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때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진보좌파를 민주화 세력, 보수우파를 산업화 세력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보수는 경제를, 진보는 민주화를 이끌었다는 시각이다. 이러한 인식은 보수가 우리사회 경제 성장에 기여한 점은 인정하지만 그 과정에서 권위주의 정부를 탄생시켜 민주화의 요구를 탄압했다는 논리를 정당화하고 있다.
진보좌파 진영에서는 그래서 김대중-노무현 정부 집권 시기를 ‘민주정부 10년’이라 명명한다. 이 해석은 직권제로 선출된 노태우, 김영삼 정부도 권위주의 정부에 해당하고, 현 이명박 정부도 비(非)민주적 정부라는 함의를 내포한다.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사(史)에서 보수의 역할이 이렇게까지 폄하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이같은 현대사 인식이 한국현대사와 민주주의에 대한 편협한 이해에서 비롯된다는 진단이 나왔다.
일단의 학자들은 ‘한국의 민주주의 기원과 미래-보수가 이끌다’라는 책을 통해 한국 독재정권의 상징처럼 여겨진 이승만와 박정희 정부 시절이 한국 민주주의의 기원(起源)이라는 도발적 역사해석을 내놓았다. 이 책은 발간된 지 하루만에 교보문고 ‘화제의 책’에 오르는 등 학계 및 일반 대중으로부터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이 책에서 박정희 시대 부분을 집필한 연세대 김세중 교수를 최근 마포구 신수동 (사)시대정신 사무실에서 만났다. 그는 계간 시대정신의 발행인도 맡고 있다.
김 교수 등은 이 책에서 ‘이승만 정부가 한국 민주주의 원점(原點)이고, 박정희 정부는 공고화에 필수적 하부구조를 놓았다’ ‘한국 민주주의는 많은 부분 보수가 이끌어왔다’ ‘1987년 민주화가 어떤 혁명적인 과정을 통한 단절이 아니라, 건국과 산업화의 연속선상에서 이뤄졌다’며 좌파 중심의 한국 민주주의 역사 해석에 의문을 제기했다.
민주화에 보수 역할 제대로 조명되지 못해
먼저 이 책이 나온 배경이 궁금했다. 김 교수는 “보수가 현대사 전개에 매우 적극적 역할을 했음에도 우리사회 일각에서는 분단체제를 고착시켰고, 반공주의를 도입해 인권을 억압한 세력만으로 폄하되고 있다”며 “보수세력이 기여한 부분들이 제대로 조명되지 않았다. 특히 민주주의에 관련된 보수의 기여가 너무나도 평가받지 못했다”고 밝혔다.
그는 “보수세력은 내외의 엄청난 도전을 극복한 대한민국 건국의 주역이였고 그후에도 좌파의 파괴적 도전, 6·25전쟁을 거치면서 한국사회를 북한과 다른 정체성을 지닌 사회로 확립했다”며 “먼저 이것이 민주주의 발전의 시원적 기반을 구축한 작업임이 분명히 인식 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성공의 역설’이란 표현을 빌려 “(박정희 시대) 경제발전으로 중산층이 두터워졌고, 그들의 민주화 욕구도 증폭됐다”고 지적했다. 이어 “어느 정도 교육을 받고, 재산을 갖게 되면 자유와 자기 선택을 중시하게 되는 것은 일반적 현상”이라며 “중산층이 확대되면서 국가와 시민사회 사이의 권력의 균형점이 국가로부터 시민사회로 옮겨가게 됐다”고 설명했다. 즉, 박정희 정부 시절 본격화 된 경제발전이 오히려 그들의 권력기반을 잠식하는 역설을 동반했다는 것이다.
산업화가 민주화의 토대를 형성한 것은 ‘의도하지 않은 우연적 결과’로 박정희의 업적을 과대평가하는 것 아니냐는 일각의 평가에 대해서는 “절대빈곤, 낮은 교육수준 등은 급진주의, 공산주의의 타켓이 된다”며 박 대통령은 ‘가난한 나라에는 민주주의를 하기 힘들다는 얘기를 되풀이 했다’고 언급했다.
