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봉선 칼럼] 제주 4·3 사건을 왜곡해서는 안 된다

제주 4.3사건 희생자 추념식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 /사진=연합

제주도는 8·15 해방이 되면서 외지에서 6만여 명이 유입되어 28만 명으로 인구가 증가하였다. 해방 전 일본군 징용노무자들과 오사카 등지에서 일했던 노동자 그리고 중국공산당 팔로군 출신의 좌익 과격분자 등이 많았다고 한다. 또한 제주도에 남로당 세력이 침투하여 사회주의 운동을 하던 좌익세력과 합세하여 순박하고 선량한 제주도민을 규합선동, 좌파세력을 확산, 제주도민 중 약 6만 명이 남로당에 가입하기에 이르렀다.

1945년 9월, 남한 내 미군정이 시작되자 제주도에서도 좌우익세력이 충돌하였다. 4·3사건 당시 남로당계 도지사 박경훈은 인민 투쟁위원장이었고 제주읍장이 부위원장, 각 면장이 면 투쟁위원장이 되어 사실상 남로당에 의해 제주도가 장악되다시피 하였다. 1948년 2월 남한만의 단독 총선이 결정되자 남로당은 이를 보이콧한 후 중앙 치안력이 못 미치는 제주도를 무장 폭동 적합 장소로 택했다고도 볼 수 있다.

사건과정

미군정이 시작된 지 9개월 만인 1946년 8월 1일부로 제주도는 행정구역상 전남에서 분리되어 군(郡)에서 도(道)로 승격되었다. 1946년 11월 제주도에는 가장 늦게 모슬포에 국방 경비대 9연대가 창설되었지만 모병의 어려움으로 9연대는 1947년 6월에 연대라는 대호에 겨우 1개 대대 병력정도였다. 또한 9연대 내부에는 남로당 프락치들이 많이 들어와 있었다. 당시 좌익세력은 1947년 1월 공산당이라는 이름을 쓰지 않고 민족통일 애국 청년회로 명칭을 바꾸어 본격적으로 활동을 하였으며 이념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마을사람 대부분이 남로당에 가입하였다. 헌병대, 정보기관, 경찰관과 극소수 우파세력을 제외하고 대부분이 인민위원회 세력하에 들어갔다.

우파로는 1946년 3월에 결성된 대한 독립 촉성 연맹 제주도 지부와 1947년 2월에 결성한 광복 청년회 제주지부가 있었는데, 동년 10월에 대동청년단으로 통합되었다. 우파단체는 마을 단위까지 조직화된 인민위원회에 비해 늦게 출범하고 세력도 미미하였다.

3·1운동 28주년을 계기로 제주 북 초등학교에서 약 10만여 명이 모였으며 이들은 모스크바 3상회의 지지, 남조선 과도 정부 반대, 미군의 철수 등을 외쳤다. 그러다 시위도중 발포 사건이 발생, 6명이 사망하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는 등 사건이 폭발·확대되었다. 남로당은 이 사건을 계기로 제주지역 166개 단체를 선동하여 3월 10일 총파업을 단행하였다. 당시 경무부장 조병옥은 총파업에 가담한 경찰 66명을 파면하고 미군정은 제주 군정장관에 베로스 중령을 임명하였다. 남로당은 1948년 2월 전국당원 30만 명을 동원하여 전국적으로 전쟁을 방불케하는 폭동을 일으키고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 반대, 미군 소련군 동시 철수, 이승만 김성수 친일파타도, 단독선거를 요구했다. 또한, 제주지역에서는 경찰서 습격, 순찰 경찰 생매장, 지서장 살해 등을 감행하였다. 당시 미군정 보고서에 의하면 남로당 폭도들은 경찰간부와 고위 공무원을 암살하고 경찰 무기를 탈취하라는 지침이 발표되었다. 4·3사건 직전 남로당 제주도당은 2월 20일경 폭동을 결정하고 군사부를 신설하여 4·3작전을 수립하였다. 이들은 한라산 지대에 과거 일본이 사용하던 동굴과 남겨 논 무기를 사용하면서 상호간에는 봉화(烽火)를 이용하는 계획까지 수립하였다.

