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포커스] 소비에트 스타일을 모방한 북한 협상의 한계

    김명길김명길 북한 외무성 순회대사가 5일(현지시간) 스톡홀름 외곽 북한대사관 앞에서 이날 열린 북-미 실무협상 관련 성명을 발표하고 “협상이 결렬됐다”고 밝혔다. /사진=연합

세인(世人)들의 관심을 모았던 스톡홀름 미북 비핵화 실무협상이 아무런 소득 없이 끝난 지 벌써 2주가 된다. 협상이 최종 결렬됐을 때 주최국인 스웨덴 정부에서는 2주 후 미북 양측이 다시 만나기를 제안했다. 미국은 이 같은 제안을 수락했지만, 북한 측 수석대표였던 김명길은 지금까지도 미국이 아무런 새로운 셈법을 가져오지 않았는데 2주 안에 가능하겠냐며 날카로운 반응을 보였다. 결국 스웨덴 제안의 시한인 19일까지 미북 비핵화 협상이 재개된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노딜로 끝난 스톡홀름 비핵화 협상에서 북측은 전형적인 소비에트 협상 스타일을 보여줬다. 이를 근거로 향후 비핵화 협상을 전망해보면 협상 과정은 여전히 비관적이다.

협상이론 전문가인 코헨(Herb Cohen)의 저서 『협상의 법칙Ⅰ』편에는 과거 소비에트 사람들의 협상 스타일이 규정돼 있다. 코헨은 그것을 여섯 단계로 구분하고 있다. 좀 길지만 인용해보기로 한다.

첫째, 극단적인 초기 입장이다. 소비에트 사람들은 항상 상대의 기대치를 무너뜨릴 만한 심한 요구나 어처구니없는 요구로 협상을 시작한다.

둘째, 협상 주체의 제한된 권한이다. 협상장에 나온 소비에트 사람들은 협상은 하지만, 그들에게는 협정을 허가할 권한이 없다.

셋째, 감정 전술이다. 소비에트 협상대표들은 얼굴이 벌개져서 목소리를 높이며, 분노한 듯 행동한다. 때로는 분개한 듯 회담장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가기도 한다.

넷째, 상대방의 양보는 유약함의 표시로 인정한다. 상대방이 교착 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한 발짝 물러나 무언가를 양보한다 해도 그들은 거의 답례를 하지 않는다.

다섯째, 양보에 인색하다. 소비에트 협상가들은 어떤 종류든 양보하는 것을 미루며, 양보한다 해도 그 때는 이미 그들의 입장이 약간 변했을 때다.

여섯째, 최종 기한의 무시다. 소비에트 협상가들은 끈질기며 시간은 전혀 문제가 안 된다는 듯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

코헨이 제시하고 있는 여섯 단계의 소비에트 협상 스타일의 최종 목적은 결국 “무슨 수를 쓰든 이긴다”는 철칙으로 귀결된다. 공산주의자들의 협상에 대한 인식이 투쟁을 통한 승리 수단이라는 점을 시사하는 것이다.

스톡홀름 비핵화 실무협상에서 북측 수석대표로 등판했던 외무성 순회대사 김명길의 행태에서도 이 같은 소비에트 협상 스타일이 나타났다. 이번 협상이 미북 간에 이뤄지는 최초의 비핵화 협상은 아니지만 오랜 교착 상태 후에 개최된 협상이라는 점에서 북한 비핵화를 위한 ‘새로운 시작’으로 볼 수 있었지만, 김명길의 행태는 철지난 소비에트 스타일을 재연한 것이었다. 특히 여섯 번째 ‘최종 기한의 무시’와 관련해서는 조금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협상 결렬 후 입장 발표를 하는 자리에서 김명길은 미국이 협상을 위한 실질적인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판단했다며 협상을 중단하고 연말까지 타개책을 심사숙고할 것을 권고했다고 말했다. 스웨덴이 제안한 2주 후 협상 재개를 걷어차고 비핵화 재개의 시한을 연말로 규정한 것이다. 얼핏 보면 북한 당국은 협상 타결에 구애받지 않고 있으며 시간은 북한 편이라고 인식하게 할 수도 있는 언급이다.

