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6월 4일에 있었던 일명 ‘보천보전투’를 보도했던 한 일간지에서 최현이 김일성을 어린아이 다루듯 했다는 내용도 있는 것으로 미뤄 보아 항일무장투쟁 당시 김일성과 최현의 관계는 수직적 권력관계였다기보다는 수평적 유격대 동지 정도로 형성돼 있었다고 사료된다.
“(중략) 그리하야 김일성은 작년부터 비로소 활동을 하여오며 부하의 훈련 전법의 연구들을 게흘리 하지 안허 지금에 이르럿고 최현은 수십년 이어 준비를 하여오든 자로 나이 오십을 넘엇는데 김일성을 어린아히와 같이 취급을 하고 잇는거으로보아 그의 실력을 엿볼수 있다고 한다.”– 동아일보, 1937년 6월 8일자.
이 기사에서 최현의 나이는 잘못 기재됐다. 최현은 1907년생이기 때문에 보천보 전투가 발생했던 1937년 당시는 30세였다. 그러나 30대 청년과 50대 장년의 나이가 혼동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보천보 전투에 최현이 참가하지 않았을 수 있다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키는 내용이다. 실제로 최현은 회고록에서 자신이 보천보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음을 방증하는 대목을 밝히고 있다.
“(중략) 우리는 그 후방 일꾼 동무에게서 김일성 동지 친솔 하의 육(六)사 부대가 보천보 진공 전투를 승리적으로 결속지었다는 기쁜 소식을 알게 되었다.…(중략)…며칠 후 김일성 동지는 보천보를 승리적으로 진공하여 삼천만 인민의 가슴마다에 해방의 횃불을 지펴주신 후 추격해 오는 적들을 다시 구싯골에서 섬멸하고 희샤즈거우 밀영으로 도도히 개선하셨다.”– 최현, ‘혁명의 길에서’ (국립출판사, 1964), p.223.
그렇다면 당시 보천보 전투에서 김일성과 함께 활약했던 인물은 최현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따라서 당시 동아일보의 보도는 오보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동아일보 기사에서 추정할 수 있는 부분은 당시 최현의 명성이 김일성을 능가할 정도로 높았다는 점과 김일성을 어린아이처럼 대했던 인물이 누구였든지 당시 김일성의 위상은 독보적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기사에 따르면, 김일성은 1936년부터 비로소 무장투쟁 활동을 하기 시작했으나 최현은 수십 년간 유격대 활동을 해왔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또한 최현으로 알려진 자가 김일성을 어린아이처럼 대했다는 내용은 당시 김일성의 권력 지위가 그리 높지 않았다는 점을 말해준다.
보천보 전투는 북한에서 주장하는 것과 달리 극히 미미한 전과만을 올렸던 전투였다. 이 점은 많은 학자가 공히 주장하고 있는 바다. 북한에서는 보천보 전투에 관해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 중 가장 큰 성과라고 주장한다. 이 전투에서 김일성 부대가 일제 군경을 전멸시키고 일제 경찰관 주재소·면사무소·소방서 및 우편국·농사시험장·산림보호구를 습격하여 해당 건물들을 전소시켰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조선인민혁명군은 이로써 국내 진공의 목적을 달성하고 철수를 했는데, 철수 시 많은 주민이 이들을 도와서 노획물자 운반에 동참하고 가담했다고 밝히고 있다. 조선인민혁명군은 구시산과 간삼봉(間三峰)에서 추격하는 일본군을 또다시 격퇴했다고 선전한다.
그러나 보천보가 인구 1300여 명의 작은 마을이었고 무장병력은 주재소 순사 5명 뿐이었으며 전투의 성격이 이들을 상대로 한 물자보급투쟁이었다는 주장이 있는 것을 볼 때, 이를 가리켜 역사적인 항일 승리전투라고 하는 것은 조작에 불과하다. 당시 동아일보의 기사를 다시 보자.
