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조달러 난무하던 2014년, 지방으로 추방된 평양 소개민은…

[북한 비화] '쫓개민'으로 불리며 죽지 못해 살아가고 있는 평양시 추방자의 억울한 사연

달러
미국 100달러 짜리 지폐. /사진=pixabay

북한에서는 주민이 자살하면 주민등록 서류에 ‘사회주의 제도 배반자’라는 낙인이 찍힌다. 일반 주민도 이럴진대 북한에서 특권층으로 불리는 평양시민이 ‘소개민’으로 전락해 지방 추방지에서 살다 생활고를 못 이겨 자살하면 어떨까. 이들에게는 평양 추방자라는 불명예에 더해 사회주의 제도 배반자라는 주홍 글씨가 새겨지고 이는 가족과 가문의 서류에까지 평생 따라붙는다.

김정은 집권 2년 차인 지난 2014년 가을, 황해북도의 한 산골 마을에 안전부 트럭이 들이닥쳐 평양에서 추방된 소개민 가족들과 이들의 초라한 이삿짐을 떨어냈다. 이들은 평양시 사동구역에 있는 정찰총국 연락소 산하 상표인쇄공장에서 기술발전 부기사장으로 근무하던 40대 초반 김모 씨와 그의 아내 전모 씨 그리고 1남 1녀의 자녀들로, 가장인 김 씨가 이상한 사건에 휘말리게 되면서 이곳 심심산골 오지로 오게 됐다.

2014년 초 평양에서는 100$, 50$짜리 위조달러가 난무했고, 이에 김정은의 1호 방침을 받아 국가보위성과 인민보안성(現 사회안전성)의 대대적인 수사가 진행됐다. 보위성과 보안성은 김정은으로부터 1년이라는 수사 기간을 받아 김정일 시대 때부터 난무하던 이른바 ‘가짜 딸라(달러)’의 출처와 근원지, 유통자들을 송두리째 뿌리 뽑겠다며 단단히 벼르고 작심하고 달라붙었다.

그러다 수사기관에서는 2014년 중순 특이한 사실을 하나 발견하게 됐다. 이는 당시 평양시에 난무하던 위조달러에도 ‘진딸라’(진짜 같은 위조화폐)와 ‘가딸라’(티가 나는 위조화폐)가 구분돼있다는 것이었다.특히 이중 진딸라는 중앙당 소속 연락소가 활자판을 제작하고 필요한 자재를 국내외에서 충당하면서 김정일 시대부터 수년간 정기적으로 위조화폐를 찍어내고 있었다는 놀라운 사실이 드러났다.

수사기관은 이를 즉각 중앙당에 보고했는데, 이후 중앙당으로부터 ‘연락소와 관련된 일은 건드리지 말라’ ‘비밀리에 찍어낸 진딸라가 아닌 종잇장 같은 질 나쁜 가딸라에 대해서만 수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당시 연락소 인쇄공장에서 기술발전 부기사장으로 일하던 김 씨는 오래전부터 중앙당의 지시로 진딸라가 제작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국가적 비밀을 함구하겠다고 지장을 찍고 실제 어디에서도 이를 말한 적 없는 데다 수사기관의 가딸라 제작·유통자 색출작업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여겨 상황을 무심코 지나 보냈다.

그러던 중 그해 가을 어느 날 밤 11시 김 씨의 집에 별안간 법관 10여 명이 쳐들어와 “당의 지시에 따라 당신과 당신 가족은 추방이라는 관대한 용서를 받았다”고 들이대더니 곧장 그와 그의 가족을 지방으로 내려보냈다.

김 씨 가족의 불행은 이때부터가 시작이었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용서는 뭐고 추방은 또 뭔지 마른하늘에 날벼락인 셈이었다. 김 씨는 억울함에 도당과 도 보위부를 찾아다니며 무엇을 잘못해 추방됐는지 이유나 알자고 항의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죽은 듯이 살라. 선선한 곳(교화소)이나 더한 곳(정치범수용소)에 가고 싶지 않고 그나마 가족이라도 지키고 싶으면 입 닥치고 가만있으라”는 말뿐이었다.

결국 김 씨 가족은 산에 움막을 짓고 죽지 못해 살아가면서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 그들은 평양에 있는 친척과 만날 수도, 연락할 수도 없었다. 여행증명서나 평양 출입 승인번호를 받을 수 없었을뿐더러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북한 당국이 친척들의 전화를 모두 도청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 씨와 그의 가족은 아직도 무슨 이유로 추방돼 산골에 끌려왔는지 알지 못한다. 문제 될만한 것이라면 연락소 산하 인쇄공장에서 중앙당의 조직적 지시로 위조화폐를 찍어내는 비밀을 알고 있으면서 말단 생산공정이나 판매과에서 저질렀을 수 있는 가딸라 외부반출을 막지 못했던 게 아닐까 하고 추측할 뿐이다.

다만 한 가지 알고 있는 것은 추방돼 온 지방에서 주민들로부터 반동분자라는 손가락질을 받고 평양 소개민을 낮잡아 부르는 ‘쫓개민’으로 불린다는 것이었다.

이들 가족은 여전히 북한 당국의 감시 아래 이동의 자유도 없이 살아가고 있다. 그들을 목격한 주민들은 김 씨의 아들은 추방돼 온 그해 겨울 굶어 죽었고, 그의 아내는 사람의 눈에서 물이 몇 톤이나 나올 수 있는지 마치 셈을 하는 듯 눈물 속에 세월을 보내고 있다고 증언하고 있다.

잘못한 게 뭔지도 모르고 쫓겨나 하루에도 몇백 번씩 죽으려는 마음을 품은 김 씨였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평범한 주민도 자살하면 가문이 발전할 수 없고 사회주의 제도 배반자라는 딱지가 붙는다는 것을 잘 알기에 김 씨는 언 땅에 죽은 아들을 묻으면서 결심했다. 추방자 딱지에 제도 배반죄까지 더해 자손들에게 물려줄 순 없다고….

북한에서 멀쩡히 살아가다 영문도 모른 채 추방돼 자유를 억압당하고 비참하게 살아가는 이들은 비단 김 씨 가족뿐만이 아닐 것이다. 이런 이들의 억울함은 도대체 누가 풀어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