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이 된 여자 3부] 30여 년의 이별 끝 마침내 성사된 결혼

[어느 필사원의 사건일지] 공식적으로 北 빠져나간 김 여인, 부러움의 대상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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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림기자재공장에서 노동자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글과 무관). /사진=노동신문·뉴스1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덧 베트남 사람들은 자기 나라로 돌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모두 들떠있는데 부남국만은 별로 기뻐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떠나갈 날이 일주일 정도 남았을 때 부남국이 진지한 모습으로 현옥에게 다가왔다.

“현옥 동무, 요새 왜 웃지도 않고 차겁기만 하오? 우린 이제 며칠 후면 조국으로 돌아가오. 그래서 오늘 현옥 동무에게 꼭 할 말이 있어요. 근데 너무 차겁게 구니 말하기가 머쓱해요. 사실, 많이 고심했어요. 이젠 미를 날도 없어서 오늘은 꼭 말하고 싶어요.”

부남국은 북한식으로 현옥에게 동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공장에서는 이미 한 달 전부터 고향으로 돌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베트남 사람들을 전보다 더 따뜻하게 대해주라는 지시가 있었다. 정작 떠난다고 하니 마음 한편이 서운하기도 했다. 어색하게 웃으며 따뜻하게 다가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부남국은 오랜만에 웃는 현옥을 보며 자신감이 생긴 것 같았다.

“현옥 동무, 나 동무랑 결혼하고 싶어요. 며칠 후면 떠나게 되는데 나랑 베트남에 가서 살지 않겠소?”

현옥은 누가 들을까 봐 입가에 손가락을 곧추세우고 제지했지만, 부남국은 떼쓰듯 계속 말을 이었다.

“난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고 형과 함께 살고 있는데 우리 형도 좋은 사람이고 집안 형편도 그리 어렵지 않소.”

그때 저쪽에서 먼저 일을 끝낸 다른 노동자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바빠난 현옥은 부남국의 말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그런 말을 하면 안 돼요. 난 우리나라가 좋아요. 거기에 가면 말도 모르고 기후도 맞지 않아서 못 살아요. 부모님이나 형제들도 볼 수 없고요.”

현옥은 안 될 일이라는 듯 딱 잘라 버렸다.

하지만 다음날 일은 터졌다. 부남국은 떠나기 전에 현옥이 속한 당 조직과 직장 간부들을 찾아가 현옥과 결혼하고 싶다며 자기 나라로 데려가게 해달라고 도움을 청했다.

현옥은 또 보위부에 불려갔다. 행실을 어떻게 했으면 베트남 청년이 마음을 품게 했느냐고 야단을 쳤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베트남 청년이 좋은 사람이라는 사실에는 공감하지만 그를 좋아한 적은 없다고 무조건 부정했다. 외국인과의 결혼을 부정하는 나라에서 현옥에게 주입된 사상이 감정조차 무조건 부정하게 한 것이다.

그때로부터 떠나는 날까지 부남국은 눈물을 머금고 현옥에게 매달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현옥도 마음이 알알해서 눈물이 글썽해졌다. 그렇게 부남국은 떠났다. 그 후 공장뿐만 아니라 시내에까지 소문이 자자했다. 현옥이 베트남 사람과 결혼하려 했다는 말이 떠돌아 그는 행실이 나쁜 여자로 낙인되었다.

그때로부터 만 3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후 김 여인은 부남국과의 만남을 노골적으로 반대하고 나섰던 그 제대군인 세포비서와 결혼했다. 부남국과의 관계에 더욱 눈을 밝히고 달려들었던 세포비서가 그녀를 마음에 두고 있던 것이다. 그래서 눈에 불을 켜고 더욱 노골적으로 길길이 날뛰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그리 행복하지 못했고 오래가지도 못했다. 아들 둘을 낳고 살면서 티격태격하는 날도 많았다. 그러던 어느 해 남편은 40세도 안 된 나이에 공장에서 사고사를 당했다. 그때부터 김 여인은 혼자서 아이들을 키우며 어렵게 살아왔다.

김 여인의 이야기는 끝이 났다. 심취된 듯이 듣고 있던 외사부원과 보위원의 얼굴에는 뭔가 서운함이 어린 듯하다. 이루지 못한 사랑을 뒤에 남기고 떠난 부남국에 대한 애틋한 연민 때문인 것 같았다.

평양 창전거리 선경종합식당 결혼식장에서 열린 결혼식 장면. /사진=연합

외사부장과 보위원의 이야기


김 여인의 이야기가 끝나자 외사부원과 보위원은 그제야 이야기를 꺼냈다.

며칠 전이었다. 중앙당에서 도당에 문건이 발송되었고 두 장의 사진과 함께 사연이 적힌 편지가 날아왔다. 편지는 도 보위부에도 발송되었다. 도 보위부와 도 외사부가 합심해서 문제의 김 여인을 찾아달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그들은 김 여인을 찾게 된 것이었다. 그들은 사진의 주인공인 부남국이 젊은 시절 한때의 연정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김 여인을 만나보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김 여인에게 물었다.

