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이 된 여자 2부] 기억에서 잊힌 베트남 남성이 찾는다?

[어느 필사원의 사건일지] 30여 년 전 기억을 꺼내든 김 여인…체제가 부정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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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잊혔던 외국인 남자


북한 국경지역의 보위부 청사. /사진=데일리NK

당 청사 입구에는 총을 멘 군인들이 서서 일 보러 온 사람들의 신분을 확인하고 있었다. 수부에 앉은 사람이 전화로 김 여인이 도착했다고 담당 부서에 알리자 빨리 들여보내라는 연락이 왔다. 김 여인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안은 채 외사부라는 표 쪽이 걸린 곳으로 들어섰다.

그 안에는 두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김 여인을 반갑게 맞이했다. 눈빛이 무던해 보이는 나이 지숙한(지긋한) 남자와 또 한 명의 중년 남자였다. 한 사람은 도당 외사부의 부원이라고 소개했고 다른 사람은 도 보위부에서 나온 보위원이라고 말했다.

보위원이라는 말에 가슴이 철렁했다. 평시에도 보위원이 찾으면 두려운데 도당 청사 안에서 보위원이 함께 담화 요청을 했다는 것은 심장이 놀라고도 남을 일이다. 머리가 벙벙해 오고 가슴이 널뛰듯 했다.

그런데 두 사람은 김 여인과 다르게 신이 나는 일이라도 있는지 싱글벙글하는 눈치다. 꽤 좋은 일이 있어 기분이 좋은 사람들 같았다. 예민한 보위원이 긴장해있는 김 여인을 알아보고 의자를 권하며 한마디 했다.

“그렇게 긴장할 일이 아니니 편하게 마음을 가져도 됩니다.”

김 여인이 자리에 앉자 그들은 서로 눈빛 교환을 하더니 보위원이 서류 속에서 두 장의 사진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이 두 사진을 보면서 알 만한 사람들인가를 확인해 주시오.”

보위원이 사진을 내밀고 도당 외사부의 부원이 말을 붙였다.

사진을 넘겨받아 겉모양을 보니 한 개는 색이 바랜 오래전의 흑백사진 같았고, 또 한 개는 최근에 찍은 듯 반들거리는 천연색 사진이었다. 두 사람 다 북한 사람의 모습을 벗어난 외국인 남성 같았다. 흑백사진의 테두리가 왠지 눈에 익어 보였다. 사진 테두리가 네모반듯한 것이 아니고 꽃 모양으로 따낸 띠를 둘렀다. 집에서 많이 봐왔던 한 시기의 사진들과 비슷해 보였다.

“잘 기억해보시오.”

날카로워 보이는 눈빛과 달리 보위원은 김 여인을 안심시키려는 듯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눈이 안 좋은 김 여인은 미간을 찌푸리고 천천히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순간 뒤통수를 맞은 듯이 머리가 ‘뻥’ 했다. 낯익은 모습, 한때의 추억으로 잊혔던 얼굴이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아.” 하고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부남국, 부남국이에요.”

목소리가 입안에서 겨우 나와 흩어졌다.

여인의 얼굴에서 일어나는 감정변화를 읽은 보위원이 확인되었다는 듯 그럴싸한 미소를 보였다. 외사부원도 덩달아 얼굴이 밝아졌다.

“알아보았나 봅니다. 그 사람이 맞습니까?”

뭘 알고 있다는 듯이 보위원이 말을 걸었다.

김 여인은 속이 떨려나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얼굴색이 꺼멓게 변했다. 보위부와 당 기관에서 왜 부남국의 사진을 보여주는지가 의문이었다. 벌써 30여 년 전의 일을 캐내서 무엇을 하자는 것인지 걱정되었다.

김 여인의 심정을 가늠한 보위원이 다시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아주머니, 안심하오. 이 외국인이 윁남(베트남)에 있는 우리 대표부에 아주머니를 찾아달라는 연락을 해 와서 찾은 것이요. 별다른 일은 없소. 그때 이분과 함께 일하면서 있었던 추억이라든지, 아니면 재미있을 것 같은 연애담이 있으면 좀 들려주시오.”

보위원은 김 여인에게 30여 년 전의 추억을 부탁했다. 외사부 부원은 재미있다는 듯이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눈을 깜박이며 열중했다.

낡은 사진 속의 젊은 남자는 부남국이라는 베트남 사람이었다, 그는 한때 북한에 들어와서 기술을 배워갔다. 김 여인은 천천히 떨리는 손으로 다른 사진도 들여다보았다. 천연색 사진은 최근에 찍은 사진인 것 같은데 세월을 따라 잔주름이 박힌 현재, 70세 정도 된 것 같았다. 너무 뜻밖이었다.