“[함흥지국전화] 사일 함남 갑산군하 보천보에 김일성파 2백여 명이 습래하였다함은 누보하였거니와 금육일 오전까지에 판명된 피해액은 약 오만 원 가량이라는데 습격 당시에 살해된 사람은 일본 내지인 두 사람으로 작보한 우근소람랑은 즉사하였고 순사부장 딸야내 에미꼬 2세는 작십시사십분에 절명되었다.”– 동아일보, 1937년 6월 7일자.
“[함흥지국전화] 보천보를 습격한 2백여 명의 비적단과 추격경관대는 드디어 충돌되었다. 금일오후 일시경 압녹강대안 십삼키로지점, 이십삼도구에서 대천부대 삼십여 명 경관과 김일성일파가 충돌되었는데 경관측에서는 즉사 사명, 부상 십이 명, 김일성파에는 즉사 이십오 명 부상 삼십 명을 내이고 방금도 격전중이다.”– 동아일보, 1937년 6월 5일자.
이 두 기사에 따르면, 2백여 명의 병력을 동원해 습격 당시 두 사람을 살해했는데 그것도 일본 민간인들이었다. 다음날인 6월 5일에는 일본 경찰 4명을 살해했지만 김일성 부대에서는 25명이 희생되고 30명이 부상당했다. 기관 방화 및 파괴는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 같은 전투 성과를 두고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 가운데 가장 큰 업적이라고 선전한다면 그의 투쟁 경력이 어떤지 짐작할 만하다. 북한에서는 보천보 전투에 조선인민혁명군의 국내 진공이라는 의미를 두고 있는 듯하나 그것 역시 잘못된 평가이다. 앞서 기술됐듯이 4년 전인 1933년에 최현과 최춘국이 온성 지방에 들어와 부일 조선인 순사를 살해한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최현의 국내 진입은 군에 의한 공격은 아니었지만 항일무장투쟁이라는 맥락에서는 보천보 습격의 성격과 유사하기 때문에 김일성의 보천보 습격이 국내 진공에 별다른 의미를 지니는 것도 아니다. 또한 보천보 전투의 성격은 최현의 온성 진입과는 달리 기실은 그 지역 주민들에 대한 약탈과 만행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두고 항일무장투쟁의 공적이라고 자랑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중략) 보천보 주재소를 습격하는 동시 다른 일대는 각지와의 전화선을 절단하고 우편소 면사무소 삼림보호구사무소 등에 방화하는 일방 약백여호의 촌락을 포위하고 약탈을 마음대로 하다가 한시간만에 대안으로 도주한 사건이 돌발하야 보천보촌락의 천여명주민은 공포에 떨게한 소위 제이동흥사건을 일으키었다.”– 동아일보, 1937년 6월 8일자.
이 기사에서는 보천보 사건의 성격이 명확하게 나타난다. 그것은 공산 비적들의 민간인 습격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김일성을 비적으로 규정하고 있던 당시의 여론은 보천보 사건 한 해 전에도 존재했었다. 예컨대 조선일보(朝鮮日報)는 1936년 10월 4일에 김일성이 40여 명과 함께 스류다오거우(十六道溝)라는 작은 마을에 사는 박흥룡(朴興龍)이라는 한인 농부의 집을 습격하여 소와 곡식을 가져갔다는 기사를 싣고 있다. 그밖에도 당시 김일성의 활동에 관한 보도들은 대부분 그를 비적으로 다루면서 그의 약탈 행위를 규탄하는 내용이 주를 이뤘다. 비록 보천보 사건이 당시 일본군과 경찰에 상당한 충격을 준 것이 사실이고 김일성을 일약 유명하게 만든 사건이라 하더라도 그 후과는 더 심대했다.
보천보 사건 직전 일본 군경은 한 만 국경 경비를 강화하고 있었고 ‘3개년 치안숙정계획(1936년 4월~1939년 3월)’을 세워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1937년 7월 중일전쟁을 앞두고 만주와 북한 지역은 안정돼 가고 있다는 판단을 하고 있던 차에 보천보 기습사건을 맞은 터라 그들의 충격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뿐만 아니라 국경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현지 주민들로 조직된 ‘갑산공작대’의 협조하에 이뤄진 사건이라는 점은 일본군의 자존심을 몹시 건드린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이에 따라 보천보 사건은 현지 주민은 물론 한 만 국경 일대의 한국인들에 대한 일본군의 검거 선풍을 유발하여 너무나 큰 고통과 비극을 안겨주고 말았다.
