게 이 같은 체제 목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최근 이슈로 등장한 ‘민족해방 민주주의 혁명’ 삭제 등 당규약 개정 과정에서 자구의 일부 첨삭이 가지는 의미는 지천(支川)에 불과하다 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종석, 정세현 두 사람이 8차 당대회의 개정 당규약 의미에 대해 ‘남조선혁명 포기’, ‘북한의 투 코리아 경향성 강화’ 등으로 평가한 것은, 청계천이나 중랑천이 본류이고 한강은 이들의 지류라고 주장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야말로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이 때문에 대내외 많은 전문가가 두 사람의 해석에 반박하고 있다.
이종석, 정세현 씨는 통일정책을 총괄하는 부서의 장관을 역임한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북한 전문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착에 가까운 무리한 주장을 한 것은 단순한 실수나 오판에 의한 것이 아니다. 김일성에게 면죄부를 주는 내재적 접근론에 천착(이종석)했고, “볼턴은 한반도 문제에서 매우 재수 없는 사람, 인디언을 학살한 백인 기병대장을 연상” 발언(정세현) 등의 행적으로 미루어 볼 때, 오히려 의도를 가지고 개정 당규약을 ‘고의적으로 오독(誤讀)’한 것이다. 다름 아니라 사위어가는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다시 불을 지피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하노이 회담 결렬(’19.2)로 유통기한이 지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는 북한의 공동연락사무소 폭파(’20.6)로 완전히 폐기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아쉽지만 이, 정 두 사람을 포함해서 대화지상론자들은 이런 현실을 직시해야만 한다.
사실 핵을 포기할 의사가 전혀 없는 북한에게,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는 애초부터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운 처방이었다. 판문점 정상회담 등의 일부 성과는 일시적인 플라세보 효과이자 신기루였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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