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당국의 위기의식이 적나라하게 표출된 회의였다. 지난 15일부터 18일까지 나흘간 개최된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의 제8기 제3차 전원회의는 개최 시기와 내용 면에서 세간의 주목을 받고도 남음이 있었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이번 전원회의는 대내외적으로 북한 당국이 직면한 위기의 실체와 압박감을 김정은의 육성으로 확인시켜준 자리가 됐다.
김정은 집권 후 북한 당국은 전원회의를 연말에 열어왔다. 그러나 이번 전원회의는 이례적으로 6월에 개최하면서 개최 시기와 관련한 갖가지 추측을 낳았다. 그 가운데 주목할만한 분석은 올해 대내외적으로 북한이 예사롭지 않은 상황을 맞으면서 북한 당국이 내부적으로 긴장의 고삐를 죄려는 의도라는 내용이었다. 이는 북한 당국이 6월에만 네 차례(4일 정치국 회의, 7일 중앙위-지방당 책임간부 협의회, 11일 당중앙군사위, 그리고 15-18일 당 중앙위 전원회의)나 당 중앙위원회 차원의 주요 회의를 열었다는 사실에서도 충분히 입증된다. 그만큼 올해 북한이 직면한 대내외적인 현실이 녹록지 않다는 것이다.
이번 회의에서 북한 당국의 대내적인 위기의식은 크게 세 가지 사실에서 나타났다. 식량 위기의 악화와 코로나 19의 확산, 그리고 K-팝 등 한류의 확산이다. 이들은 모두 김정은의 육성에서 표면화한 난제들이다.
첫날 회의에서 김정은은 식량 생산계획이 차질을 빚으면서 식량난이 가중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례적으로 고백했다. 국제사회에서는 올해 북한의 식량 부족분을 130만 톤 정도로 추산하고 있는데, 2019년 북한의 식량 수요량이 548만 톤이었음을 감안할 때 올해도 북한 인구의 40% 이상이 식량난으로 고통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말해준다. 코로나19 사태와 관련해서 김정은은 비상 방역의 장기화가 인민들의 의식주를 보장하기 위한 투쟁의 장기화라면서 역설적으로 코로나19가 북한 내에서 잦아들지 않고 있음을 시사했다.
마지막으로 김정은은 더욱 공세적인 비사회주의와의 투쟁을 강조했다. 이 같은 사실은 지난해 12월에 제정된 반동사상문화배격법에도 불구하고 북한 사회 내에서 한국 대중문화가 계속 확산되고 있음을 방증한다. 이와 관련, 김정은이 K-팝을 악성 암으로 규정하면서 이를 방치하면 ‘축축하게 젖은 벽처럼 북한이 무너져 내릴 것’이라고 강력한 대책을 촉구했다는 지난 10일의 뉴욕타임스 보도도 있었다. 반동사상문화배격법까지 동원하며 북한 당국이 한류의 확산을 차단하려 하고 있지만 북한 여성들이 데이트 중인 남성을 ‘동지’에서 ‘오빠’로 부르는 등 현실은 한국 문화의 침투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한류 확산에 대한 김정은의 히스테리는 중앙검찰소장 우상철을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선출한 사실에서도 잘 나타난다. 중앙검찰소는 지난 3월 22일 유럽연합(EU)이 국가보위성, 사회안전성과 함께 제재를 부과했던 기구다. 당시 EU는 이들 3개 국가기구들이 사법절차에 의하지 않은 처벌, 고문을 비롯한 비인간적 대우 등 심각한 인권 유린에 책임이 있다는 이유로 제재 대상에 올렸다. 이 같은 기구의 수장을 정치국 후보위원에 선출했다는 점은 김정은이 그만큼 한류 확산의 차단을 통한 체제 안전을 고심하고 있다는 방증으로 볼 수 있다.