그러나 이 같은 김명길의 화법은 북한이 자체적으로 감내할 수 있는 대북제재의 임계점이 연말이라고 돌려서 말한 것으로 생각된다. 비핵화 협상과 관련해서 미국에 새로운 접근을 촉구하며 그 시한을 연말로 못 박았던 건 김명길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 4월 김정은은 시정연설에서 “올해 말까지는 인내심을 갖고 미국의 용단을 기다려볼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김정은과 김명길이 공히 언급한 ‘연말’이라는 시기는 계절적으로 겨울이다. 특히 올 겨울은 북한 지역에 한파가 유독 심할 것으로 예상된다. 주민들의 겨울나기가 그만큼 더 어려워진다는 얘기다. 헌데 국제사회의 제재는 완화될 조짐이 보이지 않고, 북한이 필요로 하는 원유나 정제유는 중국이 은밀히 지원해 주고 있다곤 하지만 주민들의 수요를 충족시키기엔 턱없이 부족한 형편이다.

북미정상회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난 6월 30일 오후 판문점 자유의 집에서 만나 대화하고 있다. / 사진=노동신문

가뜩이나 제재의 장기화로 주민들의 원성과 불만이 고조되고 있는 마당에 겨울철 민수 경제가 얼어붙는다면 체제나 정권에 대한 주민들의 충성심도 와해 될 것이다. 이런 이유로 김정은과 김명길은 미국의 태도 변화 시한을 연말로 규정했을 개연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실제로 김명길은 미국이 자신들의 체제를 보장하고 경제발전을 지원할 수 있는 새로운 접근법을 요구한다는 뉘앙스의 발언을 하기도 했다. 이는 미국이 제재를 해제해야 주민들의 실생활이 개선되고, 그래야 정권에 대한 충성심도 유지할 수 있어 체제도 보장될 것이라는 희망적 사고가 내재된 요구였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에서는 현재 트럼프 대통령이 국내정치적 위기를 맞고 있고, 쿠르드-터키 사이의 문제 등 대외적으로도 긴급 현안이 등장한 상황이다. 트럼프 대통령에게는 재선 가능성보다 탄핵조사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정부가 북한 비핵화 협상에 주의를 기울일 여력이 있을까. 김정은과 김명길의 바람처럼 연말쯤에는 미국이 북한의 체제를 보장하고 경제발전을 지원하는 ‘근본적인 셈법’을 마련해서 북한 당국을 만족시킬 수 있을까.

백 보를 양보해서 미국이 북한에 전향적인 접근법을 제시한다고 치더라도, 코헨이 지적한 것처럼 북한 당국은 그에 상응하는 비핵화 조치를 이행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경우 북한 당국은 오히려 미국을 유약하게 변했다고 간주할 것이다. 또한 북한 당국이 협상에 적극적으로 나올 때에는 이미 그들의 입장이 변해 있을 것이다. 비핵화 협상이 아닌 군축 협상으로 전환하자고 말이다. 그 사이엔 ICBM(대륙간탄도미사일)의 완결성을 과시하기 위해 대기권 진입 능력을 시험하기 위한 발사실험도 가능하고, 최근에 완성한 북극성 3형을 세 발 이상 장착할 수 있는 3천 톤급 신형 잠수함도 진수하여 미국에 대한 확실한 ‘신뢰적 최소억지’ 능력을 과시할 것이다. 김명길이 위협한 ‘끔찍한 사변’이 현실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북한 당국이 제시한 ‘연말’이라는 미국 태도 변화의 시한은 오히려 북한 당국에게 시한폭탄과 같은 구속이 되고 있다. 연말까지 미국과의 협상을 순조롭게 마무리하여 제재를 해제시키거나 적어도 핵심 제재들이 완화돼야 정권 유지의 구심력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이 탄력적이고 유연한 대북 접근을 보일 것이라는 전망은 소문만 무성할 뿐 아직까지 구체화한 건 없다. 미국의 CVID(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 혹은 FFVD(최종적이고 완전히 검증된 비핵화)와 같은 비핵화 기조가 사라졌다는 근거도 없다. 그렇다면 북한 당국은 미국에게 수용 불가한 요구만 되뇌면서 협상을 공전시킬 게 아니라 자신들부터 비핵화의 진성을 보여주며 협상의 진전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체제결속이나 경제 회생 여부는 비핵화 협상의 성과에 달려있다. 시간은 북한 당국의 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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