“아주머니도 만나보고 싶은 생각이 있으시죠?”

보위원은 부드럽게 질문했지만 김 여인은 뭐라 대답하기 어려웠다. 아직 무슨 상황인지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외국인을 만나보았고 그나마 1년 6개월을 한 일터에서 함께 보낸 사람, 거기에 한때 자기에게 연정을 품었던 사람이어서 만나보고 싶은 생각은 있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이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인지 또 망설이게 되었다.

김 여인의 마음을 헤아린 보위원이 이번에는 부드러운 듯하지만, 강박적인 말투로 모를 박듯이 말했다.

“괜찮아요. 지금은 만나보는 게 필요합니다. 정부 입장에서도 그분과의 만남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지금 윁남(베트남)의 정부 요직에서 부총리직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김 여인을 만나보고 싶다고 윁남에 있는 우리 대사관을 통해 정부에 여러 차례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보위부와 정부에서도 지금은 김 여인이 그분과 만나는 것을 승인한 상태입니다.”

한때 그들은 서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경계선에 서 있었다. 단일민족만을 내세우는 폐쇄국가가 이번에는 왜 만남을 승인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때는 안 되고 지금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지금은 김 여인이 싫다고 해도 정부가 만나야 한다는 태도다. 보위원은 만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부드러운 강박을 하고 있었다.

평양국제비행장 모습. /사진=연합

김 여인과 부남국의 결혼, 그리고 베트남 이주


그 후 김 여인과 부남국과의 만남은 평양에서 이뤄졌다. 김 여인은 그때야 모든 사연을 알게 됐다. 부남국에 대한 현옥의 사랑은 북한 체제에서 핍박을 받았고, 외국인과의 사랑이란 넘을 수 없는 강과 같았다. 그때 현옥은 마음의 문을 아예 닫아 버렸지만, 부남국은 그렇지 않았다.

북한의 공장에서 1년 6개월 전습을 받고 베트남으로 돌아간 부남국은 한시도 현옥을 잊은 적 없었다. 그는 베트남에 있는 북한 대사관으로 시종일관 연락을 해왔다. 제발 현옥을 만나게 해달라고 애걸했고 해마다 북한에 연락을 해왔다. 그때마다 “그런 여인은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30여 년간을 그렇게 연락해 왔다.

부남국은 현옥을 만나려면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며 악착같이 살아왔다. 대학도 졸업하고 열심히 일해 돈도 모아 부자가 되었다. 북한에 마지막으로 연락할 당시에는 베트남 정부 안에서 큰일을 하는 사람으로 발전했다. 부남국의 정확한 직위는 알 수 없었지만, 그때 들은 말은 부총리직을 수행하면서 몇 차례나 북한을 오가며 정부에 현옥과의 만남을 정식으로 요청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렇게 그들의 사랑은 성사되었다.

김 여인은 부남국과 평양에서 결혼식을 한 번 올렸고 남편이 된 부남국을 따라 베트남으로 가서 거기에서 또 한 번 베트남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고 한다. 그는 몇 년에 한 번씩 북한에 왔다 간다.

째지게 가난한 살림으로 초라하기 그지없던 그의 집에는 현재 맏아들이 살고 있다. 맏아들은 베트남에서 새 아버지가 보내준 달러로 낡은 집을 밀어버리고 번듯한 새집을 지었다. 둘째 아들도 새집으로 이사를 가 잘살고 있다. 모두 새 아버지 부남국의 덕분이었다.

부남국을 따라 베트남으로 간 김 여인은 그로부터 2년 뒤 북한을 다녀갔다. 그때 그녀는 자기는 비록 베트남에 가 있지만 자주 고향 집을 방문한다고 했다. 부남국이 컴퓨터로 확대해서 김현옥이 살던 집을 자주 들여다볼 수 있도록 해준다고 했다.

그때 북한 사람들은 신기하다고 여겼다. 그때는 정부 기관에도 컴퓨터가 몇 대 있을까 말까 하던 때고 개인이 컴퓨터를 가지고 있지도 않은 때였다.

김 여인은 지금도 행복하게 살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공식적으로 북한을 빠져나온 한 사람이자, 북한 사람들의 부러움의 대상이다. 이는 실로 기네스북에 등재될 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김 여인의 앞날을 축복한다.

(끝)

*편집자주
북한 보안서(경찰서) 등지에는 ‘필사원’이 있다. 사건을 기록하면서 데이터베이스화하는 업무를 담당하는 것이다. 때문에 이들은 현지에서 발생한 사건사고를 당국이 어떻게 처리했는지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데일리NK는 필사원 업무를 담당했던 한 탈북민의 증언을 통해 북한 체제의 속성을 파헤치고자 한다.
다만 본지는 일반적 기사체를 고집하기 보다는 소설적 기법을 사용해서 독자들이 사건의 흐름 및 북한 주민들의 심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