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어제와 오늘] 김정일의 사망 II : 김정은 시대의 개막

북한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김정일의 사망 당시 이를 어떻게 알았는지 기억하고 있을 듯하다. 이는 그동안 북한 비밀 문건을 지속 탐구·연구해왔던 필자도 마찬가지다.

2011년 12월 18일. 김정일 사망 공보 전날 저녁 친구와 함께 카페에 있었는데, 농담식으로 ‘미래를 예측할 수 없지. 예를 들면, 북한 김정일이 내일이라고 죽을 수 있지’라고 했었다.

다음 날 고려대학교 앞 사거리를 건너는데 휴대전화가 울렸다. 어제 만난 친구의 ‘김정일 사망했다. 표도르 말대로’라는 문자를 보낸 것이다.

북한에서 새로운 시대의 서막이 울렸지만, 대부분은 무감각했다. 필자는 그날 서울 거리에서 ‘김정일’이라는 말을 한 번 들었던 것 같다.

다만 한국 매체들은 발빠르게 대처했다. 예컨대, MBC방송은 낮 12시 SK 그룹 회장 최태원이 검찰에 감사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보도하다 40초 정도 흐른 후 ‘북한 김정일 위원장 사망’을 선포하고 즉시 후속 보도를 하기 시작하였다.

북한에서는 분위기가 조용했던 것 같다. 국가매체들은 눈물이 흘리는 사람들을 보여주었지만, 대체적으로 원래 하던 일을 계속하고 있다는 보도가 지속되었다.

북한 당국은 깃발을 조기(弔旗)로 게양하기를 시작하였다. 물론 군사분계선 북쪽에서 휘날리는 인공기도 예외가 아니었다. 전 세계 북한 대사관들도 그랬다. 중국 랴오닝(遼寧)성 단둥(丹東)에서 북한 사람들에게 조화(弔花)를 판매하기 시작하였다. 다만 귀국 명령이 내려지지 않아서인지 요구자는 많지 않았다고 한다.

12월 19일은 당시 한국 대통령 이명박의 생일이었지만, 경축 할만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는 김정일 사망 소식을 천영우 외교안보수석 보도받은 직후 긴급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소집하였고 북한 정세를 토론하였다. 국군도 비상경계태세에 돌입했다.

12월 20일 북한 신문들은 첫 페이지에 김정일의 거대한 초상화를 게재하였다. 두번째 페이지에는 리춘희 아나운서가 읽었던 사망 공보가 있었다.

제3페이지엔 국가장의위원회 목록이 나왔고, 사망 원인이 ‘심한 심장성쇼크’였다는 설명도 있었다. 또한, 김정일의 시신을 금수산기념궁전(현 금수산태양궁전)에 안치할 것이라는 사실과 12월 17일부터 12월 29일까지 애도기간을 선포하겠다는 이야기도 실었다.

장례식은 12월 28일에 진행될 예정이었다. 다만 외국 사람들이 아예 장례식에 참가할 수 없다는 것도 선포하였다. 이 같은 보도 형식은 1994년 김일성 사망 보도 형식에 따라갔다.

김정일 사망 직후에 나왔던 북한 당국의 지시들 중의 하나는 시장 차단 지시였다. 이 조치는 오랫동안 유지되지 못하였다. 12월 21일에 일부 장사꾼들은 이미 시장에 나왔고, 25일에 시장들은 대부분 문을 열었다. 흥미롭게도 김정일의 사망은 시장 가격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애도 기간 질서 유지에 보위사령부까지 나섰고, 주민들에게 5명 이상 모이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 때 당시 북한에서 김정일 동상들이 그리 많지 않았고 당국도 주민들도 애도행사를 어디서 해야 할지 갈팡질팡했다. 보통 김일성 동상이나 영생탑 근처에 했지만, 함경북도 회령시에서는 김정숙 동상 인근에서 진행하기로 결정하였다.

12월 25일 당국은 주민들에게 ‘김정은 동지께 충성의 편지’를 쓰라고 지시하였다. 북한에서 이런 캠페인들은 1970년대부터 존재하였다.

김정일 시신. /사진=조선중앙통신

인민복을 입은 김정일 시신은 붉은 기로 덮여 있었다. 시신은 이미 미라화를 했지만, 나중에 북한은 러시아의 도움을 요청하였고 모스크바에서 전문가 팀이 파견되었다.

/사진=조선중앙통신

김정일 베개에 조금 이상한 그림이 보였다. 무슨 상징인지 알 수 없지만, 투르크메니스탄의 전통 양탄자처럼 보였다. 다만 김일성 사망 시에도 유사한 베개 모양이 사용되었다.

전체 장례식 과정도 김일성 때와 유사했다. 식에 북한 최고 간부 여러 명이 참가하였고, 김씨 일가의 모습도 보였다. 김정일의 마지막 부인인 김옥도 볼 수 있었다. 김정은의 형제자매들 중 김여정만 나왔고 김정철이나 김정남은 장례식에 불참한 것 같다.