동아일보 기사에서 주목되는 또 다른 내용은 보천보 사건을 ‘제2의 동흥사건’으로 규정하고 있는 부분이다. 동흥사건은 보천보 전투보다 2년여 앞선 1935년 2월 13일에 있었다. 이홍광(李紅光)이 공산군 2백여 명을 이끌고 평안북도 북동부 후창군 (厚昌郡) 동흥읍(東興邑)을 습격하여 다수의 인명 피해를 낸 사건으로 그 규모에 있어 보천보 전투보다 더욱 큰 사건이었다. 그러나 동흥사건에 관해서 북한에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그 까닭은 동흥사건에 김일성이 참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천보 전투는 김일성이 주도적으로 수행한 전투이기에 그를 미화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북한의 역사왜곡 수준을 알 수 있다. 동흥사건 외에도 북한에서 김일성이 참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북한에서 항일무장투쟁의 성과에서 의도적으로 누락시키고 있는 전투는 다수 존재한다. 1920~40년대 만주에서 전개된 김일성 이외의 항일독립운동은 북한의 현대사 기술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우리가 다 알고 있고, 국제적으로도 잘 알려진 1920년대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이 수행했던 봉오동 전투를 비롯하여 김좌진 북로군정서 독립군 부대의 청산리 대첩, 1930년대 이청천 등 한국독립당군의 동경현성 대첩 등 일본군의 연대 및 사단급 병력을 대파한 민족주의 노선의 항일무장투쟁은 북한의 역사 기술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멀리 갈 것 없이 김일성의 측근이던 최현이 주도했던 전투들 역시 김일성의 우상화에는 장애가 됐던지 그 업적에 관해 이렇다 할 기술이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앞서 인용된 김일성의 회고록에서 간략히 제시돼 있는 게 전부인데, 그것도 차후 김일성 우상화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주민들의 충성심을 끌어내기 위해 ‘절대 충신’ 최현의 캐릭터를 부풀리려는 의도를 지닌 것이었다고 판단된다. 최현은 보천보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았지만 그 직후 있었던 전투에서는 대단한 활약상을 보였다. 북한이 대대적으로 선전하는 보천보 전투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혁혁한 성과를 거뒀던 간삼봉 전투가 그것이다.
1937년에 벌어졌던 무산지구 전투, 보천보 전투, 그리고 간삼봉 전투는 당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의 기획 하에 이뤄졌던 일련의 완결성을 지니고 있었다. 1937년 3월 무송현 서강(西崗) 양목정자(楊木頂子) 회의가 열렸다.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예하의 사장들이 모인 간부회의였다. 이 자리에는 제2 사장 중국인 조아범(曺亞範), 제4 사장 중국인 주수동(周樹東), 제6 사장 김일성뿐 아니라 제4사의 제1단장이었던 최현도 참석했다. 주요 간부회의에 김일성과 동등하게 최현이 참석했다는 사실은 동북항일연군 내에서의 그의 지위를 잘 말해준다. 이 회의에서 결정된 내용을 살펴보면 최현이 보천보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보천보 전투에 앞서 벌어졌던 무산지구 전투를 그가 주도했다는 점을 명확히 알 수 있다. 그 회의의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제1로군의 힘으로 일본군의 배후를 교란시키고 조선 인민들의 항일 투지를 고무시키기 위해 조선 국내로 진출하며 이 작전은 3개 사(제 2, 4, 6사)가 공동으로 참여한다.
둘째, 각 사에 부여된 임무는 다음과 같다.
제2사 : 임강 일대에서 장백(압록강 연안)으로 향한다.
제4사 : 무송-안도-화룡으로 돌아 무산을 공격한다.
제6사 : 장백에서 보천보를 공격한다.
각 사는 간삼봉에서 최종 통합한다.