4·3폭동 거사

남로당 폭도들은 1948년 인민유격대라는 이름하에 남로당원 김달삼의 지휘로 89개의 봉화를 신호로 제주도 24개 파출소 중 14개를 일제히 공격하였다. 이에 애월 지서장은 머리가 톱으로 잘렸고 일부경찰은 목이 잘렸으며 총에 맞아죽고 죽창에 찔리고 가족이 살해되기도 하였다. 남로당 인민유격대는 반공선무활동을 하던 서북청년단 숙소와 대동청년단을 습격하여 우익인사들을 살해하였다.

당시 모든 학교는 폐쇄되었으며 개교와 취학은 혁명이 승리하고 인민공화국이 승리한 후라고 단정하였다. 폭도들의 무장병력은 500명이고 부화 노동자가 1000여 명이다. 미군정은 4·3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5월 5일에는 ‘제주도 비상경비 사령부’를 설치하였다. 이어서 미군정은 즉각 각 도로부터 차출한 대규모의 군대, 경찰, 서북청년단 등 반공단체를 증파하였다. 여기에 맞서는 제주도 주민들은 한라산으로 들어가 인민 유격대를 조직하고 대항하였다. 무장대는 경찰과 서북청년단 등 극우 반공청년단체의 진압에 대한 반감과 저항, 남한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와 조국의 통일독립, 반미구국투쟁을 무장 항쟁의 기치로 내세웠다. 4·3 사건으로 제주도 일부지역에서는 5·10 총선거가 실시되지 못하고 연기되었다.

평가

이 사건은 1948년 4월 3일 남로당 반란 세력들이 경찰서 및 지서 12개를 일제히 공격함으로써 사건이 시작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사실상 6년 6개월간 유혈사태로 비화, 좌익반동에 의해 일어난 비극적 사건이다. 제주도 진압작전에서 전사한 군인은 180명 내외로 추정된다. 또 경찰 전사자는 140명으로 파악되고 있다. 제주 4·3 사건은 토벌과정에서 2만 5천~3만 명의 양민학살 피해자를 냈다. 결국 당시 상황은 현재의 잣대로 과잉 진압의 논란이 되고 있지만 제주도가 남로당에 의해 접수되었다면 그 결과는 우리가 상상하기 힘든 지경에 빠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이 사건으로 양민의 커다란 피해가 있었다. 이를 옹호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하지만 좌우가 충돌하여 부득이하게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4·3사건으로 인해 6개월 뒤 여순사건이 발생했다. 여수 주둔 14연대 하사관들이 제주 토벌 출동명령을 거부하여 일어났다. 초급장교나 하사관 세 명 중 한 명꼴로 좌익이었을 정도로 그 당시 실상은 충격적이었다. 이들 반란세력에 의해 국가가 전복되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을지 상상하기 어렵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 이어 문재인 대통령이 금년에 제주를 직접 찾아 ‘항구적인 평화와 인권을 향한 열망’이 4·3사건이라고 자평하고 4·3사건을 ‘낡은 이념의 굴절된 눈’으로 진실을 외면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힐난했다. 사건에 실체를 국가원수가 너무 한쪽으로 경사된 시각으로 보고 있는 건 아닌지 우려스럽다. 지난 4월 7일 주말에도 광화문에서 좌파단체들이 ‘4·3은 학살이고, 주범은 미국’이라는 과격한 구호를 외쳤다. 미 대사관을 찾아가 사죄를 요구하고, 이적단체 범민련 등이 합세 ‘통일방해 내정간섭 미국 규탄대회’도 열었다. 북핵 위기의 속에서 사건의 실체를 호도하면서 동맹을 극렬 비난하는 이러한 행태는 여기가 북한이 아닌지 자문해보는 지경에 이르렀다. 마치 천안함이나, 세월호 사건과 같이 본질이 변질될지 우려스럽다.

*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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