북한은 한국 사람을 외국인으로 보지 않는다. 이에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와 현정은 현대 그룹 회장이 방문하였다. 한국 정부는 대표단을 파견하지 않았지만 일부 종북 단체 대표자들은 통일부 허가 없이 방북하였다.

북한 매체는 중요한 문제에 직면하였다. 북한 내 김정은 승계 캠페인은 이미 1년 이상 진행되었지만, 노동신문을 비롯할 각종 매체에 김정은 찬양은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이에 발빠르게 대처하기 시작한다.

12월 20일판 노동신문은 김정일의 이름을 굵은 자로 표기했지만, 김정은의 경우 그러지 않았다. 다만 같은 날 발행된 민주조선에서는 부친처럼 굵은 자로 써 있었다. 민주조선은 노동신문보다 조금 늦게 나온다. 그 사이에 특수 문자로 쓰라는 지시가 나왔다고 추측해 볼만한 대목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김정은을 북한 최고지도자라고 할 만한 호칭이 없었다는 점이다. 2009년부터 2010년까지 주로 ‘청년 대장’이라고 호칭했고, 2010년부터 북한 당국은 ‘존경하는 김정은 군사위부위원장’ 또는 ‘존경하는 김정은 동지’라고 부르라고 지시하였다.

김정일 사망 직후 김정은의 칭호는 날마다 진화한다. 24일에 노동신문은 그를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이라고 호칭하였지만 다음날 그는 ‘우리 혁명 무력의 최고령도자’되었고, 27일엔 ‘우리 당과 국가, 군대의 영명한 령도자’가 되었다. 그리고 28일엔 잘 알려진 호칭인 ‘우리 당과 국가, 군대의 최고령도자’라는 표현이 처음 나왔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김정은의 모친 고용희를 어떻게 처리할지 난제로 부상했다. 일본 출신 배우라는 점은 ‘최고령도자 동지의 어머니’와 맞지 않았다. 이에 김정일 사망 직후 고용희에 대한 찬양은 중단되었다.

반면 김정은 찬양은 강화된다. 일례로 24일 노동신문에 ‘인민이여 우리에겐 김정은 대장이 계신다’는 시가 게재되었다. 다만 북한의 입장에서 잘 쓰여진 건 아니었던 것 같다. 지금은 북한 선전에서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26일 북한 매체에서 김정은 찬양 구호가 나왔다. 바로 ‘경애하는 김정은 동지를 수반으로 하는 당중앙위원회를 목숨으로 사수하자’였다. 이는 추후에 ‘김정은 장군을 목숨으로 사수하자’라는 노래로 발전하게 된다.

북한 최고지도자 숭배의 특징 중의 하나는 초자연적인 능력이 있다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한국에서도 인기 좀 있는 ‘장군님은 축지법을 쓰신다’라는 노래가 있다.

동에번쩍 서에번쩍 천하를 쥐락펴락.
구름타고 오르신다 최전연고지 우(위)에.
수령님 쓰시던 축지법 오늘은 장군님 쓰신다.

‘미신’에 결사 반대하는 북한은 김씨 일가에 대한 이런 미신을 열렬히 선전하는 코메디를 보여준다. 김정일 사망 당시 노동신문은 ‘장군님의 고향’인 백두산이 12월 16일부터 19일까지 ‘흔들렸다’고 주장하였다. 물론 왜 이 지진이 김정일이 사망한 전에 시작했는지 설명은 없었다. 또한 신문은 올빼미, 접동새 그리고 독수리까지 김정일 사망에 울었다는 보도까지 있었다.

국가장의위원회 제4호인 리영호 외에 이 시기의 또 하나의 중요한 인물은 김정은의 고모부 장성택이었다. 25일 그는 갑자기 조선인민군 육군 대장까지 진급되었다. 일부 전문가들은 이 사실을 두고 장성택이 북한의 2인자가 되었다고 해석하였다.

여기에 우리는 좀 흥미로운 문제에 대면한다. 북한에서 인민군 차수부터 공화국 대원수까지 계급을 당 중앙군사위원회가 수여하지만, 소장부터 대장까지 계급은 인민군 최고사령관은 수여한다. 그러나 12월25일 기준으로 북한군에 현임 최고사령관은 없었다. 김정일은 이미 사망하였고 김정은이 아직 최고사령관으로 임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성택이 어떻게 이 계급을 받았는지 알려진 바는 없지만, 재미있게도 2012년 장성택이 정치국 위원까지 진급해서 노동신문에 그의 약전(略傳)이 나왔을 때 그가 육군 대장인 사실은 언급되지 않았다.

