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유학생, 김정일 배지 내팽개치며 욕설”






▲ 1962년 불가리아 북한 유학생이었던 이상종(왼쪽) 씨와 이장직(오른쪽) 씨 ⓒ김봉섭 기자
1962년 8월 불가리아에서 북한 유학생 4명은 ‘6.25전쟁은 북한의 침략전쟁이다’, ‘북한이 말하는 체코식 경제개발계획은 허구다’ ‘김일성 선집을 읽는 것보다 성경을 읽는 게 맞는 일이다’ 등의 내용을 담은 성명을 발표했다.


이들은 곧바로 북한 주재원들에 붙잡혀 강제송환에 직면했지만 가까스로 탈출했다. 이후 불가리아 국적을 취득할 수도 있었지만 29년간을 무국적자로 지내다 비로소 1991년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이들 중 이상종 씨와 이장직 씨가 14기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사무총장 김병일) 해외지역회의 참석차 한국을 방문했다. 데일리NK가 10일 이들을 만났다.


1936년생 동갑내기인 이들은 아버지가 항일운동을 했고(이장직), 소작농이라는(이상종) 출신성분 덕에 학교 추천으로 유학생 후보에 올랐고 이후 도(道)와 중앙의 까다로운 심사를 거쳐 1956년 21살의 나이로 불가리아 유학길에 오를 수 있었다.


당시 북한은 러시아, 동독, 헝거리, 체코,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 동유럽 국가에 유학생을 파견했다. 이장직 씨는 “당시 김일성은 불가리아 250여명을 포함해 2천여 명의 달하는 학생들을 유학케 했다”면서 “전쟁이후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은 북한의 전쟁고아, 유학생, 대학생들을 유학생으로 받아들이는 정책을 폈고 북한도 간부 육성 차원에서 적극 활용할 목적이었던 것 같다”고 회고했다.


당시 이들이 불가리아에서 반체제활동을 계획할 수 있었던 건 자유롭게 정보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북한의 체제선전에 대한 비판의식으로 이어졌다. 특히 이들은 북한이 스탈린 노선을 지지했던 반면, 불가리아는 이를 비판하던 후르시초프 노선을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반체제활동 계획을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고 전했다.


이상종 씨는 “당시 우리가 성명 내용에 불가리아와 후르시쵸프 노선을 지지한다고 밝힌 것은 불가리아 정부의 지지를 얻기 위한 행동이었다”고 소개했다.


이장직 씨는 “북한이 유학 3년만인 1959년 여름방학 시기에 모든 유학생을 일시 송환해 1개월가량 사상교육을 시켰는데 그때 북한이 통제사회라는 것을 더욱 확실히 알 수 있게 했다”고 말했다.


북한으로 소환된 250명 중 다시 불가리아에 나올 수 있었던 인원은 80여명에 불과했다. 4명만이 성명에 참가한 이유에 대해 이들은 “당시에도 북한의 통제와 감시는 엄청났다. 사람이 많을수록 사전에 들킬 위험이 컸다”고 말했다.


성명발표 이후 북측 대사관에 붙잡힌 4명은 2명씩 따로 감금됐는데, 이상종 씨와 이장직 씨는 소홀한 감시망을 틈타 감금 1개월여 만에 탈출에 성공했다. 이들이 탈출한 4일 후에 불가리아 정부는 북한이 탈출 학생들에게 자유를 보장하지 않을 시에는 대사관을 철수해야 한다고 통보했다. 당시 불가리아 북한대사는 임춘추였다.


그로부터 한 달 후 대사관 직원들은 붙잡은 나머지 2명을 데리고 북한으로 귀환하려 했다. 그러나 매일 평양행 비행기편을 체크하고 있었던 이상종 씨 등이 루마니아·중국 유학생 친구들과 함께 공항에서 나머지 2명을 극적으로 구출했다. 이 일이 있었던 이후로 북한과 불가리아는 8년간 공식적인 외교관계가 끊겼다.








▲ 이들은 14기 민주평통 해외지역회의 참석자 한국을 방문했다. ⓒ김봉섭 기자


현재도 북한 유학생들과 친교를 맺고 있다는 이들에게 그들의 생활에 대해 소개를 부탁하자 한참 후에야 이장직 씨는 “아주 불쌍하다”고 말문을 열었지만 목소리는 심하게 떨렸다.


눈시울까지 붉어진 그는 “불과 2년 전 일이다. 북한으로 돌아가는 외교관이 백화점에서 밀가루를 사가더라. 비행기 운송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사다 나르는 것을 보면 그만큼 북한에 먹을 게 없어서 일 것이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 유학생 몇몇과 집에서 술을 마시면 북한 사람들끼리는 서로가 눈치를 보며 아무런 얘기를 하지 않는다. 그만큼 서로를 믿지 못해서다. 후에 일대일 술자리에서는 김부자(김일성·김정일) 배지를 방바닥에 내팽개치며 욕설을 퍼붓는 일도 있었다”고 소개했다.


이어 “어느 정도 술자리가 깊어지자 자기들도 북한체제를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 북한사회가 자유가 없다는 것에 대해 불만이 가장 크고 다시 돌아가는 것을 두려워한다고 했다”고 전했다. 취중진담인 셈이다.


이상종 씨는 “북한은 주변 유럽 국가들과도 외교관계를 형성하고 있지만 돈이 없어 불가리아 대사관이 중심 역할을 하면서 관리하는 체계”라며 “한국대사관 직원이 4명 정도지만, 북한 불가리아 대사관 직원은 25명가량으로 가족까지 포함하면 많게는 100명 정도가 아닐까 싶다”고 소개했다.


이들의 생활에 대해서도 “오래된 외교관 차량을 봐서도 형편이 무척 어려워 보인다. 또 대사관에서는 호랑이 그림을 대학 전시회에서 팔고 있고 있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김일성 생일에 발칸반도에서 선물을 모아 북한으로 선물을 보내는 일도 빼 놓을 수 없는 불가리아 외교관의 중요한 일”이라며 “4월초가 되면 불가리아 소피아 공항에 북한 비행기가 들어와 직항으로 물자를 실어 간다”고 귀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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