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지뢰도발에 따른 대북심리전 방송으로 촉발된 무력충돌 위기가 남북협상을 통해 합의에 도달함으로써 일단락됐다. 북한의 ‘유감 표명과 대북방송 잠정중단’, ‘준전시상태 해제와 고위급회담 개최’, ‘이산가족 상봉과 남북민간교류 추진’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진 점은 위기관리와 남북관계 개선의 모멘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평가할 만하다. 박근혜 대통령의 말대로 ‘도발-협상-보상’의 악순환을 끊어 냈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렇다. 북한으로서는 남북긴장을 조성하고 남남갈등을 유도할 심산으로 ‘간보기 지뢰도발’을 감행했겠지만, 한국의 대북심리전 보복에 직면해 백기투항 한 꼴이 되었다.
이번 협상을 지켜보며 우리가 분명히 확인한 것은 ‘원칙’과 ‘힘’을 가지고 북한과의 대화와 협상에 나서야 한다는 교훈이다. 북한을 협상장으로 끌어내는 것도, 대화를 통해 우리의 요구를 관철하는 것도 ‘힘(power)’에 기반 한 대응이어야 만족할만한 성과를 도출해 낼 수 있다. 힘에 의한 관철은 국제질서의 냉엄한 현실이자, 남북관계의 현주소다.
북한 정권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번 협상결과가 반드시 실패한 회담만으로 평가되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의 입장에서야 북한이 우리의 원칙 있는 태도와 군사적·선전적 위력에 굴복했다고 말할 수 있지만, 북한의 입장에서는 얼마든지 해석을 달리 할 수 있다. 지뢰도발에 대해 유감표명한 것을 돌려서 선전하거나, 아예 알리지 않은 것은 북한같이 폐쇄적인 사회에서는 너무도 쉽다. 물론 외부정보에 밝은 몇몇 주민들은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겠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회담에 참여하거나 관여한 몇몇 당국자들을 제외하고는 회담의 전말을 알 길이 없다.
간부들도 발설하면 일벌백계로 처벌하면 그만이다. 김정은은 남북회담의 결과를 ‘장군님이 대담한 지략과 배포 있는 협상으로 확성기 방송을 중단시켰고, 남조선 괴뢰군을 굴복시켰다’고 체제선전 할 가능성이 높다. 이산가족상봉이나 남북 민간교류도 남조선 인민들에게 은혜를 베푼 것으로 꾸며대면 그만이다. “남한이 수령님의 은덕에 감복해 조공을 바쳤다”는 황당한 논리로 수령에 대한 우상화 선전을 해 온 것이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그것이 북한체제다.
북한이 휴전선 인근의 대북 확성기 방송에 왜 그리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일까? 북한 군부의 입장에서는 대북 확성기 방송을 통해 흘러나오는 자신들의 ‘최고 존엄’에 대한 모독을 그냥 손 놓고 지켜본다는 것은 자살 행위다. 김정은에 대해서는 수식어 없이 이름 석자만 언급해도 대역죄로 처벌하는 판국에 최고 존엄에 대한 비난을 묵과하다가는 제2의 장성택, 현영철이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그리고 김정은과 권력자들은 남조선이 수십만 군인들을 상대로 대놓고 외부소식과 금기사항들을 틀어 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다.
그들은 확성기 방송으로 휴전선에 배치된 수십만의 군인들과 인근 주민들의 정신적 혼란과 동요를 극도로 경계한다. 정권안보의 최후의 보류인 최정예 무력의 충성심을 일시에 무장 해제시킬 수 있다. 장마당 세대로 대표되는 20대의 젊은 군인들은 한국의 드라마나 영화, 음악 등에 익숙하고 외부 정보에 민감해 하는 것은 익히 알려져 있다. 김정은의 총탄이 되어야 할 군대가 무너지면 북한 정권이 배겨날 방법이 없다. 조중 국경에서 외부정부 유입이 걱정되어 손가락 크기보다 작은 USB 하나까지 일일이 검색하는데, 수십만 군인들을 상대로 대놓고 외부소식과 금기사항들을 틀어 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는 법이다.
국민들은 남북협상을 통해 북한정권이 외부정보 유입을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확실히 알게 됐다. 북한 또한 본의 아니게 대북심리전의 위력에 대해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되었다. 그러나 대북 확성기 방송 중단을 협상의 테이블에 올려놓았던 것이 적절했는지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물론 ‘비정상적인 사태가 발생하지 않는 한’이라는 단서를 달아 확성기 방송의 재개 여지를 남겨 둔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우리로서는 북한의 비대칭전략을 상대하는 것이 여간 까다롭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는 북한이 갖지 못한 비대칭전력으로 맞서는 것이 최선의 방어다. 대한민국이 가지고 있는 비대칭전력은 크게 3가지이다. 첫째는 발전된 대한민국의 존재 자체가 비대칭전력이고, 둘째는 강력한 한미동맹이 그것이며, 셋째는 대북 심리전이 비대칭전력이다. 이 중 북한의 비대칭전력에 대항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비대칭전력은 대북심리전 방송이다. 대한민국의 존재는 숨기거나 무시하면 되고, 한미동맹은 건들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대북 심리전은 피해갈 방법도 무시하거나 숨길 수가 없다. 북한 정권에게는 총이나 대포보다 더 아픈 ‘절대무기’다.
김정은 입장에서는 남북 간에 국지도발이 발생해서 북한군 몇 명 죽는 것이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김정은은 군인 몇 명 죽는다고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한국과 달리 보도를 통제하고 알리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대북심리전은 북한 군인, 주민들을 직접 상대로 하기 때문에 숨길 수도 없고, 거짓이라고 교육해도 먹히지 않는다. 1인 독재와 정보 폐쇄가 자초한 북한체제의 ‘자승자박(自繩自縛)’의 결과이다. 북한이 협상장을 박차고 나가지 않고, 확성기 방송 중단에 목을 매었던 이유다. 대북 심리전 방송이 지속되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