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미국에 대한 적개심과 증오심 고취를 위해 대외 선전 및 주민 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는 황해남도 신천박물관 최근 모습을 구글어스 위성사진에서 살펴보았다.
“북한에는 모르는 사람이 없고, 남한에는 아는 사람이 드물다”는 이 신천박물관은 황해남도 신천군 신천읍에 위치한다. 2014년 이곳을 방문한 김정은의 지시로 현대식 건물로 재건축하여 2015년 7월 26일 개관하였다(그림 1). 건물 크기는 길이가 132m에 폭 35m로, 국제규격 축구장(100m~110m×64m~75m)에 비유하면 축구장 반 정도 폭에 길이는 20m~30m가 더 길다. 또한, 건물 앞쪽에는 ‘5,605명 애국자 묘’라는 직경 12.5m의 초대형 무덤과 중앙에 ‘400 어머니 묘’와 ‘102 어린이 묘’라는 직경 8m 대형 무덤 2기가 있다.
그림 2에서는 신천박물관의 전면 모습과 직경 8m의 대형 무덤 2기가 보인다. 좌측 무덤 비석에는 ‘사백어머니 묘’, 우측에는 ‘백둘어린이 묘’라고 북한 특유의 붉은 글씨로 쓰여 있고, 건물 전면 상단 현판에는 ‘신천땅의 피의 교훈을 잊지말자!’고 적혀 있다.
그림 3에서는 박물관 안에서 해설사가 전시물에 대해 참관객들에게 설명하고 있고, 그림 4는 김정은이 2014년 10월 박물관을 방문한 당시 모습이며, 그림 5는 내부 전시 그림 중 하나를 예시로 나타낸 것이다.
전시물은 각종 그림과 모형물을 만들어서 미군의 참혹한 만행과 학살을 고발하는 내용들이라고 하는데, 그중에는 미군이 임산부의 배를 갈라 태아를 꺼내서 바닥에 패대기치고 군홧발로 짓밟는 장면도 있어서 보는 이로 하여금 끔찍함에 치를 떨고 몸서리치게 만든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신천 비극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없고, ‘미제 승냥이에게 그 원한을 천백배 되갚아 주어야 한다’고 어린 학생들도 곱씹고 있다는 황남 신천땅의 슬픈 역사에 대해 전후 내막을 살펴보았다.
신천학살 관련 도서로는 남한에 두 편의 문헌이 있다. 한화룡 목사(현 백석대 교수)가 2015년 발간한 ‘전쟁의 그늘(1950년, 황해도 신천학살 사건의 진실)‘이 있고, 소설가 황석영의 ’손님’(1권 및 2권, 2018년 발간)이 있다. ‘전쟁의 그늘’은 당시 피해 및 학살상황을 일자별로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길게 수치와 함께 정리한 것이라서 읽기에 지루한 면이 있다.
소설 ‘손님’을 쓴 작가 황석영은 2019년 조국 지지성명을 낸 바 있고, 서초동 촛불집회에도 참가했다고 하니 그의 이념성향은 굳이 설명 없이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황 작가는 과거 수차례 북한을 방문하고 김일성과 여러 번 만나는 등 친히 수령을 접견한 ‘귀하신 친견자’의 몸으로 당시 신천땅을 찾아간다. 박물관에 들러서는 관람과 함께 자세한 설명을 듣고, 다시 마을에서는 학살사건 당시 생존자를 만나 피에 맺힌 절규의 생생한 증언을 듣는 등 자료수집 활동을 한다. 이어서 방북 후에는 미국과 캐나다로 가게 되는데, 그곳 교포사회에서 황남 신천 출신 또는 관련 생존자들을 수소문해 찾고 또 다른 증언을 듣게 된다. 즉, 좌와 우 양측 모두의 주장을 들어보고 나름 공정성을 갖춘 다음 정리하여 소설 형식으로 집필한 것이 ‘손님’이다. 이 소설은 2001년에 발간된 단행본이었는데, 2018년 1권 및 2권으로 나누어서 재발간되었다.