김일성 부대(제6사)와 최현이 속한 부대(제4사)가 부여받은 임무는 명확히 달랐다. 김일성은 보천보를 공격하는 임무를, 최현은 무산지구 습격임무를 각각 띠고 있었던 것이다. 최현이 속한 제4사는 가장 먼저 행동을 개시했다. 주수동 사장이 지휘하는 제4사는 6개 련(連)으로 편성됐는데 제1단장 최현이 이 가운데 4개 련의 병력을 지휘하고 있었다. 제4사 부대가 안도현에 이르렀을 때 일만군 토벌대와 부딪혀 전투를 벌였다. 이 와중에 주수동 사장이 전사하자 최현이 지휘관이 되어 고전 끝에 토벌대를 격퇴하게 된다. 그 후 최현의 부대는 1937년 5월 15일 함북 무산군의 한 마을을 습격하여 경찰지서를 파괴하는 등 일본군 국경경비대를 긴장시켰고, 5월 20일에는 두만강을 건너 무산군 상흥경수에서 일본인의 목재작업소를 습격하여 거액의 금품을 약탈하고 수 명을 납치했다. 이 무산지구 습격사건이 언론에 보도됨으로써 최현은 국내에 유명해지게 됐다.– 장준익, ‘북한 인민군대사’ (집문당, 1991), pp.326-344.
이렇게 볼 때 당시 보천보를 습격했던 건 김일성의 제6사였으며 최현이 소속된 제4사는 무산지구를 공격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최현의 무산지구 습격은 시기적으로 볼 때 김일성의 보천보 습격보다 20여 일 앞섰기 때문에 당시 군사력을 동원한 국내진공도 무산지구습격이 보천보 사건보다 더 빨랐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최현의 기록은 향후 북한정권이 수립되고 김일성 권력 장악 과정에서 그를 우상화하기 위해 당시 최현이 김일성의 부하였던 것처럼 조작된 것이며 최현의 전공(戰功)과 그 의미를 절하하고 있는 것이다. 이 역시 북한의 역사왜곡 실정을 잘 말해준다.
“(중략) 우리들이 밀영지에 도착한 것은 6월 하순이었다. 밀영에 도착하던 날 김 일성 원수는 친히 밀영 어귀까지 나오시어 우리를 반가이 맞아 주시였다. 밀영지에 도착한 이튿날 김 일성 원수의 지도 하에 제6사, 제4사, 제2사 부대의 지휘 간부들의 회의가 있었다.”– ‘항일빨찌산 참가자들의 회상기 4’ p. 23.
이 회고에는 김일성 지도 아래 최현이 간부 회의에 참석한 것으로 기록됐지만, 최현은 김일성과 대등한 지위에서 중국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정치위원 위증민(魏拯民)의 주관 하에 회의에 참석한 것이었다. 고위간부 회의에 최현이 참석했다는 사실은 비록 그가 김일성과 같은 사장은 아니었지만 무식하고 전투 전략술이 모자라지 않았다는 점을 방증해주는 대목이다. 안도현 전투에서 제 4사장 주수동이 전사한 이후에는 최현이 제 4사장이 됨으로써 실제 계급도 김일성과 동등해지게 됐다.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사장들은 밀영지에 모여 무산지구 전투 및 보천보 습격에 대한 일본군 토벌대들의 보복 공격에 대비해야 한다는 점을 논의했을 것이다. 간삼봉에서의 일전이 그것인데 이 회의에서는 최현에게 간삼봉 전투를 직접 지휘토록 임무를 부여했을 수도 있고 최현이 직접 자원했을 가능성도 높다. 이미 무산지구 전투 및 보천보 전투를 통해 항일 유격대에게 일격을 당한 일본군으로서는 간삼봉에서의 대토벌을 벼르고 있었다. 김일성 일파뿐만 아니라 최현 일파도 일본군 토벌대와의 일전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최현의 회상은 이 점을 잘 말해준다.
