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북한에 대한 가장 주된 관심사는 지난 1월 8차 당 대회에서 김정은이 수령으로 옹립되면서 대두된 ‘김정은주의’가 과연 어떻게 불릴지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필자는 ‘김정은 애민주의’로 전망해본다.
먼저, 김정은의 수령 등극과 김정은 혁명사상(김정은주의)의 연계성을 살펴보자. 김정은을 수령으로 지칭하면서 다양한 수식어가 붙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인민적 수령’이다. 이 용어는 이미 제8차 당 대회 시 ‘총비서 추대사’에서 언급이 되었다. 인민적 수령은 크게 두 가지 의미가 부여된다. 하나는 과거처럼, 수령이 신격화 신비화 측면이 아니라 인간적 수령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인민을 위한 수령이라는 뜻이다. 2019년 3월, 제2차 전국당초급선전일꾼대회에서 김정은은 수령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내리면서 두 가지 측면을 강조했다. 최근 몇 개월 동안의 노동신문 사설에서도 김정의 수령 등극을 이 두 가지 측면으로 선전하고 있다. 11월 1일자 사설, ‘국가사업의 모든 분야에서 인민성을 더욱 강화하자’ 에서는 인민, 인민성 이라는 용어가 무려 69차례나 나온다. ‘인민대중제일주의’ 등 인민이 들어가는 용어들 까지 다 포함시키면 100회가 넘어 갈 것이다.
필자는 김정은의 수령 등극과 더불어 김정은이 직접적으로 수령으로 불려진다는 것을 노동신문의 사설(10.22)을 근거로 해서 25일, 처음으로 제시(2021 북한의 대변혁…김정은 수령등극과 함의, 데일리NK.10.25일자)한 바 있지만, 다시 검토해보니 이미 5월 14일에 김정은을 수령으로 지칭한 글(정론, 동태관 글)이 있었다. 이글에서는 김정은의 혁명사상도 제시되었다. 어떤 전문가는 ‘김정일의 혁명사상’이 처음 제시된 것이 10월 28일자 노동신문이라고 하는데, 아래 문장과 같이 5월 14일에 수령 지칭과 함께 김정은의 혁명사상이 표출된다(더 이전일 수도 있음).
“우리 당과 인민의 위대한 수령이신 경애하는 김정은 동지의 혁명사상, 정치철학은 시대와 력사, 혁명과 건설의 분야에 전면적이고도 세부적이며 심오하면서도 독창적인 해답을 주는…”
5개월이 지난 10월 말에서야 이런 사실들이 우리 사회에서 공론화된 것이 아쉬운 점이다. 정론(‘인민의 심부름군당’)과 그 이후의 몇 개의 사설들을 보면, 김정은이 수령으로 등극한 이유와 더불어 김정은 혁명사상(김정은주의)의 핵심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김정은주의가 어떻게 불릴지도 가늠할 수 있게 해준다.
앞서 제기했지만, ‘김정은주의’가 대두된 것도 김정은의 수령 등극과 관련성이 있다. 수령은 영도뿐만이 아니라 사상을 제시해야 하는 위치(지위)이기 때문이다. “수령은 탁월한 사상을 제시하여 인민대중이 나아갈 앞길을 환히 밝혀줘야 한다”고 한 노동신문 사설(2021.9.24.)이 이를 잘 대변해준다. 5월 14일자, 정론은 김정은 혁명사상과 관련하여 김정은이 한 말을 다음과 같이 옮기고 있다.
“나의 사상을 알려거든 인민을 섬기는 나의 마음을 읽으라.”
여기서 김정은주의가 인민과 연관됨을 알 수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도 나온다.
“인민의 심부름군이 되는 것, 여기에 경애하는 총비서 동지의 위대한 혁명사상이 있고 혁명철학이 있으며 이 세상 그 누구도 정립해보지 못한 필승불패의 불멸의 진리가 있다.”
이 문장을 통해 김정일 혁명사상의 핵심 키워드가 ‘인민의 심부름꾼’인 것을 포착하게 된다. 인민에 대한 ‘멸사복무’를 ‘김정은주의’의 목표로 설정했음을 보게 된다. 9월 24일자 사설에서는 이렇게 표현했다.
“총비서 동지께서 제시하신 모든 사상리론들에는 인민에 대한 열화같은 사랑과 절대적인 믿음이 맥박치고 있다.”
여기서, 김정은주의가 ‘인민사랑’에 포커스를 두고 있음을 재차 확인하게 된다. 이 사설에서는 김정은주의에 가장 걸맞을 만한 슬로건도 제시하는데 바로 아래와 같다.
“모든 것을 인민을 위하여, 모든 것을 인민대중에게 의거하여”
이것만 봐서는, 김정은주의가 ‘인민대중제일주의’로 불릴 확률이 높아 보인다. 그런데, 10월 28일자 사설(김성남)을 보면 “경애하는 총비서동지의 위대한 혁명사상과 인민대중제일주의정치…”라고 기술하면서 이 둘을 분리시킨다. 이 둘의 관계성은 앞서 기술한 11월 1일 자 사설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비록, 김정은주의, 김정은혁명사상이라는 용어는 나오지 않지만, 김정은 사상을 가리키는 무장들이 상당히 많이 나온다. 그 중에, 김정은이 지난 9월,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5차회의에서 한 연설의 요지를 제시하는 것도 있다.