소설 ‘손님’의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요지는 한국동란 (김일성의 난) 당시 황해남도 신천땅에서는 세 차례의 학살사건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미군과는 관계없다는 것이다. 당시 미군은 신천에 있지도 않았고, 단지 이웃 마을을 경유하여 그냥 북진해 올라갔다는 것이다.
소설에서 당시 상황을 보면, 인천상륙작전 성공과 함께 국군과 유엔군이 북진을 하는데, 북한 땅이 차츰 수복되면서 남한 땅에 내려와 있던 이북출신들이 그리운 마음과 기쁨을 안고 고향을 서둘러 방문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고향에 남아 있던 부모 형제 일가친척들이 죽음이 되어 우물 속에 처박혀있거나 골짜기에 버려져 있는 등 처참한 학살의 현장이었다. 인민군이 후퇴를 하면서 마을의 소위 반동분자들을 몰살한 것이고 이것이 1차 학살이다. 참담한 모습에 이성을 잃고 눈이 뒤집힌 피난민 출신들은 복수극을 벌이게 되는데 이것이 2차 학살이다. 2차 학살을 주도한 이들은 기독반공청년단이라고 한다.
전선의 상황은 다시 역전되어 인해전술의 중공 오랑캐가 참전하면서 국군과 유엔군은 밀려 내려오며 후퇴하게 된다. 신천은 다시 인민군 수중에 떨어지고 비극의 땅에서는 국방군에 협조 또는 부역했다는 죄목으로 또 다른 대규모 3차 학살이 진행된다. 여기까지가 대강의 줄거리인데, 김일성의 무모한 남침이 빚어낸 민족의 가슴 아픈 현대사이다.
세 번의 신천학살 사건은 기독반공청년단이 한 번, 공산 인민군이 두 번 저지른 일이었는데, 북한은 세 차례 모두 미군의 만행이었다고 덮어씌우고 반미 선전에 적극 활용하고 있다. 공산주의자들이 흔히 쓰는 모략선전술이다.
신천학살 이후, 황해남도 일원에서는 무장한 기독반공청년단이 마을을 지키겠다고 공산 인민군에 대항해 싸우다가 일부는 남으로 내려오고, 일부는 인근 구월산으로 들어가 유격대를 결성하여 항전을 계속한다. 그러나 이 구월산유격대는 중과부적으로 남은 자들은 결국 모두 산화한다고 한다.
이념성향에도 불구, 작가적 지성인의 양식으로 소설 형식을 빌려 신천학살의 진실을 밝혀준 황석영 선생께 칼럼을 통해 경의를 표한다.
한국동란 당시 남한에 지리산 빨치산 활동이 있었다면, 북한에는 구월산유격대 활동이 있었던 것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자유를 향한 북한 내 반공투쟁의 역사이다. 남한에서는 지리산 빨치산 활동에 대해 ‘태백산맥’이라는 영화도 나오고 대하소설도 나오고 TV에서는 수차례 특집으로 다루기도 했다. 하지만, 구월산유격대에 대해서는 남한 사회에 알려진 게 없어서 아쉬운 마음이다. ‘새는 양쪽 날개로 날아야 한다’고 일각에서 주장했듯이 지리산 빨치산에 대해 많이 다루었으면, 이제는 구월산유격대에 대해서 영화도 만들고 대하소설도 나오고 해야 할 것이다. 지리산 빨치산 영화를 만든 감독과 대하소설을 쓰신 저명하신 소설가분께 구월산유격대에 대해서도 영화와 소설을 만들어달라고 당부드리고 싶다. 그것이 공정이고, 평등이고, 정의일 것이다.
이 칼럼을 황해남도 구월산에서 자유를 지키려다 스러져간 영웅들께 바친다. “임들이여 영면하소서.”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