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ide-Out NK] 2015年 목함지뢰 사건을 복기(復棋)하다

김정은_당중앙군사위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제7기 제4차 확대회의를 주재했다고 지난달 24일 보도했다. /사진=노동신문/ 뉴스1

통일부가 지난달 발간한 ‘2020년 북한 주요 인물정보·기관별 인명록’에 따르면, 2015년 8월 비무장지대(DMZ) 내 ‘목함지뢰 도발’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북한군 림광일 중장이 대남·해외 공작을 총괄하는 정찰총국장에 기용되는 한편 당 중앙군사위원회에도 진입한 것으로 나타났다. 차제에 한반도를 위기상황으로 몰아갔던 5년 전의 목함지뢰 사건을 기승전결(起承轉結)로 구성해 복기해 본다.

기(起) : 2015년 8월 4일. 경기도 파주시 1사단 소속 GP 수색대원들이 수색을 나갔다가 아군 GP를 잇는 철책의 통문 근처에서 지뢰를 밟았다. 이 사고로 부사관 2명이 무릎과 발목을 잃는 부상을 입었다. 국방부 전비태세검열단 부단장 등으로 구성된 조사단은 엿새 뒤인 8월 10일 ‘폭발 지뢰의 파편이 북한의 목함지뢰와 일치한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는 북한군이 군사분계선을 400여m나 넘어와 지뢰를 매설했다는 것으로 명백한 도발이었다. 한편 조사단은, 지뢰 파편이 부식되지 않았고 나무 파편에서도 강한 송진 냄새가 나는 등 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지뢰라는 점과 우리 군의 수색 간격 및 당시의 기상 상황 등을 고려하여, 7월 26일부터 8월 1일 사이에 지뢰가 매설됐을 것으로 판단했다.

같은 날, 우리 군은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라는 경고와 함께 오후부터 DMZ 11곳에 설치된 대북심리전 확성기 방송을 재개했다. 대북 확성기 방송은 첫날 2곳에서 시작해 점차 확대됐다. 지난 2004년 6월 남북 합의에 따라 방송이 중지된 이후 11년 만이다.

승(承) : 닷새간 침묵을 유지하던 북한은 8월 15일 첫 반응을 보였다. 이날 북한 인민군 전선사령부는 ‘공개경고장’을 통해 “대북심리전 방송을 즉시 중지하고 모든 심리전 수단을 모조리 철거하라”고 하면서 “불응하는 경우 모든 대북심리전 수단들을 초토화해 버리겠다”라고 위협했다. 위협 발언을 하던 북한은 8월 20일 군사 행동에 들어갔다. 이날 오후 3시 53분 고사포 1발을 발사한 데 이어 오후 4시 12분 76.2mm 평곡사포 3발을 발사한 것이다. 우리 군도 즉각 대응에 나섰다. 평곡사포가 발사된 지 25분 뒤인 오후 4시 37분, 28사단장은 상부의 지침을 받아 사격 명령을 내렸고, 이에 따라 155mm 자주포가 오후 5시 4분에 MDL 북쪽 500m 지점으로 29발을 쐈다.

한편 같은 날 김정은은 당 중앙군사위 비상확대회의를 열고 “21일 17시부터 전선 지대에 준전시상태를 선포함”에 대한 최고사령관 명령을 하달하였으며, 총참모부는 “8월 20일 오후 5시부터 48시간 내 대북심리전 방송을 중지하지 않으면 군사적 행동을 개시할 것”이라는 전화통지문을 보내 위협했다.

이에 대응해 한국군은 최고 경계태세인 진돗개 하나를 발령했고, 한미 연합군도 대북 정보감시 태세를 격상해 북한군 동향을 예의 주시하는 등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특히 긴장이 고조되자, 제대를 앞둔 장병들은 전역 연기를 신청하고 예비군들도 ‘불러만 달라’며 조국 수호 의지를 보여주었다.

