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년 평양, 피바람의 숙청을 아는가?

처형된 서관히 농업담당비서

1997년 평양에서는 피의 대숙청이 전개되었다. 전 노동당 농업담당 비서 서관히, 전 정무원 농업위원장 김만금, 전 농업과학원 부원장 피창린, 전 개성시당 책임비서 김기선, 평양시당 책임비서 서윤석 등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진행된 것이다.

그해 11월 북한전역에는 ‘사회안전부가 미제(美帝)의 고용간첩들을 일망타진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내용인즉 서관히는 당의 농업정책을 반대하며 나라의 농사를 망하게 하고, 인민들을 굶겨 죽이려고 했다는 것이다. 또한 서관히가 남한사람과 연결되었다는 증거를 만들어 ‘간첩’으로 몰아 평양시 통일거리 버스로타리에서 공개총살했다.

서관히 사건으로 인해 농업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김만금은 ‘부관참시’ 되었다. 김만금은 서관히의 신분을 보증한 인물이었다. 그의 죄목은 미제의 고용간첩으로 주체농법을 관철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김만금은 이미 1984년에 사망한 사람이었는데, 애국열사릉에 묻혀있던 그의 뼈를 꺼내 총을 쏘았다.

1997년 경은 아사자가 300만명이나 발생한 시기였다. 굶어죽은 시체가 널부러져 시체를 뛰어넘어 다녀야 할 정도였다. 김정일로서는 누군가를 잡아내서 식량난 책임을 뒤집어 씌우지 않으면 위기를 넘기기 어려웠다. 이 때문에 조작해낸 것이 ‘미제간첩 사건’이었다. 북한정권이 숙청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방법이 ‘미제간첩’ ‘남조선 고용간첩’으로 죄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툭하면 ‘미제간첩 사건’이다. 그러나 일단 여기에 연루되면 그 누구든 피의 칼바람을 피해갈 수 없다.

농업과학원 부원장을 지낸 피창린이 처형될 때는 연루된 중앙당 고위급 인사만도 19명에 달했다. 이들은 모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사회안전부가 발표한 피창린의 죄과는 과거 6.25 전쟁 때 남한에 내려와 정치공작대로 활동하던 중 체포되어 전향했다는 것이다. 사회안전부는 피창린이 미제의 간첩으로 고용되어 김일성 암살지령을 받고 탈출자로 위장하여 ‘혁명대오’에 잠입했다고 발표했다.

이들 19명은 과거에 중앙당 부부장, 도당 책임비서 등 요직을 차지한 거물급이었다. 당시 사회안전부 정치부장은 김정일의 비준을 받아 평양시 승호구역에 있는 사회안전부 사격장에서 이들을 모두 총살했다.

서로가 서로를 물고 뜯도록 만든 김정일 독재체제

얼마 후 평양시당 책임비서 서윤석이 검거되었다. 서윤석은 몸이 뚱뚱해 평양시민들은 ‘서대감’ 이라는 별명을 달아 놓았다. 서윤석은 ‘경력 불투명’으로 안전부 구류장에 감금됐다. 평양 전역에 살기가 도는 가운데 서윤석은 투옥되어 뼈만 남은 폐인이 되었다.

평양시당 책임비서가 얼마나 막중한 자리인가? 대숙청이 끝나갈 무렵 김정일은 서윤석까지 처형한다는 것이 너무 민심을 이반시킬까봐 걱정이 되었는지 어느날 서윤석을 불렀다. 폐인이 된 서윤석의 꼴을 본 김정일은 도리어 사회안전부 정치부장에게 화를 내면서 ‘네가 뭐길래 사람들을 자꾸 죽여’라고 질책했다. 사회안전부 정치부장이 마음대로 사람을 죽이고 안전부를 쥐고 흔들었다는 것이다. 당시 사회안전부장 백학림은 늙어서 자리지킴이나 하던 사람이었다.

이로 인해 사회안전부 정치부장은 얼마 후 ‘반당반혁명 분자’로 몰려 처형되고, 김정일은 “사회안전부 소리만 들어도 진저리 난다”며 사회안전부 명칭을 다시 ‘인민보안성’으로 바꿨다.

여기에서 김정일의 교활한 통치술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김정일은 수백만명이 굶어죽은 죄과가 자신에게 돌아올까봐 “나는 경제에 책임이 없다”고 선언(96년 12월)한 다음, 농업담당 서관히 등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며 평양을 살기등등한 분위기로 만들고, 그 살기등등한 분위기를 다시 사회안전부 정치부장에게 책임을 물어 흉흉한 민심을 반전시킨 것이다. 김정일이 얼마나 잔인하며, 또 독재능력이 어느정도인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무시무시한 삶의 현장 속에서 북한주민들은 “조그만 나라에 무슨 간첩이 그렇게 많아? 사람목숨은 파리목숨이다” 며 북한 사회를 한탄하는 데 그칠 수밖에 없었다.

북한에서는 김정일의 말을 안 들으면 하루아침에 ‘미제간첩’ ‘남조선 간첩’이 된다. 김정일의 지시에 반신반의 하면 ‘반동분자’가 되어 사라진다. 김정일은 주민들이 서로가 서로를 물고 뜯으며 오로지 자신에게 ‘충성심’을 발휘하도록 체제를 만들어놓았고, 또 이를 어기면 북한에서 살아가지 못하도록 만들어놓았다.

남한 국민들은 이같은 김정일의 ‘실체’를 언제쯤이면 제대로 알 수 있을까…

한영진 기자(평양출신 2002년 입국)hyj@dailynk.com