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명 대통령의 향후 새로운 국정운영 비전과 방안을 엿볼 수 있는 올해 8·15 광복절 경축사가 끝났다. 북한 및 남북관계는 많은 사람들이 예상한 대로 한반도 평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가운데 ‘실천적-단계적 평화공존 프로세스’를 공식화했다. 그렇지만 필자가 유심히 지켜본 사항은 조금 다른 데 있었다. 그간 논란이 많았던 북한과 관련해서 과연 어떤 ‘호칭’(呼稱)을 사용할까였다.
대통령의 속도 조절
이재명 정부가 출범한 이후 대북정책 ‘명명’(命名: 이름 부르기)과 관련한 통일부 장관의 거듭되는 파격 행보들에 대해 그간 말이 좀 있어 왔다. 북한의 국가성을 인정하여 ‘북한’이 아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변경하여 부르자는 게 가장 대표적인 사례이다.
급기야 ▲이 대통령의 ‘속도 조절’ 주문(“논쟁의 여지가 있는 일이다. 표현에 꼬투리가 잡혀 정쟁으로 휘몰아 들어가면 원래 하고자 했던 데에서 오히려 나쁜 상황이 초래될 수 있다”)이 나오고 ▲이에 대해 정동영 장관이 “국민 여론이 성숙화된 이후에 하겠다”는 취지였다고 설명(8.5) 함으로써 일단락되는 듯했다.
그러나 지난 12일 대통령 발언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번에는 권오을 국가보훈부 장관의 입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표현이 공개적으로 나오고, 더 나아가 “발언을 정정하거나 유감을 표명할 계획이 없다”는 선 긋기 발언까지 더해졌다.
그래서 필자도 더 이상 가만히만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장관의 생각은 상당수의 국민 정서와 달라도 너무 다르다. 백번 양보해서 통일부 장관은 그렇다고 치자. 남북 간 대화와 교류협력, 평화와 통일을 주 임무로 하며 막힌 것을 뚫어야 하는 공격(offense) 포지션에 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국가보훈부 장관은 정말 아니지 않은가? 김일성의 남침을 막다가 산화하거나 부상한 수백만의 호국영령과 상이군인, 유가족을 대표하고 감싸안아야 하는 수비(defense) 임무를 띠고 있는 장관이기 때문이다. 서 있는 자리가 다르고 무게감도 다른데 염려를 넘어 분노감마저 든다.
다행히도 이재명 대통령이 8월 5일 가르마를 탄 데 이어, 내외의 이목이 한껏 집중되었던 이번 광복절 경축 기념사를 통해서도 ‘북’, ‘북측’, ‘남과 북’ 같은 표현을 사용하는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숙의와 실용을 강조하는 대통령다운 행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청와대가 그나마 중심을 잡고 있으나, 금명간 논란이 재연될 가능성은 수면하에 잠복해 있다 하겠다.
명명(命名)의 의의
최근 최진석 교수는 자신의 페이스북 글(8.10)에서 ‘명명’의 중요성에 대해 이름을 지어주는 것을 비유로 들면서 “자식이 태어나면 가장 먼저 이름을 지어준다.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행위는 단순히 구분을 위한 기호 작성을 넘어, 존재의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여 특별한 존재로 세워내는 가장 근본적인 지적 행위이다. 역사적 사건에 이름을 붙이는 ‘명명’ 역시 마찬가지다. 사건에 이름을 부여하는 것은 그 본질과 성격, 그리고 공동체에 갖는 역사적 의미를 선언하는 철학적 결단이다”라고 강조했다. 맞고 또 맞는 말이 아닐 수 없다.
필자는 또한 최 교수가 이 글에서 잘못된 이름짓기의 대표적 사례로 제기한 ‘6·25전쟁’ 명칭의 부적절성에 대한 지적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물론이고 많은 분들에게도 전파되었으면 하는 바람까지 담아 길지 않은 전문(全文)을 그대로 첨부한다.
“대한민국 건국 후에 일어난 일 가운데 가장 큰 사건은 단연 6·25전쟁이다. 1948년 제헌헌법을 통해 사실상 자유민주주의를 정체로 채택했으나, 해방 직후의 정국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복잡하게 뒤엉켜 있었다. 6·25전쟁이 터지자 대한민국 국민은 비로소 자신이 ‘공산주의에 대항하여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는 전쟁’을 치르고 있음을 자각했다. 그러므로 6·25전쟁은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적 정체와 국민의 목숨이 직접 연결된 최초의 사건이다.