그는 이어 “동기가 어떻든 결과론적으로 자본주의 틀 속에서 산업화가 성공적으로 추진될 경우 독재국가가 유지되기 힘들다”고 덧붙였다.
중산층 확대가 민주주의 확립 바탕 마련
그는 산업화와 민주화의 관계에 대해서는 “빈곤한 나라도 선거의 실시라는 면에서 민주주의 제도를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빈곤이 팽배한 상황에서 선거는 과두지배체제를 정당화하는 요식 행위로 전락한다”며 “선거가 자율성과 정보를 갖는 사람들의 자유로운 선택의 기회가 될수 없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1960년대 초반 대한민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아프가니스탄이나 캄보디아와 비슷한 수준이었다는 점을 언급하며 “1961년 초 2~3달간 발간된 민족일보를 보면 춘궁기에 풀뿌리, 나무뿌리에 의존하는 당시 농촌의 참상이 적나라하게 묘사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건국 직후나 4·19 이후, 그리고 1963년 민정이양 후 등 민주주의 실천을 위한 시도가 여러 차례 있었지만 이는 모두 독재로 흐르거나 실패했다. 그러나 이번 것(1987년)은 지속가능한 민주주의의 확립으로 연결 됐다”며, 이는 기본적으로 경제발전에 따라 확대된 중산층이 배경으로 작용한 결과임을 강조했다.
‘경제발전 과정’서 권위주의 정치 질서 ‘필요악’
박정희 정부의 산업화가 권위주의적 틀 아래에서 추진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권위주의적인 정치 질서는 필요악 적인 것이었다”고 말했다. 아울러 한일국교정상화, 개방체제로의 대전환, 효율적 정책집행, 중화학공업화 등은 강력한 정치력과 무서운 집중력, 또 일관성있는 리더십이 뒷받침돼 가능했던 것임을 강조했다.
특히 유신시기의 중화학 공업화와 방위산업은 박정희의 비전과 추진력의 산물로 불리울 수 있을 정도로 그의 역할이 거의 절대적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이런 리더십의 연속성은 타협과 대화로는 보장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덧붙여 그는 박정희의 경제발전에 대한 집착은 거의 ‘병(病)’ 적이였다고 평가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 시기 총 299 차례 열렸던 수출진흥확대회의와 월간경제동향보고 회의에 출석하지 못한 건 6회에 그쳤다고 한다. 김 교수는 당시 각료들이 “1960년 말 박 대통령은 한국 경제 제1의 전문가가 됐다”고 회고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경제문제를 외통수로 파고들기를) 10년을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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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교수는 “당시 자유주의자들은 미국식 민주주의를 부르짖었고 진보혁신 쪽에서는 평화통일과 복지사회를 주장했다. 모두 타인의 시선으로 우리 과제를 인식한 것”이라며 “이에 대해 박 전 대통령은 경제발전을 최우선 과제로 설정했고, 그 가치의 실현과정에서 다른 가치가 타협될 수 있음을 냉엄하게 받아들였다. 우리의 처지에서 우리의 과제를 주체적으로 인식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보수와 반공, 전략적 윤리학
당시 권위주의 정부의 경직된 ‘반공정책’이 오히려 젊은 세대에게 공산주의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갖게 하지 않았느냐는 지적에 대해서는 “이 시점에서 되돌아보면 그렇게 얘기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우리는 200만명 이상의 사망자를 낳은 6·25전쟁의 참화를 겪었고 또 이북과 비교해 발전에서도 훨씬 뒤져 있는 상황이였기에 상당 수준 경직된 대응이 불가피했던 측면이 있었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 김 교수는 2008년 8월 세계적 윤리학자인 하버드대 팀 스캔론(Tim Scanlon) 석좌교수가 한국의 비무장지대(DMZ)를 방문하고 밝힌 말로 설명을 대신했다.
스캔론 교수는 당시 “DMZ적 상황은 분명 내 도덕적 이론에 도전을 던져준다. 도덕이란 조화를 목표로 한다. 이상적으로는 상호 정당화이다. 그러나 DMZ적 상황은 이것과 다르다. 합리적 타협이 어려운 상대방이나 적에 대해 우리는 어떤 도덕적 의무를 져야 하는가의 문제를 제기한다. 솔직히 이런 상황 아래서 이상적 윤리학은 소용이 없어진다. 살아남기 위한 전략적 윤리학만이 필요하다”고 밝혔었다.
