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막말 비난’ 이은 ‘친서’…北은 애초부터 계획이 있었다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지난달 29일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확대회의가 진행됐다”면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사진을 1면에 게재했다. /사진=노동신문 뉴스1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이 청와대를 저능하다며 비난한 다음 날 김정은 위원장의 친서가 문재인 대통령에게 전달됐다. 코로나19 바이러스와 싸우고 있는 우리 국민에게 위로의 뜻을 전하면서,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변함없는 우의와 신뢰를 보내는 내용이라 한다.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듯 보이지만 만 하루도 안 돼 이 모든 것이 이뤄진 것을 보면, 북한은 애초부터 이러한 시나리오를 계획하고 있었던 것 같다.

사실상 대남 특사 역할을 해 왔던 김여정이 청와대를 저능하다고 비난하는 상황에서 북한의 의도가 무엇인지 청와대는 부심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김 위원장의 메시지가 그것도 친서라는 가장 극적인 형식으로 전달됐다. 친서 내용 또한 문 대통령의 건강을 걱정하며 신뢰를 보내는 매우 감성적인 것들이었다. 청와대가 남북협력의 가능성에 기대를 거는 것도 무리가 아닐 수 있다.

때리고 어르는 북한

북한이 이번에 우리에게 접근한 방식을 되짚어보자. 북한은 우리에게 전형적인 ‘때리고 어르기’를 활용했다. 먼저 한 방을 먹인 뒤 상대가 당황하고 있을 때 태도를 바꿔 갑자기 온화하게 접근해 온 것이다. 이런 방식은 때때로 처음부터 온화하게 접근하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인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우리 주변에서도 이런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회사의 상사가 하급직원에 대해 심하게 질책하면 하급직원은 주눅이 들고 힘이 빠진다. 하지만, 얼마 뒤 상사가 밥이라도 한 끼 사주면서 다독이면 서운함은 금세 사라지고 앞으로 잘해야겠다는 의지가 생긴다. 하급직원이 예전보다 더 열심히 일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 질책과 위로, 채찍과 당근은 예전부터 사람을 다루는 기본 용인술 중의 하나이다.

북한에서도 이런 용인술은 심심치 않게 사용된다. 실책을 저지른 당 간부들을 농장이나 공장에 보내 혁명화 작업을 시키다가 재등용하는 것이다. 혁명화란 농장이나 공장에서 고된 일을 하며 사상을 개조시키는 작업을 말한다. 이렇게 모든 것을 잃었다가 다시 당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김 씨 일가에 대한 충성심을 더욱 보여주게 된다고 한다.

, 남한과 대등한 관계 추구하지 않아

김여정 담화를 통해 청와대를 맹비난했다가 만 하루도 안 돼 김정은의 친서를 전달한 것은 북한이 전형적인 채찍과 당근의 방법을 남한에 활용한 것이다. 남북관계 개선을 바라는 남한 정부에 채찍을 써도 궤도에서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판단 하에, 채찍 뒤의 당근으로 더 큰 효과를 노린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이뤄지는 관계는 상호 존중의 관계가 아니다. 상사가 하급직원을 혼내고 달랠 때 대등한 관계라고 생각하지 않듯이, 북한은 지금 남한과 대등한 관계를 맺으려는 것이 아니라 남한을 그야말로 필요한 만큼 ‘다루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 위원장의 친서에 코로나19와 싸우고 있는 우리 국민에 대한 위로와 문 대통령에 대한 신뢰의 뜻이 담겼다고 하지만, 그 말이 곧이곧대로 와닿지 않는 이유이다.

한미공조보다 남북협력 앞세우라는 게 북한 요구

북한이 김여정 담화와 김정은 친서를 통해 요구하고 있는 것은 한미공조보다 남북협력을 앞세우라는 것이다. 김여정 담화에서도 ‘동족보다 동맹을 중시’하는데 대해 불만을 드러냈고, 김정은 친서에서도 ‘남한이 미국에 너무 휘둘린다는 얘기가 은유적으로 담겨있다는 것’이 청와대 관계자의 전언이다. 북미관계가 지지부진하고 대북제재가 온존하는 가운데 남북관계를 통해 틈을 찾아보겠다는 의도가 엿보인다.

북한의 의도가 무엇이든 우리 정부는 남북관계 개선을 통해 북한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달성하겠다는 생각이겠지만, 다시 한번 북한의 협상술에 휘둘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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