자식이 태어나면 가장 먼저 이름을 지어준다.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행위는 단순히 구분을 위한 기호 작성을 넘어, 존재의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여 특별한 존재로 세워내는 가장 근본적인 지적 행위이다. 역사적 사건에 이름을 붙이는 명명(命名) 역시 마찬가지다. 사건에 이름을 부여하는 것은 그 본질과 성격, 그리고 공동체에 갖는 역사적 의미를 선언하는 철학적 결단이다.
6·25전쟁을 두고 북한은 ‘조국해방전쟁’이라 불렀고, 중국은 ‘항미원조전쟁’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반면 대한민국은 사건이 발생한 날짜라는 가장 건조하고 객관적인 사실 뒤에 숨어 있다. 대한민국은 6·25전쟁에 아직 제 이름을 붙여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한국 사회가 겪는 갈등과 분열, 지적 혼란의 가장 깊은 뿌리다.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주지 않으면 자기 정체성을 갖고 성장하기 어렵듯, 공동체가 스스로 겪은 거대한 역사적 사건에 제대로 된 이름을 부여하지 못한다는 것은 역사적 자의식과 체제적 정체성이 아직 완결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대한민국은 자식을 낳고도 이름을 지어주지 않은 방관자적 태도에 갇혀 있다. 그 결과 일부 세력은 과거 북침설과 남침유도설을 유포한 데 이어, 6·25를 ‘내전’이나 ‘외세의 희생양’으로 왜곡하며 ‘침략자 북한과 피해자 대한민국’이라는 체제적 명확성을 흔들어 왔다. 북한의 침략 책임을 희석하고 그 정당성을 우회적으로 옹호하는 기류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역사의 주체로서 6·25전쟁에 ‘자유수호전쟁’이라는 이름을 부여해야 했음에도, 우파는 수수방관으로 일관했다. 좌파가 ‘해서는 안 될 일’을 벌이는 동안, 우파는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다. 지금 우리는 대한민국을 향해 ‘해서는 안 될 일’을 계속하는 좌파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게으른 우파를 동시에 극복해야 하는 시대적 과제를 안고 있다.”
대북정책 분야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명명(命名)
이재명 정부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대표적 사례는 ①북한→조선으로의 개칭 시도 ②‘평화적 2국가론’의 확산 ③탈북민→북향민으로의 용어 변경 추진이다. 또한 그 이전부터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④김정은 ‘국무위원장’ 직함의 무비판적 사용 ⑤북한을 ‘사실상의 핵보유국’으로 부르는 것 등이다.
지금부터 일반 독자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학술적 접근보다는 간략한 개념 정리와 함께 문제점, 대안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①북한→조선
북한→조선으로의 개칭 필요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북한이 우리를 ‘대한민국’으로 부르기 시작했고 ▲이미 유엔 동시 가입이나 남북회담 합의문 체결 시 ‘조선’을 명기한 바 있고 ▲특히 김정은 정권이 ‘조선’으로 불리기를 원하고 있으니, 우리가 그들이 원하는 이름을 불러주는 게 맞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이야기다. 5000년 한민족 역사 및 한반도 전체를 영토로 규정하고 평화통일 추진의 사명을 부여한 헌법 조항(3, 4조)과의 불일치, 북한 급변 사태 발생 시 우리의 자주적 권리 모호성 등의 문제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 향후 민족의 미래, 국익에 중차대한 영향을 줄 것이다.
1990년대 초 남북한이 유엔에 함께 가입하고, 이후 남북의 정상이 만나 합의문에 사인할 때도(헌법과 국제법의 이중구조) 별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억지로 호칭 변경을 시도하면 법과 외교적으로 문제가 된다. 특히 공론화 과정은 곧바로 국론분열의 장이 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이 밖에도 북한이 우리를 대한민국으로 부르는 이유는 ‘적대적인 외국’이라는 점을 부각하기 위해서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북한을 ‘조선’이라고 불러준다고 북한이 좋아할 리도 만무하다. 오히려 가족이나 친한 친구 사이에 갑자기 ‘○○씨’라고 형식을 갖춰 부르는 것처럼 황당한 일이다.
