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한 마음 가진 사람은 ‘친북’ 될 수 없다”

▲아라키 가즈히로 ‘시오카제’ 대표 ⓒ데일리NK

필자는 대학교 2학년 때인 1977년 한국말을 배우기 시작했다. 한국말을 배우면서 한반도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으며 이후 30여년동안 나의 주된 관심사는 한반도 문제였다.

1996년 필자가 소속해 있던 일본의 민간 연구기관 현대코리아 연구소에서 발행하는 월간 ‘현대 코리아’에 게재된 논문 의해 요코타 메구미가 납북됐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 문제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됐다. 이를 계기로 납치 피해자 구출운동에도 관여를 하게 됐다.

사실은 그 당시만 해도 납치 피해자 구출운동은 일본 내에서 활발하지 못했다. 필자도 몇 건의 납치사건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으나, 구출운동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일본 내에서 납치자 문제 해결을 위해 민관이 대대적으로 나선 것은 불과 10년도 안됐다.

다만 확실한 것은 핵문제나 KAL기 폭파 사건 등으로 북한에 대한 일본 국민의 반북 감정은 상당히 고조돼 있었다는 점이다. 한국의 입장에서 보면 어느날 갑자기 일본이 대북 강경책으로 선회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동안 누적되었던 반감이 폭발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日, 요코다 메구미 납치 사건 계기로 본격 나서게 돼”

일본 정부를 비롯해 민간 단체가 납치자 문제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된 도화선은 중학교 1학년 소녀가 북한 공작원에 의해 납치당한 충격적인 사건, 즉 요코타 메구미 납치 사건 때문이었다. 그 소식은 이시다카 겐지(石高健次) 아사히 방송 프로듀서가 1996년 10월호 ‘현대코리아’에 쓴 논문이 계기가 되어 밝혀지게 됐다.

그리고 다음해인 1997년 2월 중의원에서 니시무라 신고(西村眞悟 당시 신진당 소속)의원이 메구미 납치 사건과 관련해 일본 총리에게 질문을 했다. 당시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총리는 “납치의 가능성도 포함해서 조사하고 있다”고 답변해 일본 국민에게 큰 충격을 줬다.

그해 3월 25일 ‘북한에 의한 납치피해자 가족연락회’가 결성됐다. 그때까지는 가족 사이에는 연락이 별로 없었다. 필자도 요코타 메구미 양친 밖에는 아무도 몰랐다. 가족분들에게 연락을 하며 가족회 결성에 노력한 사람은 효모토 다쯔키치(兵本達吉) 당시 공산당 참의원 비서관을 비롯해 아베 마사미(阿部雅美) 당시 산케이 신문 사회부장 등이었다.

아사히 방송은 좌파 성향의 아사히 신문과 관계된 회사이다. 산케이는 우파 신문이니까 각각 공산당, 아사히, 산케이에 소속한 사람들이 힘을 합쳐 가족회 결성을 위해 노력했다. 이것은 일본에서도 주목받을 만한 일이었다.

이들은 오래 전부터 납치 문제를 다루고 있었고 문제의 심각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협력하게 된 것이다.

가족회 결성과 함께 가족분들을 도와주며 납치 피해자 구출을 위한 민간단체가 결성되기 시작됐다. 먼저 요코타 메구미양이 납치된 니이가타현에서, 다음은 오사카를 중심으로 한 관서지방에서, 그 다음에는 동경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모두 자발적인 운동이었고, 이들 단체들은 나중에 모여 지금의 ‘북한에 의해 납치된 일본인을 구출하기 위한 전국협의회’(약칭 구출회)를 결성하게 됐다. 필자는 동경 구출회에서 활동했는데 동경 구출회는 전국적인 운동의 사무국역할을 했다. 그리고 2000년에 정식으로 ‘전국협의회 사무국’이 출범했을 때 초대 사무국장으로 일하게 됐다.