“여기에는(김정은 연설) 철저한 인민중시, 열렬한 인민 사랑의 정치로 우리 인민에게 모든 행복을 안겨주시려는 경애하는 총비서동지의 확고부동한 의지가 맥박치고 있다.”
이 또한, ‘김정은주의’의 원리를 가리키는 문장이다. 사설에서는 김정은주의와 인민대중제일주의를 아래와 같이 연계하고 있다.
“일군들이 숭고한 인민관을 체질화하고 인민에 대한 헌신적 복무정신을 높이 발휘할 때 우리 당의 인민대중제일주의정치의 정당성과 생활력이 더욱 뚜렷이 확증되게 된다.”
“모든 일군들은 우리 당의 인민사랑의 뜻과 진정을 심장에 새기고 인민대중제일주의를 철저히 구현함으로써 당과 국가 앞에 지닌 성스러운 책무를 다해나가자.”
위 두 문장에 나오는 “인민에 대한 헌신적 복무정신” “우리 당의 인민사랑의 뜻과 진정”이 김정은의 혁명사상을 가리킨다고 필자는 이해했고. 이것들(김정은주의)이 발휘될 때, 인민대중제일주의가 구현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앞서 기술한 대로, 10월 28일 사설에서 김정은의 혁명사상과 인민대중제일주의를 분리해서 제시함으로 이런 풀이를 가능케 해준다. 상식적으로도 ‘인민대중제일주의’는 김정은보다 인민들만 크게 부각되는 측면이 있다. 김정일주의가 ‘김정일애국주의’로 불리듯이 김정은주의에도 김정은의 이름이 들어가지 않을까.
한편, 김정은주의를 설명하는 사설들에서 ‘강대한 나라’, ‘혁명무력건설’, ‘천하제일강국’ 등의 용어가 등장하고 9월 24일 사설에는 김정은 혁명을 ‘백두산공격정신’으로 연결시키고 있었다. 따라서, 필자는 핵무력과 직결되는 ‘백두산’이 포함된 용어가 제시될 것이라는 염두도 해봤다. 그런데, 5월 14일자 정론에는 ‘국가방위력’까지도 인민관과 연계해서 설명을 하고 있었다.
“강국의 지위를 론하는 데도 우리는 인민관에 립각하여 바라 보아야 한다.”
“결코 국가방위력의 수준이나 과학기술의 발전 그 자체만을 놓고 강국의 지위를 평가하는 것은 정답이 될 수 없다.”
“강국의 지위 즉 나라의 국력, 인민의 존엄과 지위는 인민이 얼마나 무탈하여 편안하고 화목하게 살아가는가 하는 것을 평가하여야 가장 정확하다고 말할 수 있다. 국가방위력도 이것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위의 문장들은 김정은주의가 ‘백두산’이 포함되는 용어보다는 인민관과 직결될 가능성을 높여준다. 동시에 김정은이 강력하게 내세우고 있는 ‘공산주의사회 구현’과도 맥이 맞닿아 있다.
그런데, 인민관은 이미 김정일주의(김정일애국주의:조국관, 인민관, 후대관)에 포함된다. 5.14일자 정론에 ‘그 누구도 정립해보지 못한 진리’, ‘또 하나의 새로운 정의’라고 기술한 만큼 이전과는 분명한 차별화를 가져올 것이다. 이를 종합해 본 결과, 필자는 김정은주의가 ‘김정은애민주의’로 불릴 공산이 크다고 본다.
“수령은 인민을 믿고 인민은 수령을 절대적으로 믿고 따르며 받들어 나가는 여기에 일심단결의 위력, 혁명대오의 정치사상적 위력이 있는 것이다.”(5.14 정론)
“위대한 수령께서는 인민을 끝없이 아끼고 사랑하시며 혈연의 정을 부어주시고 인민은 수령에 대한 열화같은 충성의 한마음을 안고 보답의 길만을 가고가는…” (11.2 사설)
위의 문장은 김정은주의를 가장 잘 대변해준다. 김정은이 ‘인민적 수령’으로 불리는 이유이다. 이 수령은 과거와는 달리 신격화 신비적 요소가 제거되었다. 인간적이며 친근한 동지적 개념의 수령이다. 수령의 성격에 대한 대전환이자 수령의 자리(위치) 낮춤이다. 이로 인해, 김정은이 수령으로 등극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만일, 과거처럼 신격화된 수령이라면 김정은은 이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김정은이 수령이 된 이유에는 크게 두 가지 논리가 작동된다. 하나는, 인민들의 절대적인 충성을 끌어내기 위해서, 다른 하나는 인민들을 최고로 잘 섬기기 위해서이다. 기가 막힌 역설이다. 전무후무한 역설정치를 펼치며 새롭게 열리는 김정은 시대의 내일이 더욱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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