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 당국이 지시한 ‘10월 국가배급제 복귀’가 ‘말잔치’에 그치고 있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최근 중국을 방문한 북한 주민들은 당창건 기념일에 ‘선물’로 받은 이틀 분량의 쌀과 옥수수를 제외하고 더 이상의 배급은 없었다고 말했다. 또한 개인 텃밭에서 수확한 곡물을 ‘국가배급’으로 계산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마저 벌어지고 있으며, 식량배급 재개 방침과 관련해 강화되었던 장마당 통제도 느슨해진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 평안남도 개천 – “10월 한달 동안 이틀 분 식량밖에 못 받아”
지난 8일 중국 단둥(丹東)에서 만난 윤순영씨(가명. 46세. 평남 개천)는 “국가에서 모든 노동자들에게 배급을 주겠다고 선포한 날짜가 한 달이 넘었지만, 실제로 배급을 받은 노동자들은 없다”며 “여름에 한국에서 원조 쌀이 들어오고, 10년만에 농사도 잘 돼서, 이번에는 진짜로 배급이 나오겠는가 하고 기대했던 사람들은 모두 크게 실망했다”고 말했다.
윤씨는 “일반 노동자들의 부양가족이나 사회보장 대상자들에 대한 배급은 둘째 치고, 철도 기관사들조차 한달 분량의 식량을 배급하지도 못하고 보름 분량만 주고 있다”며 “당창건 기념일에 이틀 분의 식량을 나누어준 것은 해마다 있던 국가의 선물 일뿐 새로운 배급은 아니다”고 말했다.
농촌지역에서는 개인 소토지의 수확물을 ‘국가에서 나누어주는 식량’으로 둔갑시키는 ‘서류정리 사업’이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도 확인되고 있다.
◆ 함경북도 김책 – “장마당 식량판매 통제도 유야무야”
중국 투먼(圖們)에서 만난 최영순(가명. 61세. 함북 김책)씨는 “내가 올 가을에 개인 소토지에서 옥수수 370kg를 수확했는데, 시 행정일꾼이 찾아와 ‘이 수확량을 국가가 나누어준 식량으로 생각하라’며 6개월 분 식량을 미리 배급 받은 것처럼 서류를 꾸며가지고 돌아갔다”고 전했다.
최씨는 “집에서 15리나 떨어진 산골짜기를 오르내리며 힘들게 농사를 지어 놨더니, 이제 와서 ‘국가의 배급물’ 이라고 하니 어이가 없었다”며 “땅세라도 걷어가지 말던가, 국가에서 비료라도 조금씩 나누어 줬으면 이렇게 허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국가배급제 실시가 무위로 돌아가고 있음에 따라 10월 중순부터 ‘장마당 식량판매 통제’도 형식적인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최씨에 따르면 김책시의 경우 사회안전부에서 10월 1일부터 장마당에서 식량을 판매하는 사람들에게 높은 벌금을 부과하거나 벌금을 내지 못할 경우 식량 자체를 몰수하는 조치를 취했다고 한다. 하지만 10월 10일 당창건 기념 행사 이후에는 상설시장 주변에서 몰래 식량판매를 하는 사람들에 대해 눈감아 주기 시작했다는 것. 다만 차량을 통해 김책시 내에 있는 식량을 대량으로 반출하는 행위는 여전히 단속하고 있다는 것이다.
“국가에서 주겠다는 식량은 나오지 않지, 장마당에서는 식량을 못 팔게 하지, 결국 주민들이 식량판매를 단속하는 안전부 요원들에게 불만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답답하기는 안전부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들도 밥을 먹고 단속해야 하는데, 장마당이 아니고서는 식량을 구할 수 없다. 김책에서는 10월 10일이 되자 음성적으로 팔리는 쌀값이 950원까지 치솟았다. 당창건 기념행사가 끝나자 장마당 식량장사들이 강가에 나가 몰래 장사했다. 이때부터 안전부 요원들이 눈감아 주기 시작했다. 지금도 장마당의 식량 매대는 비어있지만 장마당 주변에서 모두 장사하고 있다”
◆ 평안남도 순천 – “개인 소토지 수확물, 배급인줄 알라”
북한 외화벌이 일꾼 김철민씨(가명. 39세. 평남 순천)도 비슷한 상황을 전했다. 개인 소토지에서 기른 곡물을 조사하고는 그것을 국가에서 배급해준 것으로 알라는 것이다.
“행정일꾼들이 집집마다 개인 소토지에서 수확한 옥수수 양을 조사하더니 ‘이 수확물을 국가에서 배급해준 것으로 계산한다’며 배급기록서류에 서명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10월 국가배급제 실시’의 전부입니다”
김씨는 “10월 1일부터 국가에서 모든 공장 기업소 노동자들과 부양가족들에게 식량을 배급한다는 국가적 방침이 내려왔다”면서 대외적으로 알려진 배급제 재개 방침을 확인해주고 “하지만 10월 10일에 당창건 60주년 기념일이라며 이틀 분 쌀 1.4kg를 받은 것이 전부”라고 밝혔다.
◆ 함경남도 단천 – “장마당 단속으로 한때 쌀값 폭등”
지난 8일 중국 싼허(三合)에서 만난 박길춘(가명. 46세. 함남 단천)씨는 “단천시에서는 쌀과 옥수수는 물론이고 ‘콩 판매’까지 단속하는 바람에 주민들과 안전부 요원들과 다툼이 심했다”고 말했다.
10월 1일부터 쌀, 옥수수, 보리에 대한 단속이 심해지자 장마당에 나와서 콩을 사는 주민들이 늘었고, 안전부 요원들이 콩을 사가는 사람들에게까지 벌금을 부과하자 벌금을 부과 받은 사람들이 단천시 안전부에 찾아가 ‘신소’를 낸 것. 단천시 안전부에서 “콩은 ‘부식물’이지 ‘식량’이 아니다”는 주민들의 주장을 인정하면서 헤프닝은 마무리 되었다고 한다.
박씨는 “단천시에서는 10월 중순에 있었던 ‘콩 사건’ 이후로 상설 장마당 주변에서 음성적으로 거래되고 있는 식량판매를 눈감아 주고 있다”고 덧붙였다.
북한 주민들의 증언을 종합해보면 북한 당국의 ‘국가배급제 복귀’와 ‘장마당 식량판매 통제’ 조치는 한 달도 되지 않아 흐지부지 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박씨는 “말(言)부터 앞세우고 보는 북한당국의 실정(失政) 때문에 애꿎은 백성들만 피해를 입는다”고 하소연 했다. 11월 현재 함경도와 평안도 지역의 쌀가격은 1kg당 950원 전후로, 8월 말에 비해 150원~200원 가량 급등했다.
“이제 국가의 배급을 기대하는 백성들은 없다. 국가에서 먹을 거 주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그저 알아서 먹고 살도록 가만히 놔두기만 해도 좋겠다. 배급제를 하네, 식량판매를 단속하네 하면서 호들갑 떠는 동안 장마당의 쌀값이 1천원까지 올랐다. 가을추수가 완전히 끝나는 11월이면 1년 중에 식량 가격이 가장 낮은 때인데, 11월에 쌀값을 1천원까지 올려 놓으면 백성들은 어떻게 먹고 살란 말인가? 여름에 한국에서 원조쌀도 들어왔다고 하고, 올해 농사는 ‘10년만의 풍년’이라는 소문도 많은데 그 많은 쌀이 모두 어디에 쌓여 있는지 모르겠다.”
중국 단둥(丹東)= 권정현 특파원kjh@dailynk.com
옌지(延吉)= 김영진 특파원kyj@dailyn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