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박근혜 대통령이 이른바 ‘최순실 국정농단 파문’ 이후 사실상 국정 운영 불가능 상태에 놓이면서 향후 있을 다양한 외교 정상회담 등을 두고 우려의 목소리가 많다. 대통령이 하루가 멀다 하고 하야 또는 탄핵 요구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타국 정상들과 건설적인 외교 논의가 가능하겠느냐는 지적이다.
박 대통령이 외교 일선에서 한 발 물러선다 하더라도 우려되는 부분은 많다. 국무총리나 외교장관이 외교·안보 행사 참석 등에 앞장선다 하더라도, 각국 정상들이 모인 자리에서 주도적인 목소리를 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란 얘기다.
특히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로 인한 한반도 안보 문제가 연일 관련국 협의안으로 부각되고 있지만, 정작 한국 정상이 국내서 불미스런 사건에 연루돼 정상외교를 수행할 수 없다면 국가 이미지에 상당한 타격이 될 것이란 관측이 많다.
일단 박 대통령은 오는 19, 20일(현지시간) 페루에서 열릴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 불참한다. 대리 참석자는 황교안 국무총리다. APEC이 1993년 정상회의로 격상된 후 줄곧 대통령이 참석해왔기 때문에 총리가 정상으로 가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한반도 주변국들과의 정상회담조차 예정된 게 없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이번 회의에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아베 신조 일본 총리,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등 한반도 주변 주요 4개국 정상이 모두 참석하지만, 정작 이들과의 정상회담 자리조차 마련하지 못했다. 황 총리는 공식 다자 회의에만 참석할 예정이다.
이에 대해 정부는 줄곧 황 총리의 참석은 이전부터 예정돼 있던 것이란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조준혁 외교부 대변인은 17일 정례브리핑에서 “이번 국무총리 참석은 지난 9월 9일 북한의 5차 핵실험 직후 박 대통령이 여러 가지 안보 필요상 참석하지 않기로 판단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부로서는 이른바 ‘최순실 사태’로 인해 박 대통령의 불참이 결정된 게 아니라는 점을 거듭 밝히고 있는 모양새지만, 상식적으로 볼 때 국내 안보 위협이 커질수록 국가 정상이 직접 나서 주변국 공조를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비록 APEC 정상회의가 안보보다는 경제를 주 의제로 다룬다 할지라도, 회의를 계기로 이뤄질 양자회담 등에선 북핵 문제가 주요 논의 선상에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정부는 황 총리가 APEC 정상회의에 참석해 논의할 의제와 관련해서도 불투명한 답변으로 일관하고 있다. 조 대변인은 ”APEC 정상회의와 관련해 이번 국무총리 방문은 단기간 내에 APEC 정상회의에 참석하고 조속히 귀국하는 데 주안점이 있다“면서 ”그래서 현재로서는 주최 측인 페루 제1부통령과의 양자회담이 예정돼 있다“고 답했다.
이에 대해 최강 아산정책연구원 부원장은 18일 데일리NK에 “APEC 정상회의 계기에 주요국들과 양자 협의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텐데, 이런 기회를 잘 활용하지 못할 것이란 게 우려스럽다”면서 “아무리 국내 정치가 어려운 상황에 있더라도 안보는 잘 유지해나가야 할 텐데, 미국이나 일본, 중국 등 관련국들의 협조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최 부원장은 “물론 황 총리가 간다하더라도 나름대로 양자회담 등을 하고 온다면 나았을 텐데, 그것조차 없는 상황이 아닌가”라면서 “설령 대통령이 갔다 하더라도 지지율 5%인 정상과 무엇을 협의할 수 있을까 하는 시선이 많았을 것이다. 결국 국내 정치적 상황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우리가 강력히 의견을 낼 수 있는 처지가 안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전현준 동북아평화협력연구원장도 “북핵 문제 등 안보 사안에 있어 미국과 중국, 러시아, 일본이 협력 체제를 구축하고 있는 상황인데 정작 한국 대통령이 이에 협조하지 못한다는 건 외교적으로 큰 손실”이라면서 “이런 상황에서 (APEC 정상회의에) 대통령이 아닌 총리가 참석한다는 건 외교적으로 맞지 않는 일이다. 국내적 요인으로 인해 대외관계의 신뢰를 깨트리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정부는 한중일 정상회담에 있어서는 박 대통령의 참석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등 APEC 정상회의 참석 여부와 관련한 대답과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고 있다.
다만 대통령의 위신이 추락한 상황에서 외교안보 행사에 ‘참석’하는 것만으로는 별다른 주도권을 잡기 어려울 거란 관측이 많다. 전 원장은 “박 대통령이 대통령직을 유지하고 있는 한 미·중·일·러도 (정상회담으로) 만나줄 수는 있겠으나, 중요 사안들을 협의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면서 “권력의 힘이 빠진 상태에서 과연 중요한 결정을 박 대통령과 하려는 정상이 있을까. 아마 실리외교는 더 이상 어려울 것이라 봐야 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 같은 외교안보 공백을 보완할 방안에 대해 최 부원장은 “지금으로서의 대책은 기존에 합의했던 (외교) 사안을 계속 이행해가는 것”이라면서 “리더십에 문제가 생겼다 하더라도 나머지 부처는 외교안보 분야에 있어 해야 할 일을 지속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특히 외국이 한국에 대해 확신을 갖도록 하기 위해선 외교안보 사안들이 단순 정부의 입장만이 아니라 국내 여론의 공감대에 따라 이뤄진 것임을 거듭 피력해야 한다”면서 “사드 배치나 대북제재 문제에 있어서도 반대 의견들이 있긴 하지만, 찬성 입장이 다수라는 건 분명하지 않나”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사실 국회가 초당적인 합의를 이끌어내 외교안보 사안을 추진하는 게 중요한데, 지금 여야를 보면 당리당략(黨利黨略)을 추구하느라 합리적인 선택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우려스럽다”고 덧붙였다.
전 원장도 “이제는 별 대책이 없다. 대통령이 권위를 잃은 상태이기 때문에 탄핵이 됐든, 법적 절차를 밟아 새 정권이 들어서야 제대로 된 외교가 가능할 것”이라면서 “총리가 박 대통령을 대행한다 하더라도 미·일·중·러 정상들도 체면이 있을 텐데 중요한 사안을 논의하려 하겠나”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