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신문 ‘공갈포’…시간에 쫓기는 김정일 얼굴 보이네요

I.
남북관계에 중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두 개의 사건이 일어났다. 그 하나는 김정일의 건강이상이고 또 하나는 북핵문제에서 미국이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해제한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노동신문의 ‘논평원'(論評員 · 논설위원급)이라는 자가 “북남관계의 전면 차단을 포함한 중대결단”을 내릴 수 있다는, 내용적으로 보면 문명세계의 논평이라기보다는 조폭 수준의 협박성 글을 발표했다.

우선 미국이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제외한 조치는 예상되어 온 것이었다. 왜냐하면 미국으로서는 다른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결과는 단순히 판정패가 아니라 누가 보아도 명확한 미국의 외교적 참패임에 틀림없다.

이 패배의 이유는 간단하다. 현실적 대안이 아닌 군사적 조치를 제외하고는 북한의 핵무기를 제거할 수 있는 수단을 미국은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 노무현 정권 시절 한국정부와 중국정부가 북한을 사실상 ‘지원’하여 북한의 핵개발을 방조해 온 것도 사태를 이 지경까지 몰고온 또 다른 원인이다.

따라서 2002년 가을 농축우라늄문제로 시작된 북핵문제의 중간결산은 보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한심한 상태가 되었다. 농축우라늄문제는 흐지부지 관심의 초점에서 사라지고, 그 사이 북한은 핵무기를 개발하고 핵실험까지 하였으나, 핵무기 폐기는 그저 명목상으로만 걸어 놓은 상태가 되었다.

결국 북한은 이미 고물이 다 되어 용도가 사실상 없는 영변의 원자로를 철거한다는 데에 동의한 것밖에 없다. 부시 대통령, 라이스 국무장관 그리고 크리스토퍼 힐 대사는 본의와는 상관 없이 ‘악의 촉진자(promoters of evil)’라는 말을 들어도 결과를 놓고 볼 때 할 말이 없게 되었다.

작년 베이징 6자회담의 2.13 합의 후 크리스토퍼 힐 대사는 미 의회 청문회에서 미국이 결코 하면 안 되며 또 하지 않을 일로서 “마치 북핵문제가 겉으로 해결된 듯한 합의를 하고나서 협상장을 나오는 것”이라고 증언하였다. 그러나 미국이 이번 합의를 통하여 한 일이 바로 그것이다. 어떤 수사와 변명도 이 사실을 가릴 수는 없다.

II.
이명박 정부는 미국과 북한 양자의 타협을 “환영한다”고 평가하였다. 이번 타협의 내용을 보아 환영할 이유는 전혀 없지만, 그렇다고 노무현 정권 시절 북핵해결에 도움은커녕 방해만을 일삼아온 한국정부가 정권이 바뀌자 돌변하여 반대한다 하더라도, 실제로 현 상황을 타개할 전기를 마련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실 웃기는 일은 테러지원국 명단과 북핵문제가 무슨 인과관계가 있느냐는 점이다.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해제되려면 “테러와 손을 끊었고 또 앞으로도 끊겠다”는 의사표시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1988년 대한항공 여객기를 폭파시킨 북한은 사과는커녕 이 사실을 인정도 하고 있지 않다.

아마도 원칙이 사라진 정치적 거래로 인해 미국은 두고두고 후과에 시달릴 것이다. 따라서 한국정부는 공개적으로 이번 타협안을 “환영”하기보다는 “유감스럽지만 현실을 주의 깊게 지켜보겠다”고 하는 것이 옳았다.

이제 엎어진 물이 된 북핵문제에서 중요한 점은 엎어진 물을 되담기 위한 노력이 아니다. 또 북한이 한국을 초토화 시킬 수 있는 충분한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한 앞으로의 6자회담도 사실상 한국의 안보와는 더 이상 관계가 없다. 한국은 공식적으로는 6자회담에 참석하더라도 실질적으로 6자회담에 연연할 이유는 없다.

물론 한국에서 북한의 핵보유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분명 인내하기 힘든 상황이다. 그러나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할 때 현 상황에서 더 중요한 점은 북한이 보유한 핵무기를 거꾸로 이용하는 것이다. “땅으로 인해 넘어진 자, 땅을 딛고 다시 선다”는 지혜가 필요한 상황이다.

III.
다른 한편 김정일은 이번에 테러지원국이라는 주홍글씨를 떼었다고 해서 북핵 게임에서 완승한 것은 아니다. 김정일은 1994년 이후 14년, 2002년 이후부터는 6년이라는 귀중한 시간을 날려 보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명백하다. 김정일은 핵무기 보유가 수령체제를 유지하면서도 외부로부터 원조를 갈취할 수 있는 요술방망이라고 보기 때문에, 만난을 무릅쓰고서라도 일단 핵을 보유한 후, 경제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김정일은 한국과 일본은 미국의 종속변수이며, 북한이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해제되면 결국 두 나라도 고개를 숙이고 북한에 원조를 갖다바칠 수밖에 없다고 보고 있다. 이런 점에서 김정일은 나름대로 철저히 계산을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실제로 지난 7월 조총련에 보낸 “새로운 전환적 국면을 맞이한 조선반도 정세에 대하여”에서도 이 점을 노골적으로 밝히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세월이 김정일을 기다려주는 것은 아니다. 도탄에 빠진 민생을 도외시한 수령체제가 받아야 할 인과응보의 계산서는 김정일에게만 예외는 아니다.