부남국은 김 여인의 추억에서조차 잊힌 인물이었다. 그는 지구의 다른 공간에서 사는 맺을 수 없는 먼 곳의 인연으로 아주 잠깐 그렸다가 지운 그림에 불과했다. 여인은 상처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인생의 초라한 습작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그러기에 당연히 아픈 것도 없었다. 그들이 이루지 못한 인연을 정치가가 분석한다면 이는 북한 사회주의가 옭아놓은 민족 배타적인 사상이 개인의 사랑도 지배한 것이라는 비판을 쏟아낼 것이다.

너무 뜻밖의 일 앞에 김 여인은 조금 머뭇거렸다. 아예 지워버렸던 추억이긴 하지만 갑자기 감정이 묘해졌다. 이 사람들에게 그때 이 남자와의 인연에 대해 그대로 쏟아내도 되는지, 아니면 그대로 쏟아놓았다가 어떤 문제를 초래하게 되진 않을까 걱정스럽기도 했다.

여인의 마음속에서 움직이는 내면의 감정을 눈치 빠른 보위원이 알아차리고 안달복달하며 미리 침을 놓았다.

“아주머니, 아무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사상적으로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고 국경을 초월한 사랑이어서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뿐인데, 정치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으니 사실을 그대로만 이야기해주시면 됩니다.”

보위원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어떤 소설보다도 더 재미있는 생생한 이야기들을 미리 감미한 것 같았다.

부남국에 대한 추억


평양대마방직공장
남북합영기업인 평양대마방직에서 북측 근로자들이 일하고 있는 모습(글과 무관). /사진=연합

김 여인의 이름은 김현옥이다.

현옥은 처녀 때 한때 북한의 큰 공장에서 기계를 다루는 기대공으로 일했다. 그때 베트남 사람들이 기술 전습을 받으러 북한에 들어왔다. 그들은 1년 6개월을 기한으로 왔다.

그때 북한 사람들은 북한을 당과 정부의 영도로 대단히 발전된 나라로 믿었고, 무지몽매한 주변 나라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었다. 북한 정부는 이런 나라들을 신흥세력, 발전도상 나라들이라고 하면서 이런 나라들을 우리와 같이 우월한 국가가 품어주고 적극적으로 도와주어야 한다는 선전을 많이 했다.

베트남 사람들이 들어오기 전 보위부는 사람들을 모여 놓고 외국인들과의 접촉에서 있을 수 있는 사소한 것들에 대해서까지 미리 주의시켰다. 특히 북한 여성 노동자들과 외국인 남자들과의 사이에서 있을 수 있는 문제들에 대해 단단히 오금을 박았다.

현옥은 설마 그런 일이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닫힌 사회 안에서 외국인들과 교제해 볼 기회가 없는 북한 사람들은 외국인에 대한 이질감이 컸다.

부남국이라는 베트남 청년이 현옥에게서 전습을 받게 되었다. 현옥은 부남국이 같은 아시아 사람이지만 이상하게 느껴졌고, 일을 같이하지만 별로 반갑지 않은 인물이었다.

특히 외국인들은 육식을 많이 한다는 소리를 들어서 다가가면 노린내 같은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아 모두숨(한꺼번에 크게 몰아쉬는 숨)을 쉬기 일쑤였고 영민해 보이는 북한 사람들과는 달리 선량해 보이는 눈빛은 좀 모자라는 사람들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은 그것을 부정하게 했다. 부남국은 참 영특하고 다정다감한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말이 잘 통하지 않아 손짓, 몸짓으로 언어를 대신했다. 하지만 열정적이고 영특한 부남국은 다른 사람들보다 빨리 북한 말을 익혔다. 그들은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저녁이면 공장 안에 있는 북한 근로자 중학교에 가서 북한말을 배우기 시작했다. 5개월이 지나자 전반적인 언어소통이 잘 되었다. 언어소통이 되니 자연히 감정이 잘 통했다.

외국인이라는 이질감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부남국은 함께 일하면서 많은 몫을 자기가 감당하려고 애썼고 현옥에게는 휴식공간을 만들어주려고 애썼다. 어찌 보면 오빠 같고 애인 같기도 한 모습이어서 어떨 때는 쑥스러울 때도 많았다. 처음과는 달리 또박또박 농담도 잘했다. 한번은 둘이 큰 소리로 웃어 대다가 제대군인 총각 세포비서의 서늘한 눈총을 맞아 입술을 깨문 적도 있었다.