전(轉) : 북한은 8월 21일 오후 4시 경 김양건 당 대남비서 명의의 통지문을 통해 김관진 국가안보실장과의 접촉을 제안했다. 청와대는 2시간 만인 오후 6시 답신을 보냈다. 김 실장 명의로 보낸 전통문엔 김양건뿐 아니라 북한군을 대표하는 황병서 총정치국장도 나오라는 내용을 담았다. 북한 군부의 대표성을 가진 인물과 대화가 필요하다는 판단에서였다. 두 차례의 수정 제안이 오고 간 끝에, 남북은 ‘2+2 고위급접촉’을 성사시켰고, 22일부터 협상에 들어갔다.

결(結) : 남북은 ‘무박 4일’, 무려 43시간에 걸친 마라톤협상 끝에 8월 25일 0시 55분, 6개 항목에 합의했다. 우리 측은 목함지뢰 사건에 대한 북측의 유감 표명을 확인했고, 북측은 대북심리전 중단 약속을 받아냈다. 이날 정오부터 북한은 준전시상태 해제에 들어갔고, 우리 군도 대북심리전 방송을 중단했다.

2014년 10월 4일 인천 아시안게임 폐막식 참석차 방남한 북한 황병서(오른쪽 둘째) 당시 북한군 총정치국장과 김관진(왼쪽)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인천 남동구 영빈관에서 만나 악수하고 있다. /사진=연합

여기까지가 겉으로 드러난 목함지뢰 사건의 기승전결이다. 그렇다면 벼랑 끝 전술(brinkmanship)로 상황을 몰고 가던 북한이 ‘왜’ 갑자기 태도를 바꿔 먼저 대화를 제의했고 우리 정부의 수정 제안에도 별다른 이의 없이 고위급접촉에 응했는가? 당시의 통설적 평가는 ‘김정은이 상황을 악화시키는 것에 부담을 느껴서’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단견적 판단일 뿐이다.

북한이 태도를 바꾼 비밀의 열쇠는 “8월 20일 오후 5시부터 48시간 내 대북심리전 방송을 중지하지 않으면 군사적 행동을 개시할 것”이라는 총참모부 명의의 전화통지문에 있다. 시한을 정해놓고 강경하게 나서면 대한민국이 뒤로 물러서리라고 오판한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한미는 단호한 연합 방위태세를 과시했고, 그저 자유분방해 보이기만 했던 젊은이들까지 결연한 대북 응징 의지를 보여준 것이다. 마치 2002년 월드컵 때, 전 국민이 하나가 되어 ‘대~한~민~국’을 외치던 모습을 연상케 했다.

김정은으로서는, 자신이 호언한 바와 같이 몇 시간 내에 ‘군사적 행동’을 취하지 않으면 체면이 손상될 수 있는 상황에 빠진 것이다. 이런 곤경을 모면케 해준 인물이 다름 아닌 김양건이다. 아마 ‘남조선에 대화를 제의하면 군사 행동을 하지 않아도 지도자 동지의 체면이 살게 될 것입니다’라고 설득했을 것이다.

다음 두 가지 사례는 이런 판단을 뒷받침하고 있다. 첫째, 남북 합의 3일 뒤인 8월 28일에 당 중앙군사위원회 일부 위원을 해임하고 조직을 개편했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무리수로 드러난 ‘48시간 시한부’ 경고를 제시한 인사와 조직에 대한 문책으로 추정된다. 둘째, 김정은이 김양건(2015.12.29 사망)의 빈소를 찾아 “함께 손잡고 해야 할 많은 일을 앞에 두고, 간다는 말도 없이 야속하게 떠나갔는데 마지막으로 손이라도 한번 따뜻이 잡아보고 보냈으면 이다지 가슴 허비지는 않겠다”라고 매우 애통해했다는 사실이다. 목함지뢰 사건으로 비롯된 자신의 곤혹스러웠던 상황을 구해준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5년 전의 목함지뢰 사건을 복기해 보면 전쟁 일보 직전까지 치달았던 상황은 ‘김정은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 극적으로 반전됐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은, 당시 우리의 안보 책임자들이 먼저 접촉을 제의한 북한의 사정과 의도를 간파하고 회담에 나섰더라면 훨씬 실효성 있는 결과를 거둘 수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전철(前轍)로 삼을 일이다. 그리고 이것이 역사를 배우는 소이연(所以然)이며, 복기를 하는 매력이자 묘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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