국내-국제적으로도 남한(South Korea), 북한(North Korea)이 오랫동안 일상적으로 쓰여 왔다. 오히려 공식 명칭을 쓰는 게 부자연스럽다. 지금처럼 ‘북한, 북, 북측, 남북관계’ 등의 용어를 쓰는 가운데 합의문이나 국제 행사 시 ‘조선, DPRK’를 써도 별문제가 없는데, 굳이 억지를 부릴 이유가 없다고 생각된다. 무엇보다도 국민 뇌리에 뿌리박힌 생각과 맞지 않는다. 2004년 헌법재판소가 수도 서울의 관습헌법론에 기초해 ‘신행정수도법 위헌 확인 결정’을 내린 배경을 곱씹어 봤으면 한다.
②평화적 2국가론
‘평화적 2국가론’은 2023년 12월 말 김정은이 대한민국을 제1주적·교전국으로 규정하며 주창한 ‘적대적 2국가론’에 대응하기 위해 정동영 장관이 이끄는 통일부가 궁여지책으로 만든 용어(2026.5 통일백서에 공식 반영)이다.
헌법이나 남북기본합의서, 통일방안 등과 연계한 정책적 고려 없이 김정은이 사용한 “적대적”이라는 용어를 “평화적”으로 대체한 것으로서 통일보다는 평화체제 구축을 강조하고 있다. 각계각층에서 통일 포기 논란이 일자 ‘통일을 지향하는 평화적 2국가론’으로 각색하긴 했으나, 여전히 문제가 많다.
이 용어의 가장 큰 문제점은 남북관계의 2대 장전(章典)인 ‘남북기본합의서’와 ‘민족공동체 통일방안’, 그리고 각종 남북정상회담 합의문과 상치되는 것이며 김정은의 ‘2국가론 프레임’에 끌려 들어가 영구분단이 고착화될 수 있는 위험이 있다는 점이다.
평화는 말이나 종이로 확보되는 것이 아니다. 힘이 없고 상대가 마음을 바꾸면 언제든 사상누각처럼 무너지는 게 평화다. 김정은이 대적 의식을 끊임없이 주입하며 대남 핵선제공격, 영토완정의 길을 열어 놓고 있는데, 왜 우리는 우리가 오랜 시간 동안 건설한 넓고 좋은 운동장을 놔두고 김정은이 급조한 거칠고 좁은 운동장에서 놀려고 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 상상력의 부족이며 우리 것(남북합의문 포함)을 가볍게 보는 근시안적 처사가 아닐 수 없다.
③탈북민→북향민
앞에서 살펴본 것에 비하면 지엽적인 문제이긴 하지만, ‘탈북민’을 억지로 ‘북향민’으로 바꿔 부르려 시도하는 것도 문제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특성은 전통과 다양성을 존중하는 것이다.
탈북민과 관련한 법률상 공식 용어로는 ‘북한이탈주민’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국민이 통상적으로 사용할 때는 개인적 경험(정체성)이나 이념적 지향에 맞게 탈북민, 북향민 등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존중해 주는 게 맞다. 굳이 통일부가 전면에 나서 하나로 일원화하려고 하는 것은 “당사자들 입장보다는 김정은 심기 경호에 주력하는 처사”라는 지적을 피할 수 없다고 본다.
④김정은 ‘국무위원장’ 호칭
필자는 김정은을 호칭할 때 ▲그냥 이름을 부르거나 ▲당 우위 체제이므로 ‘당 총비서’ 직책을 사용해 오고 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필자가 몇 년 전 기고했던 아래의 글을 인용하는 걸로 갈음하고자 한다.
“김정은을 호칭할 때 ‘국무위원장’ 표현보다는 ‘당 총비서’ 또는 아예 직책 없이 ‘김정은’으로 부르는 게 헌법정신과 국민 정서에 보다 합치한다. 헌법 제3조는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북한은 국가가 아니다. 남북관계 특수성을 고려하여 북한을 국가에 준해 예우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김정은을 호칭할 때는 국가(國) 최고지도자를 상징하는 국무위원장이 아니라, 무리(黨)의 우두머리라는 의미로 ‘당 총비서’로 부르는 게 맞다.”(2023.12.8자 조선일보 시론 ‘안보용어를 바르게 사용하자’ 중)
⑤‘사실상의 핵보유국’ 표현
북한의 핵능력이 시간이 갈수록 고도화되어 국내외적으로 북한을 비공식적으로 ‘사실상의 핵보유국’으로 인정하는 발언이 많아지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 같은 네이밍(naming)에 반대한다.