대내적 위기와 관련된 김정은의 문제의식은 ‘김정은 조선’의 건설에 중요한 걸림돌이 되고 있다. 올해 초 개정한 조선노동당 규약에서 김일성과 김정일의 흔적을 지우며 자신만의 ‘조선’을 건립하려는 야심을 여실히 드러낸 김정은으로서는 식량문제의 악화와 한류의 확산 등이 독재의 아성을 구축하는 데 커다란 장애로 등장한 것이다. 이례적으로 6월에 전원회의를 비롯한 주요 회의를 개최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대내적 위기에 덧붙여 국제정세 또한 김정은의 야심을 가로막는 환경 제약이 되고 있다. G7(주요 7개국) 정상회의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유럽연합(EU) 정상회의에서 미국을 위시한 국제사회 지도자와 주요 기구들은 중국·러시아 등에 대응하는 ‘반(反) 독재’ 연대 강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미중 갈등을 넘어 점차 자유세계와 독재의 대결로 구체화하는 움직임이다. 특히 나토를 비롯한 국제사회는 중국을 구조적인 도전으로 규정하며 중국을 강하게 압박하고 있다. 이처럼 중국의 국제적 위상에 심각한 변화가 발생하는 와중에 중국 공산당은 오는 7월 1일 창당 71년을 맞게 된다. 이를 계기로 국제적 고립이 가속화하고 있는 북-중 두 나라의 정상은 모종의 교감을 형성할 수도 있고, 10월에 열릴 G20 정상회의를 계기로 성사될 가능성이 높은 미중정상회의 결과에 따라 동북아에서는 신냉전이 더욱 구체화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같은 국제사회의 반중 연대는 김정은에게 이전과는 다른 차원의 압박을 가했고 김정은의 위기의식은 전원회의에서 잘 나타났다.
김정은은 회의 셋째 날인 17일 대미 대남 비난 없이 대화와 대결을 모두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대북정책에 대한 첫 반응에서 나온 발언이다. 그러나 김정은은 “특히 대결에는 더욱 빈틈없이 준비돼 있어야 한다”고 말해 대결에 대한 주의를 강조했다. 이 같은 발언에 관해 청와대를 비롯한 일각에서는 김정은의 발언이 보다 유연해졌다며 대화에 더욱 방점이 찍힌 대목이라고 해석했으나 그것은 단면적인 반응이다. 김정은은 절제된 표현을 사용하긴 했으나, 이어진 발언에서 ‘전략적 지위’와 능동적 역할을 강조하며 ‘유리한 외부 환경’을 주동적으로 마련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기 때문이다.
‘전략적 지위’란 북한이 핵보유국이라는 점을 주장할 때 등장하는 단어다. 때문에 김정은의 발언은 핵을 포기할 의사가 없다는 점일 뿐 아니라 오히려 핵을 ‘능동적으로 활용’하여 자신들에게 유리한 외부 환경을 조성하겠다는 의지를 간부들에게 피력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에 따라 북한 당국은 전략 및 전술 핵무기 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그 완성도를 시험하는 도발을 감행할 개연성이 짙다. 그들이 왜곡, 선전하는 조국해방전쟁 71년이 되는 6·25나 김일성 사망 기념일(7·8)을 계기로 저강도 도발을 통해 미국과 국제사회의 반응을 떠보려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의 지위를 신격화하며 독재의 아성을 공고히 하려는 김정은의 입장으로 볼 때 유화적인 대미접근은 간부들에게 유약한 이미지로 인식될 수 있는 처사다. 김정은의 대외관계 관련 발언은 열세에 놓인 처지를 감안하여 완곡한 형식으로 개진되긴 했으나, 그것이 한국 정부나 미국 정부에 대화와 협상의 여지를 흘린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오히려 6.15 공동선언 21주년이 되는 날에 북한 당국이 당 중앙위원과 후보위원, 노동당 각 부서 간부와 국가기관, 무력기관, 도급 지도기관, 시·군·연합기업소 책임자들까지 참석시켜 전원회의를 열고 ‘전략적 지위’ ‘주동적 역할’ 등을 강조한 것은 최근 국제정세에 편승하려는 한국 정부에 경고하고, 하급 간부들에게까지 위기의식을 강하게 주입하며 체제 보위와 독재 구축을 위해 더욱 분발할 것을 독려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번 전원회의에서 나타난 주요 내용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볼 때 북한 당국은 체제 단속의 문고리를 더욱 굳게 닫아걸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중국과의 관계 강화, 자유세계 전체와 대결하는 북-중-러 전선의 모색은 김정은 조선의 구축을 위한 우호적인 환경이 될 수 없다. 중국의 국제적 위상이 추락하면 북한과 중국은 공히 국제 ‘왕따’가 될 뿐이다. 북한 당국은 파멸로 이끄는 ‘전략적 지위’를 포기하고 자유세계로 편입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 북한 당국이 당면한 총체적 위기에서 벗어날 해법은 편법이 아닌 정도(正道)에서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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