“日, 납치자 구출운동 좌우 망라해 적극 참여”

납치자 구출 운동이 시작됐을 때 중심이 된 사람들 중에는 과거 공산당에 있었거나 친북활동을 해 왔던 분들도 적지 않았다. 지금 전국협의회 회장인 사토 가쯔미(佐藤勝巳) 씨와 처음으로 니이가타현에서 구출운동을 시작한 고지마 하루노리(小島晴則)씨도 과거에는 공산당원이었다.

1950년대~1960년대 재일교포 귀국운동을 도와준 분들이다. 당시 사람들은 재일교포 귀국 운동에 대한 이들의 반성이 구출 운동을 하게 된 원동력이 됐다고 평가했었다.

필자는 보수가 아니며 사회민주주의자이다. 우리는 보수파보다 강력히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니 북한 김일성, 김정일 체제에 대해서는 애초부터 반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과거 친북적이었던 분들이 나중에 구출운동이나 북한 민주화를 위한 운동에 참여하게 되면서 그 만큼 정신적인 갈등도 있었을 것이며, 그 갈등을 극복한데 대해서는 높게 평가하고 싶다.

객관적으로 볼 때, 한시기 친북적 성향을 갖고 있었다고 해도 그 사람이 순수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면 계속 친북적 성향을 갖고 있을 수가 없다. 세계에서도 아주 드문 북한의 독재체제를 가만히 지켜보기만 해도 모순이 당연히 보이게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도 변함없이 친북적인 사람들은 그 독재나 인권탄압 자체를 지지하는 사람, 아니면 그 무슨 사적 이해관계 때문에 지지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거라고 생각한다.

“日 국민, 납치자 구출운동 계기로 北 독재체제 깨닫게 돼”

구출운동은 정부가 나설 것을 촉구하는 서명운동부터 시작됐다. 당시의 서명용지에는 “북한에 의해 납치된 일본인을 구출하자”고 적혀 있었다. 1999년 처음으로 열린 ‘국민대집회’에서 일본 납치자 가족들은 한국인 납치 피해자가 더 많다는 것을 알게됐다.

우리는 한국인 납치 피해자도 구출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으며, 서명부 제목을 수정하여 “북한에 의해 납치된 모든 피해자를 구출하자”고 쓰게 됐다.

한국인 납치에 대한 기술도 추가했다. 이때 납치 피해자 구출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많은 일반국민들은 납치 문제를 통해 북한 김일성, 김정일 독재체제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 것을 알게 됐다.

납치, 정치범 수용소, 기아, 탈북자, 핵 문제 등 이 모든 문제는 60여년 동안 계속되어온 북한의 독제체제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북한의 독재체제가 바꿔야 모든 문제는 해결할 수 있다.

이제는 여∙야당 국회의원 중에서도 “김정일 체제를 붕괴시켜야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지만, 이것은 10년 전에는 생각할 수도 없었던 일이다. 그 만큼 납치 문제는 일본 전체에 “학습효과”가 있었다.

냉전시대에는 일본인이 한국에 가면 “일본인은 안보의식이 부족하다”는 말을 자주 들었는데 이제는 정반대가 된 셈이다.

북한 인권문제는 납치 피해자, 재일 조선인 귀국자와 그의 가족들의 처우에도 직결된다. 그렇기 때문에 남한 사람들이 아무리 납북자, 국군포로, 그리고 북한 인권문제에 무관심하다고 해도 일본은 결코 북한의 독재체재를 간과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일본은 민주주의 국가이니까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지만, 일본인 동포를 납치했으며, 아무 죄도 없는 많은 자국 아이들을 굶어죽게 하고, 얼어 죽게 만든 북한 체제와는 결코 타협하지 않을 것이다. 필자가 납치 문제나 북한 인권문제에 관여하게 된 것은 우연이긴 하지만, 어떤 면에서 보면 필연일지도 모른다.

아라키 가즈히로(다쿠쇼쿠 대학 해외사정 연구소 교수/ 특정실종자문제 조사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