여기서 김정일의 계산이 오산일 가능성이 점점 명확해 진다. 수령체제에서 후계자가 확보되지 않을 경우 ‘수령체제=수령’이 되어 수령이 사라지면 수령체제도 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령체제에 대한 세뇌와 수용소라는 공포를 수단으로 유지되어온 북한체제는 본질적으로 자신이 만들어온 세뇌의 신화라는 거미줄을 끊고 나올 수도 없다. 수령체제의 관성을 중지시킬 브레이크는 북한체제에서 본질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김정일 이후에 등장할지도 모른다는 ‘OO집단지도체제’는 외부세계가 자신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투사한 상상에 그칠 가능성이 농후하다. 따라서 김정일 수령체제의 최대 약점은 시간에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이번 북한이 발표한 김정일의 사진들은, 솔직히 정상국가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웃지 못할 희극으로서, 이런 치졸한 방법을 동원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북한체제가 취약하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모든 상황을 종합해 논리적으로 추측해보건데, 머리를 깎고 수술한 김정일이 어느 정도 뇌질환에서 회복은 했을지라도 건강에 중대한 이상이 온 것은 분명하다. 수령체제도, 수령도 그동안 탕진한 시간의 인과응보에 목표가 된 것이다.

IV.
그렇다면 이명박 정부는 어떻게 현 상황에 대처해야 할 것인가?

첫째로 6자회담의 성공을 위해 혹은 북핵폐기를 위해 북한에 뭔가를 지원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그렇게 할 명분도 근거도 없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원래 바라는 것이 없으면 협박당할 일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점은 공식적으로는 북한의 원조 요구에 항상 “핵무기 폐기가 실현되지 않는다면…”이라는 조건을 부쳐 한국 국민에게 대북 퍼주기를 거부하는 이유를 분명히 납득시키는 것이다. 즉 북한이 보유하고 있는 핵무기가 경제적 측면에서는 북한의 최대 취약점이라는 점을 부각시키고 이용해야 한다.

물론 한국의 자칭타칭 북한 전문가라는 자들은 대북정책에서 발상의 전환을 요구하면서, 북한에 대규모 원조를 줄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 이유들은 듣기에는 가상할 만큼 아름답다. 예를 들어 북한 실정에 대한 보다 정확한 정보를 얻기 위하여, 혹은 이제 북한이 경제회복을 위하여 노력하는 데에 한국이 도움을 주는 것이 국가안보나 아니면 통일 후의 통일비용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필요하다는 등등의 주장이다. 예를 들어 북한은 앞에서 말한 ‘정세판단문’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조선에 대한 국제적인 경제봉쇄를 주도해 온 미국이 그 주된 법적조치를 해제함으로써 우리나라는 앞으로 미국을 비롯한 세계 모든 나라들과 무역과 합영, 합작 그리고 금융거래를 지장 없이 진행할 수 있게 될 것이며, 세계은행이나 아시아개발은행과 같은 국제금융기관에서 융자를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북동아시아에서 세계에서 으뜸가는 경제대국들에 둘러싸인 요충지에 위치한다는 국제경제교류 상의 유리한 지리적 조건과 정보산업시대에 필수불가결인 희귀한 광물자원, 높은 교육수준의 인적자원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다는 주체적인 잠재력을 백방을 살릴 수 있게 됨으로써 2012년에 강성대국 건설의 대문을 충분히 열어나갈 수 있는 확고한 전망이 서게 되었다.”

이 인용문만을 보면 김정일이 마치 박정희식 개발모델을 선택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미 지난 10년 명백히 드러난 것처럼 북한이 경제개발을 원했다면 얼마든지 그 기회는 있었다.

문제는 수령체제와 경제개발을 위한 개혁개방이 물과 기름처럼 모순관계라는 점을 김정일 본인이 잘 알고 있고 강조해왔다는 점이다. 즉 박정희식 개발정책은 시장경제라는 외부세계의 경제체제와 개방적으로 연결하는 것이었고, 김정일이 바라는 것은 수령체제의 유지라는 조건하에 외부의 원조를 받아 “우리식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재건하겠다는 것이다.

핵게임에서는 미국의 취약점을 정확히 잡아 김정일 개인의 의지와 계산처럼 일승을 얻었더라도, 경제개발은 지도자 이외에도 수없이 많은 자발적인 경제주체가 참여해야만 그나마 성공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이때 ‘자발적’이라함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윤추구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바꿔 말해 “우리식 사회주의 계획경제”와는 결코 양립할 수 없으며, 설사 추구하더라도 받아온 원조물자를 김정일과 그의 수하들이 나눠먹는 조폭집단의 이익분배 이상이 될 수 없다.

V.
따라서 현 시점에서 이명박정부가 취할 대북정책의 핵심은 강경이건 온건이건 불필요한 말을 하지 않고 내실을 다지는 것이다.

바꿔 말해 외부적으로는 인도주의적 지원 이외에 “무위(無爲)”가 최상의 정책이며, 내부적으로는 “북한이 핵무기를 폐기하지 않는 한…”, “북한이 개혁개방을 하지 않는 한…” 대규모 원조는 불가능하다는 점을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밝히는 것이다.

특히 앞으로 당분간 북한은 그들의 쌍소리 사전에 있는 모든 언사를 동원하여 이명박정부를 비방할 것이고, 이에 상응하여 친북좌파들은 ‘대북지원 합창곡’을 부를 것이다.

논어에 이런 말이 있다. “나라에 도(道)가 있을 때는 말과 행실을 바르게 해야 하고, 나라에 道가 없을 때는 행실을 바르게 하되 말은 낮추어야 한다(邦有道, 危言危行; 邦無道, 危行言孫)”.

이번 노동신문 논평원의 천박하기 짝이 없는 협박, 그리고 습관적으로 ‘무조건 대북지원’을 주장하는 한국내 세력들의 무도(無道)함 앞에서는 조용하지만 결연한 행동이 최선의 약이다. 왜냐하면 시간에 쫓기는 김정일은 조만간 패착을 둘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김정일의 인생 전부가 패착이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