“나는 이 회의를 통하여 보천보 전투에서 패배의 쓴 맛을 본 적들이 참패를 만회하고저 ‘대토벌’을 기도하고 있다는 것과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미 얻은 승리에 자만하지 말고 놈들의 발악적인 기도를 분쇄하기 위하여 력량을 집결해 가지고 적극적인 방어 태세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을 더욱 명확히 알게 되었다. (중략) 동북에 주둔하고 있는 부대들로써는 도저히 조선 인민 혁명군에 맞설 수 없다는 것을 보천보와 구시골 전투를 비롯한 수 많은 전투들을 통하여 톡톡히 맛본 일제는 라남 제19사단 소속 함흥 74련대의 2000명의 정규군을 동원하였다. 일제의 주구인 김 석원이란 자가 인솔한 74련대는 근 100대에 가까운 트럭에 분승하여 혜산과 신갈파를 거쳐 압록강을 건넜다. (중략) 뒤로 물러 설 수도 없었으며 다만 적을 족쳐야만 했다. 지체하지 않고 나는 돌격 명령을 내렸다. 대원들은 온 산이 떠갈 듯이 함성을 지르며 적진으로 육박하였다. 놈들은 혼비백산하여 뒤로 도망쳤다.”– ‘항일빨찌산 참가자들의 회상기 4’ pp. 23~25.
위와 같은 최현의 회상에서 우리는 중요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간삼봉 전투에 최현이 직접 참가하여 싸웠다는 점이다. 최현의 회고를 사실로 간주하는 경우, 일본군의 공격에 대응하여 돌격 명령을 내리고 대원들과 함께 전투에 참여했다는 내용은 그가 사실상 간삼봉 전투를 주도했다는 점을 말해준다. 간삼봉 전투는 김일성의 지휘 아래 이루어진 전투가 아니었다. 일본군 토벌대는 트럭 100대에 나눠 타고 야심차게 토벌 준비를 해왔으나 탱크와 같은 최현의 저돌성은 그들을 대파하며 막대한 피해를 안겨줬다. 그렇다면 당시 김일성은 이렇게 큰 전투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최현의 회상에 따르면 김일성이 후방에서 간삼봉 전투를 직접 지휘했다고 한다. 그러나 여러 상황을 종합해 볼 때 김일성은 후방에서 ‘지휘’했다기보다 단순히 대기하며 상황을 지켜봤거나 혹은 최현 부대를 지원하기 위한 병참업무를 맡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중략) 간삼봉 제1고지 초막에 지휘부를 정하신 김일성 원수는 산 아래 경사진 릉선에 각각 부대들을 배치하였다. 우리 제4사 부대는 김일성 원수가 지휘하고 계신 고지가 동쪽으로 바라보이는 손등같이 생긴 밋밋한 밀림 지대 릉선 서남방향에 진지를 차지하였다. (중략) 이 때 김일성 원수께서는 지휘부에서 정황을 알아 보시기 위하여 우리 련대로 련락병을 보내 왔다. 나는 그 련략병을 통하여 정황을 보고하고 이미 차지한 진지를 고수할 결의를 말씀드렸다.”– ‘항일빨찌산 참가자들의 회상기 4’ pp.24-25.
김일성이 언덕 고지에 지휘부를 정했다는 점과 최현과 김일성이 연락병을 통해 정세와 작전을 의논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김일성은 후방에서 전투상황을 파악하고만 있었다. 보천보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큰 성과를 거둔 간삼봉 전투가 북한에서 왜 그토록 잘 알려지지 않았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간삼봉은 바다 속의 섬과도 같이 태고 밀림이 우거진 평평한 고원 지대에 솟아 있는 세 개의 봉우리로 되어 있다.