김 교수는 남북 간의 생사를 건 긴장된 대치상황 아래서 국가운영의 긍극적 선택 기준은 생존일 수밖에 없고 또 그것이 최고의 윤리일 수밖에 없다는 의미로 ‘전략적 윤리학’이란 용어를 해석한다. 그는 또 만약 스캔론 교수가 50년대 또는 60, 70년대 그곳을 방문했다면 더 충격적으로 윤리학의 의미를 재해석했을 것이라고 추론하기도 했다.
압축성장으로 갈등 양상…포퓰리즘 경계해야
직선제 이후 선출된 노태우 정부부터 현 이명박 대통령까지 민주주의 발전과 관련한 각 정부의 기여도와 평가를 물었다.
그는 1987년 이후의 정부는 다 민주정부라며 “등급을 매기는 것은 의미가 없고, 할 수도 없는 일”이라고 했다. 다만 그는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은 상당히 권위적인 분들이여서 법치(法治)보다 인치(人治)에 기운면도 많이 있었다. 그럼에도 민주정부임에는 틀림없다. 다만 리더십 스타일이 권위적이였던 것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또한 “건국·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이 각각 한국 민주주의에 얼마나 기여했는지를 수치로 비교할 수는 없지만 굳이 평가한다면 보수 세력의 기여가 더 근원적일 수도 있고 따라서 많은 기여를 했다”고 말했다. “87년 민주화운동의 결과만으로 오늘날 민주주의를 설명할 수가 없다”는 점이 그 이유였다.
한국사회가 겪고 있는 극심한 이념갈등에 대해서는 “산업사회에서는 사회분화가 발생하고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수많은 집단이 창출되는 만큼 갈등의 분출이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면서 “우리는 특히 압축적으로 산업화가 추진됐고, 여기서 비롯되는 정경유착과 극심한 사회적 이동, 상대적 격차, 그 외 지역갈등과 남북분단에서 오는 이념갈등 등이 중첩적으로 작용해 여타 다른 국가에 비해 갈등요인의 누적도 압축적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렇지만 “최근 1~2년 사이 노사분규가 급격히 줄었다”며 “(지금의 상황이) 너무 우려만 할 사항이 아닐 수도 있다”고 조심스럽게 관측했다.
다만 ‘갈등 조정 문화나 갈등 조정 기재’가 아직도 극히 미흡한 상태에 머물러 있고 특히 지도적 집단인 정치인들이 ‘사회 파괴적인 약속(포퓰리즘)’을 남발해 갈등의 진원지로 떠오른 것은 간과할 수 없는 사항이라고 지적했다.
보수 역할에 초점 맞췄지만 민주화 세력 역할도 인정
그는 마지막으로 이번에 출간한 책과 관련 “이 책에는 ‘보수가 이끌다’라는 부제가 붙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민주주의 전개과정에서 보수의 역할에 초점을 맞춰 주로 말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른바 민주화 세력의 역할에 대한 의미 부여를 소홀히 하는 것은 아니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실제 그들은 이승만, 박정희 권위주의 정부가 장기 지속하다가 시대적 적실성을 상실하게 되면 과감한 도전을 통해 새로운 국면을 여는 역할을 휼륭하게 담당했다. 이번 저서의 취지는 이런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역사를 전체적으로 보면 민주화에서 보수세력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서로가 인정하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덧붙여 그는 “이승만, 박정희 체제 아래서의 인권침해 사항을 모두 합리화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며 “반공과 발전이 우선적 가치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일정 부분 체제의 경직화는 불가피했다는 것은 지적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이 책에는 안병직 교수의 소중한 증언을 비롯해 민주주의의 궤적에 대한 설명과 함께 자유민주주의가 한국의 미래일 수밖에 없다는 전제 위에 미래지향적으로 그 개선책을 모색하는 매우 유용한 글들도 실려 있다”며 “과거 증언이나 해석에만 집중하고 있는 책이 아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