대장복을 입고 있는 장성택. /사진=조선중앙통신

‘아이러니’한 장면은 또 있다. 28일 진행된 장례식엔 김정일의 시신이 있는 관을 1976년형 링컨 컨티넨탈 리무진 위에 놓았다는 점이다. 반미(反美) 국가의 지도자 장례식에 전 미국 대통령 호칭이 들어간 미제(美製) 자동차가 사용된 사실은 대단히 흥미롭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관 옆에 북한 최고 간부 8명이 호위했는데, 오른 쪽에 있는 사람들은 민간복을 입고 있었고, 왼쪽에 있는 자들은 군복을 입고 있었다. 재미있게도, 대장이었던 김정은과 장성택은 군복을 입지 않았다.

이래 사진을 통하여 순서를 확인할 수 있다.

김정일 장례식. /사진=조선중앙통신

상기한 ‘8인 원로’의 목록은 국가장의위원회 구성과의 달랐다. 이들 중 김영남이나 최영림은 없었다. 이 8명이 나라의 실권자처럼 여겨졌다.

그렇다면 김정은과 함께 행진한 이 7명은 향후 어떤 운명을 맞이했을까?

리영호와 장성택은 숙청되었다. 김영춘은 사임한 후에 인민군 원수로 진급했고 2018년 사망했다. 김기남은 2016년부터 당 중앙위 선전선동부 부장으로 지내왔다. 김정각은 2013년 김일성군사종합대학 총장이 되었고 2016년 정치국 위원에서 중앙위 위원으로 강등되었다. 김정각의 강등과 함께 최태복은 정치국 위원까지 승진되었다. 그리고 북한 매체에서 우동측에 대한 언급은 사라졌다. 사임했거나 숙청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나왔다.

결국 2명 숙청, 1명 사임, 2명 진급, 1명 강등, 1명 행방불명이라고 요약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중요한 건 이들 중에 2인자가 된 사람이 없었다. 전체 권력은 김정은의 것이었다.

장례 행진의 출발점과 종료점은 같았다. 바로 금수산기념궁전이었다. 북한은 이후 이를 금수산태양궁전으로 개명하기로 결정하였다. 김정일의 미라는 이 궁전에 보관되었다. 12월 김정일은 사후로 4번째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영웅 칭호를 얻었고, 2012년에 대원수로 진급되었고 김일성훈장도 받았다.

29일 애도기간은 끝났다. 마지막 날 김정은은 탈북민에 대해 연좌제를 적용하라는 명령을 하달하였다.

신임 최고 지도자는 탈북민이 발생하면 ‘3족(族)을 멸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런 잔혹한 정책은 나중에 취소된 것으로 보이지만 김정은이 탈북 문제에 대한 대단히 신경을 쓰고 있다는 점을 엿볼 수 있었다.

다음 날 김정은은 군대의 최고사령관이 되었다. 이 직위에 그를 임명하는 조직은 중앙위 정치국이었고, 조금 웃기게도 김정은은 당시 아직 정치국 위원 자격이 아니었다. 결정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 김정은동지를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 높이 모시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주체 100(2011)년 10월 8일 유훈에 따라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이신 경애하는 김정은 동지를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 높이 모시였다.

‘주체 100(2011) 년 10월 8일 유훈’은 김정일의 ‘백두에서 개척된 주체혁명위업을 대를 이어 끝까지 계승완성하여야 한다’는 연설이었다. 당시 비공개 연설이었지만, 2016년에 김정일 선집 증보판에서 출판되었다.

장례식은 그렇게 끝났고, 김정은 정권은 이명박 정권과의 계속 대립할 것이라고 선포하였다. 2011년 12월 31일에 노동신문은 국방위원회 선언을 게재하였고, 이 선언을 통해 ‘남조선괴뢰역적패당’을 공격하였다:

세계는 위대한 령도자 김정은 동지의 두리에 굳게 뭉쳐 슬픔을 용기로, 눈물을 힘으로 바꾼이 나라 천만군민이 어떻게 최후 승리를 이룩하는가를 똑똑히 보게 될 것이다.

이 메시지에 김정은을 ‘위대한 령도자’라고 지칭하였다. 원래 북한에서 위대한 령도자라고 부르는 자는 김정일뿐이었다. 김정은이 곧 오늘의 김정일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고 볼 수 있다.

2012년 4월까지 김정은은 노동당 당수와 국가원수의 자리를 얻지 않았지만, 사실상 12월 19일에 리춘희가 그를 김정일의 후계자로 선포한 후에 그는 북한의 군주였다.

김정일 시대 북한 당국의 시장에 대한 태도가 복잡했지만, 2010년부터 주로 장사 행위는 합법화되었다. 이 경향은 김정은 시대의 ‘우리식 경제관리제’의 도입으로 강화되었다.

김정은은 부친보다 탈북 문제에 대한 신경을 썼고 2011년 12월부터 현재까지 국경 통제를 위하여 주력하고 있는 상황이다.

미래를 알 수 없지만, 향후에도 이러한 경향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즉, 덩샤오핑이나 흐루쇼프식 개혁은 없을 것이지만, 내부를 철저히 통제하면서도 변화를 만드려는 시도는 할 것이다. 김정은은 김일성-김정일이 세운 길에 따라 나라를 이끌고 있다. 참으로 그는 선대의 계승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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