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 1 독립운동은 평양에서 시작?

▲2003년 3월1일 워커힐호텔에서 열린 평화통일을 위한 3.1민족대회에서 한반도기가 입장하고 있다.

“기미독립운동이라고도하는 3 ∙ 1 운동은 일본 식민통치에 항거하고,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여 한국의 독립의사를 세계 만방에 알린 범민족항일독립운동”

이것이 남한에서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3.1운동의 성격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3 ∙ 1 운동에는 이 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도 등장한다.

하지만 북한 당국이 주민들에게 교육하는 3 ∙ 1 운동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르다.,

북한은 3 ∙ 1 운동을 ‘3 ∙ 1 인민봉기’라고 부른다. 또한 3 ∙ 1 운동이 서울이 아닌 평양 장대재에 위치한 숭실학교에서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면서 시작돼 전국적으로 확산됐으며, 김일성 주석의 아버지 김형직과 연관시키고 있다.

북한이 발간한 『조선력사』고등중학교 2학년 교과서에는 3 ∙ 1 운동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대원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였습니다.

1919년 3월 1일은 우리 민족이 ‘일본인과 일본군대는 물러가라!’, ‘조선독립 만세!’의 구호를 소리높이 웨치면서 강도 일제를 반대하여 전 민족적 투쟁을 전개한 날이며 우리 민족이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커다란 타격을 준 날입니다

3월 1일 평양에서는 낮 12시에 종소리를 신호로 수천 명의 청년학생들과 시민들이 장대제에 있는 숭덕녀학교 운동장에 모여 들어 ‘독립 선언서’를 랑독하고 조선이 독립국가라는 것을 엄숙히 선포한 다음 ‘조선독립 만세!’, ‘일본인과 일본군대는 물러가라!’는 구호를 웨치면서 격렬한 시위를 벌리었습니다.

북한은 또한 3 ∙ 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이 보여준 행동은 “철두철미 반민족적이며 반인민적인 배신행동이었으며 일제 강점자들에 대한 비굴한 투항행위였다”고 비판하고 있다.

3 ∙ 1 운동의 결과에 대해서는 “인민들이 나라의 독립과 자유를 위한 투쟁에서 승리를 이룩하자면 반드시 위대한 수령의 올바른 령도를 받아야 한다는 심각한 교훈을 남기었다”면서 3 ∙ 1 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원인에 대해서도 “악랄한 압살책동과 무저항, 탁월한 수령과 당의 영도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편 “3 ∙ 1 인민봉기는 조선 인민은 일제의 식민지 노예로 살기를 원치 않으며 나라를 찾기 위해서는 죽음도 두려워 하지 않는 웅장하고 애국심이 강한 인민이라는 것을 온 세상에 똑똑히 보여 주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현주 기자 lhj@dailyn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