세포비서는 금방 제대돼 온 젊은 청년 당원이었다. 그는 대단히 엄격한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바늘도 들어갈 틈이 없는 사람이라고 몰래 뒷소리를 했다. 아직 장가도 가지 않은 젊은 청년은 당에서 하라는 대로 쇠몽둥이라도 들고 날뛸 것 같았다. 작업반 사람들은 그 센 눈빛 앞에서 모두 기가 죽어 자빠진 소처럼 꿈쩍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부남국과 현옥이 한창 열심히 일하는 데 담당 보위원이 찾는다는 연락이 왔다. 켕기는 일도 없는데 보위원이 찾는다면 항상 가슴이 답답하고 두근거렸다. 보위원 실에 들어서니 세포비서와 보위원이 함께 앉아 있었다. 같이 일하는 젊은 청년 세포비서가 와 있는 것이 더 이상해 심장이 쿵쿵 방아를 찧어댔다.

보위원이 먼저 말을 꺼냈다.

“요새 직장 안에서 현옥 동무에 대한 이상한 말이 나돌고 있는데 알고 있소?”

현옥은 눈을 크게 올려 뜨고 보위원과 세포비서를 엇바꿔 쳐다보았다. 그는 저번에 마주친 세포비서의 눈빛이 떠올랐지만 이내 지워버렸다. 외국 사람과 일한다고 웃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보위원이 불렀을 때는 누가 고자질을 했거나 조직적으로 문제가 될 상황에 놓여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옥은 잘못한 일이 없기에 이내 대꾸했다.

“무슨 말씀인지 통 알 수가 없습니다. 저에 대해 무슨 말이 떠돈다는 건지…. 누가 뭐라고 할 정도로 잘못한 일이 없습니다.”

그는 심란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젊은 세포비서는 심각하다는 듯 어두침침한 눈길로 현옥을 쏘아보았다.

보위원은 계속 다그쳤다.

“그럼 에두르지 않고 직판 묻겠소. 동무가 그 윁남 청년 부남국과 연인 사이라는 말이 돌던데 사실이요? 소문이 벌써 온 공장에 쫙 퍼졌소. 부남국과 농담도 많고 자주 실실거리는 꼴이 예상일이 아닌 것 같은데…. 성품이 바른 다른 처녀 노동자들에게 주는 영향도 좋지 않고 어떤 정치적 후과를 초래할지…. 만약 그렇게 되는 경우 각오하시오.”

보위원은 점점 더 심각한 어투로 말했고 마지막에는 계속 그렇게 하면 앞으로 좋지 않은 일을 예감하라는 무시무시한 선언도 했다.

현옥은 뭐라고 항변하기 어려웠다. 생각해본 적도 없고 있지도 않은 일을 사람들이 떠들고 다닌다니 난감했다. 증명하기도 어려웠다. 그렇다고 이 사람들은 현옥을 다스릴 수는 있어도 자유국가에서 온 부남국을 데려다가 왜 북한 여자와 연애를 하느냐고 따지고 들 것도 못 되었다. 애매한 두꺼비 떡돌에 치우듯 현옥만 다치게 되었다.

현옥은 그날 보위원 앞에서 각서 한 장을 쓰고 나왔다. 이런 일이 생긴 것은 현옥이 자신이 처사를 잘못한 것이라는 비판과 더는 부남국과의 애정행각에 빠지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그 밑에 지장을 찍고 나왔다.

그때부터 현옥은 부남국이 농담해도 차거운 미소를 짓고 절대 웃지 않았다. 부남국은 무슨 일인가 해서 얼굴이 경직될 때가 많았다. 영민하고 양같이 착한 그는 오히려 자기가 뭘 잘못한 줄 알고 더 잘하려고 애썼다. 부남국은 이런 일을 알 수가 없었다. 북한은 오직 자기네 같은 발전도상 나라들을 도와주는 좋은 나라라는 이미지만 간직하고 있을 뿐이었다.

(계속)

*편집자주
북한 보안서(경찰서) 등지에는 ‘필사원’이 있다. 사건을 기록하면서 데이터베이스화하는 업무를 담당하는 것이다. 때문에 이들은 현지에서 발생한 사건사고를 당국이 어떻게 처리했는지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데일리NK는 필사원 업무를 담당했던 한 탈북민의 증언을 통해 북한 체제의 속성을 파헤치고자 한다.
다만 본지는 일반적 기사체를 고집하기 보다는 소설적 기법을 사용해서 독자들이 사건의 흐름 및 북한 주민들의 심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