“(중략) 6월 30일 이 날은 구름이 낮게 드리우고 짙은 안개가 밀림을 뒤덮고 있었다. 날이 훤히 밝기 시작했을 때 보초대가 매복한 곳에서 기관총 소리가 자지러지게 산골짝을 뒤흔들었다. 이어 보초대가 적을 쓰려 눕히면서 돌아 왔다. 보초대가 있던 곳을 빼앗기면 아군의 전투 행동은 매우 불리하게 된다. 안개를 리용하여 기어 든 적들의 선발대가 코앞에 다가오고 있었다. 정세는 위급하였다. 뒤로 물러 설 수도 없었으며 다만 적을 족쳐야만 했다. 지체하지 않고 나는 돌격 명령을 내렸다. 대원들은 온 산이 떠갈 듯이 함성을 시르며 적진으로 육박하였다. 놈들은 혼비백산하여 뒤로 도망쳤다. (중략) 잠시 골짜기가 조용하여지자 정면 숲 속에서 푸른 신호탄이 올랐다. 우리는 지휘부에서 지시한 대로 놈들과 같은 색의 신호탄을 올렸다. 그러자 적들은 공격 신호탄인 줄 알았는지 이쪽 저쪽에서 신호탄을 올리고 눈 먼 사격을 시작하였다. 적들의 진공로를 혼란시키자는 우리의 기도는 들어 맞았다. 또한 사방에서 오르는 신호탄으로 하여 우리는 적들의 배치 정형과 동태를 손금 보듯이 꿰들 수 있었다. 놈들은 어리석게도 세 개 방향으로 이른바 포위진을 치면서 우리를 공격하고 있었다. 적들은 소위 돌격 구령을 외치면서 총창을 들고 덤벼들었다. 우리는 달려드는 놈들에게 명중탄을 퍼부었다. (중략) 새벽에 시작된 전투는 한낮이 되면서 더욱 치렬하여졌다. 부대 우익을 담당한 제2중대에서는 악전고투하고 있었다. 나는 응원 소대를 거느리고 제2중대 쪽으로 갔다. 제2중대를 한창 지휘하고 있을 때 나팔수인 김 자린 동무가 나를 불렀다. ‘련대장 동지 저 맞은 편 숲 속을 보십시오!.’ 그가 가리키는 곳에서는 누런 군복을 입은 놈들이 한군대 몰려 서서 우물거리고 있었다. (중략) 나는 척탄룡을 재우고 한 방 쐈다. 맞은 편 숲에 불이 일더니 몇 놈인가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또 한방 갈겼다. 그러자 거기에서 우물거리는 놈들이 다시 보이지 않았다. 기승을 부리고 발악하던 왜놈들은 자기들의 지휘관이 죽은 것을 보자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이 기회를 놓칠세라 우리들은 놈들의 등 뒤에 명중탄을 퍼부었다. 위기에 처했던 제2중대는 구원되었다. (중략) 새벽부터 저녁까지 전개된 전투에서 적들은 대타격을 받았다. 그리하여 당황한 나머지 살아 남은 놈들은 무기와 배낭을 모조리 내여 던지고 달아났다. 그러니 골짜기에 무더기로 쌓인 시체를 끌고 갈일은 엄두도 못 낼 형편이었다. (중략) 이 전투에서 조선 인민 혁명군 부대는 ‘대토벌’을 꿈꾸던 함흥 제74 련대의 유생 력량 1500여 명을 살상하였다. (중략) 지금도 간삼봉 부근 일대에 사는 인민들 속에는 그 때 김 석원 부대가 몽땅 녹아 난 가지가지의 이야기가 전하여지고 있다. 당시 일제는 항일 빨찌산에 의하여 섬멸 당한 시체가 너무나도 많았으므로 죽은 놈은 몸뚱이는 내버리고 머리만 떼여서 실어 갔다 한다.”– ‘항일빨찌산 참가자들의 회상기 4’ pp. 25~28.
요컨대 최현의 회고에 따르면, 간삼봉 전투는 대단히 큰 규모였을 뿐만 아니라 엄청난 성과를 거둔 전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여기에도 과장이 있음을 배제하진 못할 것이다. 1500여 명을 살상하여 시체가 무더기로 쌓였다는 식의 기술은 전승을 강조하기 위한 과장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간삼봉 전투가 보천보 전투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성과를 올렸다는 점은 분명한 것 같다. 이 전투를 주도한 것은 전적으로 최현이었고 김일성의 역할은 후방에서 전투 경과를 관망하는 데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김일성 우상화 작업에 장애가 된다고 판단했는지 간삼봉 전투에 관해서는 별다른 언급 없이 성과도 미미한 보천보 전투만을 대대적으로 확대 왜곡하여 조작 선전하고 있는 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