‘사실상의’의 표현 속에는 묵인한다는 메시지가 내포되어 있으므로, ‘불법적인 핵보유 추진국’이라는 용어가 보다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불법’으로 규정할 경우 반드시 시정해야 할 대상이고 ▲‘추진’이라는 단어 속에는 핵보유국으로 공식 인정하지 않는다는 뉘앙스가 깔려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명명은 필자의 지론인 ‘북한 비핵화(비전/출구론)에 앞선 《무용화, 무력화》 전략전술’의 필요성의 기초가 된다.
전략적-입체적 마인드가 중요
“뭣이 중헌디?”. 히트 영화 ‘곡성’에 나왔던 명대사이다. 작금의 북한 관련 ‘호칭’, ‘명명’ 논쟁을 보며 필자의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다. 상대(김정은)의 의도, 국민 정서와 국제질서의 급격한 변화와 같은 과거-현재-미래에 대한 냉철한 진단에 기초해서 전략적-입체적으로 대응해 나가도 모자랄 판에 생각의 수준이 너무 낮아서이다.
이렇기 때문에 김정은은 코웃음을 치며 더더욱 우리 정부를 상대하지 않고 자기 길(my way)을 마음껏 가고 있다. 반면에 우리 국민들은 어리둥절하며 분열되고 있다. 언제는 “통일만이 살길”이라고 외치던 사람들이 갑자기 얼굴을 180도 바꿔 연일 ‘통일 무용론’이나 ‘평화 지상주의’ 목소리만 주야장천 높이고 있으니 말이다. 국제사회도 마찬가지이다. 그렇지만 이들은 남의 집안일이고, 잘하면 님도 보고 뽕도 딸 수 있으니 일단 지켜만 보고 있다. 오죽하면 외교부 장관이 직접 나서 ‘이상주의’, ‘희망’ 등으로 평가절하했을까?
세상사는 무리하거나 억지를 부리면 될 일도 되지 않는 법이다. 남북대화 및 교류협력 복원이 시급한 것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것은 다 때(時)와 경중(輕重)이 있는 법이다. 눈앞의 문제 해소(남북대화 복원)에 눈이 멀어 5000년 한민족 역사, 지난 81년 광복·분단사 및 향후 통일한국의 미래를 잊어서는 절대 안 된다.
지금 일각에서 추진하고 있는 새로운 ‘명명’ 시도는 언뜻 그럴듯해 보이지만, 반역사적-반전략적-반미래적이 아닐 수 없다. 더 많은 반(反)자를 붙일 수 있지만, 이 정도로만 한다. 한마디로 선한 의도와는 달리, 한반도 영구분단론의 씨앗을 우리 스스로가 뿌리는 어리석음(내외의 조롱까지 받음)을 범하는 것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김정은에게 핵을 기반으로 한 영구 독재체제(대남 적대의식 고취와 한류 완전 차단)를 완성할 수 있는 시간을 주고 ▲우리에게는 영토가 한반도 전역에서 남쪽 지역으로 축소되는 시발점이 될 것이며 ▲북한 급변 사태 등 유사시 국제사회의 한반도 개입과 우리의 북측 지역 진입을 막는 논리로 활용될 것이다.
맺음말
결론을 맺겠다. 지금 이 시점은 북한을 어떻게 부르느냐에 힘을 낭비할 때가 아니다. 한반도를 둘러싸고 요동치는 국제질서에 주동적으로 대처하는 것이 급선무다. 북한과 관련한 호칭을 변경하는 정도로 선대 노선을 부정하며 ‘적대적 2국가론’을 주창한 김정은의 비장한 승부수를 되돌릴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본질(本質: 역사, 원칙, 실력, 비전)이고 사안의 경중을 잘 가리는 것이다. 이 같은 관점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국력과 국격에 걸맞게 북한에 너무 매달리지 말고, 세계로 미래로 나아가면서 ▲북한 당국에 당당하게 대화도 제의하고, 협력(인도적 지원 포함)도 제안하고, 핵포기도 압박하고 ▲독재 사슬 하에서 신음하며 한류를 갈망하는 북한 주민들을 위해 ‘K-문화’도 적극 확산(동질성 회복)하는 등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을 묵묵히 실행해 나가는 것이다.
필자의 평화통일 9자 원칙인 《세계로 미래로 통일로》(‘세계로’가 ‘통일로’를 견인)의 큰 관점을 가지고 소처럼 뚜벅뚜벅 걸어가길 바라며 이 글을 맺는다.
유비무환-국론통합-주동작위(主動作爲)-적수천석(滴水穿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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